EP.41 헛걸음
"나도 역시 모르겠네."
"그렇군요."
어떤 기적이 일어나서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해도 아예 모르고 넘어가는 것은 역시 찝찝하니
누리가 아는 인맥 중에서 가장 박학다식한 성수언에게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모른다, 였다.
"보통 폭주 현상은 당사자가 직접 해결하거나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누르지 않는 이상 해결되기 어렵다네."
아니면 죽거나.
"하지만 자네가 기절했다는 것을 보면 직접 해결한 것도 아니고 하나양이 압도적인 힘을 가진 것도 아니니 의문인 거지."
누리의 부탁으로 건물에 결계를 치고 있던 성수언은 건물 안에서 느껴지던 흑마력의 폭주가 어느 순간 뚝 끊긴 듯이 사라졌기에 의문을 가지고 건물에 진입했다.
건물 안에 들어갔을 때 보았던 것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란히 기절해 있는 누리와 하나뿐.
방안의 집기와 벽이 파손 되어있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아무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리 흑마력이 포착하기 힘든 에너지라고 해도 그 정도로 폭주했으면 잔향이 남아있을 텐데 말이지. 이것도 혹시 자네의 힘인가?"
"... 이번엔 저도 잘 모르겠군요."
확실히 누리 자신의 통제하에 있는 흑마력은 일반적인 흑마력보다 더욱 찾아내기가 힘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폭주로 인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흑마력이 그럴 것 같지는 않고...
더욱이 이상한 것은.
'나조차 그 흔적을 느끼지 못했다.'
누리 본인조차 흑마력의 잔향을 느낄 수 없었으니까.
죽은 자들의 왕인 자신이 흑마력의 잔향을 느끼지 못한다?
그럴 확률은 0이라고 단언 할 수 있으니 잔향은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즉 폭주한 흑마력이 지우개로 지워버린 것처럼 사라졌다.'
솔직히 여기서 하나를 의심하지 않는 것은 바보겠지.
그래서 직접 하나를 살펴봤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도대체 뭐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욱 의문에 빠져들 뿐.
"개인적인 경험을 빌어 충고하자면."
누리가 풀리지 않는 의문에 심각한 얼굴을 한 채 고민하는 것을 보고 있던 성수언이 입을 열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은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좋을 때가 있다네. 물론 동생과 관련된 일이니까 더욱 신경 쓰일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지금은 작은 단서조차 없지 않은가?"
단서조차 없이 풀리지 않는 의문을 계속 고민하고 있으면 그건 시간 낭비일 뿐.
그럴 바엔 차라리 무언가 단서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일 때도 있는 법이다.
"아예 잊어버리란 말이 아니네. 그냥 가슴속에 품고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풀리는 경우가 꽤 있거든."
"네. 충고 감사합니다."
그의 말대로 하나가 관련되니 더욱 신경이 쓰여 생각을 떨쳐내지 못한 것 같다.
작은 단서조차 없으니 지금은 머리 구석에 집어넣어 두는 게 맞겠지.
그렇게 성수언과의 상담을 끝내고 밖으로 나와보니 하나와 유시윤이 같이 서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둘은 처음 보던가요? 하나야 이쪽은 천유ㄱ..."
"아아. 너 기절해 있을 때 인사 나눴으니 소개는 됐어. 그보다 한 가지 제안할 게 있는데."
"제안...말입니까?"
갑작스러운 유시윤의 말에 누리는 의문에 차 되물었다.
"그래. 내가 네 동생에게 검을 가르쳐 볼까 하는데."
"뭐라고요?!"
유시윤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누리도 하나도 아닌 바로 성수언.
"지금 제 제자를 가로채시겠다는 겁니까?"
처음엔 누리의 부탁으로 받았던 제자였지만 가르쳐 보니 은근히 가르치는 맛이 쏠쏠했다.
기존에 제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하나를 가르치는 방식인 일반적인 마법사의 방식과 궤를 달리하기 때문에 더욱 재미를 느꼈다.
그래서 요즘은 하나를 가르치는 시간을 두배로 늘렸을 정도.
"걱정마라. 어차피 이미 마력을 쌓아서 오러는 쌓지도 못해."
하지만 유시윤은 성수언의 걱정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그럼 왜...."
"그냥 좀 살펴보니 몸을 쓰는 것에 재능이 보여서 말이야. 아까워서 검술만 간단하게 가르쳐 볼려고."
그러고선 옆에 서 있는 하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본인이 허락하는 게 가장 중요하지만 말이야."
셋의 시선이 동시에 자신에게 향하자 당황한 하나는 자신의 오빠와 스승을 번갈아 바라보며 도움의 눈길을 청했다.
"으음. 그냥 검술 정도면 괜찮겠지."
"네가 원한다면 마음대로 해. 본격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호신용 정도면 괜찮겠지."
스승과 오빠의 허락이 떨어지자 잠시 고민하던 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는 최근 스승님에게 가르침을 받을 때마다 조금씩 힘이 커져 가는 자신을 보고 상당한 성취감을 느끼며 이능 자체에 대한 흥미가 커지고 있었다.
그와 중에 유시윤의 제안에 하나가 흥미를 느끼지 않을리 없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천유가주님."
"그냥 시윤이라고 불러라."
"네. 시윤님."
누리는 그런 하나와 유시윤을 보면서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웬만해서는 하나와 이능사회를 엮이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배우는 것 자체는 유시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은 자신으로서도 강해지고 싶은 하나로서도 좋은 일.
갑작스러운 유시윤의 제안이 의문스럽긴 했지만, 수상한 짓을 하면 같이 가르치는 성수언이 알아서 대처하거나 알려오겠지.
