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4 주인공 side 2
"그래. 좀 바뀌었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강미르가 한동안 머리를 쥐어 잡고 내린 결론.
스토리가 조금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할 일은 바뀌지 않는다.
스윽.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느낌.
진짜로 죽을 수도 있다는 죽음의 공포.
살이 터지고 뼈를 부수며 피범벅이 되었던, 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이는 감각.
강미르는 그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살아남는다."
죽기 싫다.
죽음이 두렵다.
끝이 온다는 게, 그 끝의 다음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는 게 두렵고 무섭다.
그렇기에 살고 싶다.
그러니 살아남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손으로 고블린을 때려죽인 경험은 강미르의 뇌리에 단단히 박혀버렸고,
이 경험은 게임 속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에 흥분에 빠져있던 강미르의 머리에 강한 죽음의 공포를 새겨버렸다.
이것이 강미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강미르 자신조차도 몰랐다.
----
게임의 스토리와 완전히 달라진 상황 때문에 원래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아직 괜찮다.
'유길성.'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며 이름을 남기고 협회에 가보라던 남자.
협회의 눈에 들지 못한 대신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죽음의 공포는 그 무엇보다 강한 실행력을 주기에 망설이지 않고 협회의 사람을 찾아간 강미르.
아직 대피소 안이었지만 협회의 사람을 알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허리춤에 매달려있는 검은 그 무엇보다도 눈에 띄었으니까.
다가가서 곧장 유길성의 이름을 대니 처음엔 수상쩍은 표정을 짓던 남자는 어딘가로 연락하더니 곧 놀란 표정으로 강미르를 데리고 갔다.
"하하. 전 사태가 잠잠해지면 찾아오실 줄 알았는데 설마 바로 찾으실 줄은 몰랐네요."
남자를 따라간 곳에서 기다리던 인물은 바로 유길성.
자신을 안내한 남자가 정중하게 인사하는 것을 보니 예상보다 높은 인물인 듯싶다.
'오히려 잘됐어.'
"저도 돕고 싶습니다."
사태가 진정되기 전에 활약해야 진입할 수 있는 정석 루트.
까딱 잘못하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예측할 수 없어지기에 앞뒤 가릴 것 없이 지른다.
"....지금 당장이요?"
강미르의 저돌적인 말에 유길성이 되물었지만, 더욱 확고한 대답만 돌아올 뿐.
"네. 무슨 일이든 좋습니다. 바깥에서 저도 돕고 싶습니다."
일단 어떤 식으로든 바깥으로 나가 무기를 얻고 활약한다.
그리고 그 전에 가장 중요한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
자신이 존버루트를 선택하지 않고 정석루트를 밟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안전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
게임 속에서 중간 저장이 있지만 현실에 중간 저장 따위 없다.
하지만 여기서 유길성의 도움을 얻으면 안전까지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으음. 확실히 재능을 알기 위해서는 실전만 한 것이 없긴 하지만...."
살면서 한 번도 싸워본 적 없는 그였지만 미르라는 캐릭터의 가능성을 믿었다.
게임 주인공이 괜히 주인공이겠는가.
어떤 식으로든 세계를 구할 운명이기에 주인공이다.
"알겠습니다."
결국 떨어진 허락.
"사람 한 명을 붙여드리죠."
다행히 자신의 예상대로 자신의 안전까지 신경 쓰는 유길성.
거절하지 않고 냉큼 제안을 수락한다.
"감사합니ㄷ..."
"단."
하지만 유길성도 단순히 친절만을 베풀지는 않았다.
"당신에게 정말 재능이 있다면 반드시 천유가에 온다는 약속을 해주셔야겠습니다."
"네. 약속드리죠."
어차피 한국삼주중 어디에 속하든 정석루트에 변화를 주진 않는다.
오히려 첫 번째 기둥인 천유가문이면 더욱 좋겠지.
"시원시원하군요. 좋습니다. 믿고 따로 계약은 하지 않죠."
강미르의 단언이 마음에 들었는지 곧바로 사람을 붙이고 그가 요청한 간단한 방어구와 칼까지 한 자루 내어주었다.
그렇게 비장한 마음으로 강미르가 밖으로 나가자 유길성은 곧바로 어디론가 전화하였다.
"시키신 데로 사람을 붙여놨습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고작 재능 있어 보인다는 점 하나만으로 목숨이 위험한 싸움터에 내보내는 점부터,
사람 한 명이 아쉬운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겨우 재능을 알아보기 위해 실력자 하나를 제외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네.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곳을 게임 속이라 굳게 믿고 있는 강미르는 별 의심을 하지 않았기에 그냥 넘어갔을 뿐.