'메인 스토리가 시작되면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르니까 아예 모르게 두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결국 고민하던 누리는 선택을 하나에게 맡기기로 하였고,
하나는 한 명의 스승이 추가로 생기게 되었다.
처음엔 그렇게 힘들어하더니 새로 수련받는 것을 거절하지도 않고 이제 좀 할만한가 보다.
"그럼 난 성가놈 하고 시간 조절을 해볼 테니 내일 이곳에서 보자."
"네. 시윤님."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일은 나중에 꼭 보상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먼저 임시본부를 떠나는 하나와 누리.
"...."
그리고 그런 둘, 정확히는 하나의 뒷모습을 미묘한 눈으로 바라보는 유시윤.
아직 이능사회의 문화에 익숙지 못한 누리와 이능사회 자체를 잘 모르는 하나이기에 한가지 놓친 점이 있었다.
검술 가문에서 가문의 사람이 아닌 사람에게 검술을 가르친다난 것의 의미.
"응? 안 들어오고 뭐 하십니까."
"....성질 급하긴. 그래. 지금 간다."
"그러고 보니 하나양에게 뭘 가르치실 겁니까? 뭐 알고계시는 외부 검술이야 많으실 테지만 너무 아무거나 가르치면 제 자존심이 상합니다만."
".....천검."
그것도 가문의 비전을.
"아. 천검.....네?"
순간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되어 되묻는 성수언.
"똑바로 들은 거 맞으니까 닥치고 있어."
성수언이 유시윤을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다.
천유가문의 직계만 익히는 게 허락되는 비전 천검.
천검이야말로 지금의 천유가문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비전이 건만 그것을 외인인 하나에게 가르친다?
수상해도 너무 수상하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십니까."
아무리 천유가문의 가주라 해도 자신의 제자에게 수작을 부린다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멍청한새꺄. 내가 수작 부리려면 이렇게 순순히 말해주겠냐. 너한테 말도 안 했겠지."
".....그건 그렇네요."
순식간에 납득하고는 분노를 꺼트린 성수언.
"벌써 팔불출 왔냐?"
"흠흠. 하긴. 어차피 오러연공법을 못 익히면 반쪽짜리니까요."
"그냥..... 좀 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리 말하면서 유시윤은 누리와 하나가 사라진 길을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긴 눈으로 다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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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누리가 멍청한 선택으로 시간을 보낼 때쯤.
누리가 굴린 스노우볼은 열심히 굴러가며 그 크기를 키우고 있었으니.
그는 그저 자신이 말하면 무언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고는 대비를 할 줄 알고선 내뱉은 말이었지만,
"괴물이군."
"흑탑주의 힘도 이해가 안 되는데 저 괴물은 도대체 뭐지?"
"진정 인간을 초월한 건가?"
"신이 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누리의 압도적인 힘에 겁을 집어먹은 이능력자들은 각종 소문을 생산해냈고.
"멸망?"
"그러고 보니 흑마술사들의 예언 내용이..."
"분명 '멸망의 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왕이 강림하리다'였지."
"무언가 재앙이라도 일어난다는 건가?"
어느 정도 누리가 의도한 방향으로 흐르다가도.
"직접 멸망이라도 시키겠다는 건가?"
"어쩌면 예언부터 그런 뜻이었던 것일지도."
"교회만 어찌한다면...."
"가능할지도."
그 뜻을 오해한 이들에게 소문의 살이 덕지덕지 붙으면서.
"교회가 나서겠지?"
"아무리 강해도 교회가 전력을 다한다면야."
"충분히 이길 수 있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더니.
"교회가 나선다고?"
"당연히 그러겠지."
"멸망이든 아니든 교회가 자기들 지위 흔들리는 걸 보고 있을 것 같아?"
전 세계의 이능집단들이 교회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교회가 이러한 정보를 접한 것이 어느 정도 소문이 진행된 이후라는 점.
너무 빠르게 진행된 소문은 고작 하루 늦게 정보를 접했음에도 교회의 손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결국 교회는 긴급 수뇌부 회의에 들어갔고 장시간의 회의를 거친 결과.
'흑탑을 토벌한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흑탑 쪽에서 먼저 자신들과의 관계를 깨고 뒤통수를 치려고 했으니 명분 또한 있고 만약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교회의 명성이 추락할 것이라는 게 수뇌부의 판단이었다.
유례없는 교회의 전력 투사.
그동안의 거래로 인해 흑탑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었던 교회의 수뇌부는 정밀 타격을 위해 교회의 비고에 있던 대규모 이동용 유물을 꺼내 들기까지 했다.
지금은 실전된 고대의 자유로운 이동 마법을, 그것도 대규모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소모성 아티팩트.
가치로는 따질 수 없는 천고의 보물.
교회가 어느 정도의 마음을 먹었는지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물론 유물에 관련해선 극비에 극비로 다뤘기에 당일이 될 때까지 지휘관들을 제외한 교인들은 토벌방식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다가온 토벌 당일.
집합 장소에 모인 전투단의 총지휘관인 로베르트 추기경이 유물을 사용했다.
"출전!!!"
번쩍.
엄청난 광채가 모든 병력을 뒤덮었고 조금 시간이 지나 다시 빛이 사그라졌을 때 눈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은 교회의 건물이 아닌 나무가 가득한 우림.
시야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나무밖에 없을 정도로 광활하디 광활한 우림이었다.
그래.
웅성웅성.
"이게 어떻게 된 거냐!"
"그, 그게 성하께서 알려주신 좌표는 이곳이 맞습니다."
"그럼 흑탑은 어디로 갔단 말이냐!"
"그건 저도 잘....."
"당장 교회에 연락해라!"
정말 나무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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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실렌."
"별말씀을 다 하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