뚝.
"도대체 간에 고모님은 무슨 생각이신 건지."
유길성은 통화를 마치고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나도 일해야지. 일."
-----
결론만 말하자면 다행히도 강미르의 몸은 재능이 있었다.
힘을 몰빵 했기에 검을 휘두르는 완력은 차고 넘쳤고 초기에 주어지는 기초 검 숙련 스킬 때문인지 처음 검을 다루는데도 막힘이 없었다.
물론 고블린같이 약한 몬스터만 잡았기에 그렇게 느낀 것일지도 모르지만,
"호오."
"흐음."
"괜찮군."
유길성이 붙여준 남자의 반응으로 봐서는 착각은 아닌 듯싶었다.
이 기세를 몰아붙여 더욱 많은 활약을 하고 경험치를 쌓으려 했지만, 상황은 강미르의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았으니.
"왜지?"
분명 게임에선 열흘 넘게 혼란이 지속된 이후에야 겨우 국가와 협회에서 손잡고 수습했었는데...
[기적의 대한민국!]
[침공을 단 3일 만에 막아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안정화를 이뤄낸 비결은?]
[이능력자들의 출현!]
[안정화의 주역. 삼주와 협회를 알아보다.]
강미르는 손에 들린 스마트폰의 화면을 가득 채우는 각종 국뽕기사들의 향연에 깊은 의문을 느꼈다.
상황이 수습되고 이능력자들이 전면에 나선다는 것은 같았지만,
"빨라도 너무 빨라."
고작 3일.
열흘 넘게 지속되고 엄청난 숫자의 사상자가 발생해야 하는 혼란이 고작 3일 만에 수습되어 버린 것이다.
심지어 한국보단 느리더라도 다른 나라들 또한 며칠 지나지 않자 속속들이 수습되어 가고 있었다.
이건 마치.
"미리 알고 있었다고?"
첫날의 대피와 수습부터 그 이후의 대처까지.
아무리 눈치 없는 자신이라도 알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을 미리 알고 대처했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진정 게임 속과 현실은 다르다는 건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무엇이 있나?
하지만 아무리 혼자 고민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그는 결정해야만 했다.
게임의 설정을 믿고 루트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게임의 설정을 무시하고 스스로 판단을 내릴 것인지.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결국.
"....조금 바뀌었어도 루트를 따라가면 안전할 거야."
누군가와는 다른 판단을 내렸다.
"나는 살아야 해."
그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의 생각 저변에 깔린 죽음의 공포와 그로 인한 강한 생존 욕구가 이미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초반이 조금 꼬였어도 천유가에 소속될 수 있으니 오히려 상황은 더 나아졌어."
협회의 눈에 띄어 각종 이능집단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어딘가에 소속되어 안정적으로 성장을 한 뒤 안전하게 게임을 진행하는 것이 정석 루트의 기본 골자였다.
여기서 제의받는 이능집단의 수준은 보통 피지컬로 결정이 나는데 캐릭터 보정으로 웬만해선 삼주에 들어갈 수 있었다.
거기에 삼주 중 첫 번째 기둥인 천유가에 들어간다면 금상첨화.
아직 결정 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천유가에 속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은 오히려 좋은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며칠이 지난 뒤 유길성에게 온 연락.
'약속대로 천유가 입단하시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거절할 이유가 한 개도 없기에 곧바로 천유가에 입단하여 가문의 지원을 받기 시작한 강미르.
게임처럼 상태창을 볼 수는 없지만 스킬을 익히듯이 어떠한 기술도 쉽게 익혔고,
경험치가 쌓이듯이 몬스터를 잡을 때마다 실력이 나날이 늘어갔다.
그리고
"역시 이곳은 이스트헌터스토리가 맞아."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이곳이 게임 속이란 믿음이 더욱 커져만 갔다.
게임 속이 아니면 자신이 이렇게 강해지는 것이 말이 되겠나.
굳은 믿음을 가지고 게임 속의 루트를 차근차근 따라가며 강미르는 날이 가면 갈수록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그렇게 날이 갈수록 치솟는 자신감으로 죽음의 공포를 저 밑바닥에 가라앉히고 잊고 살던 어느 날,
"가주님이요?"
"그래. 가주님이 한번 뵙자고 하시네요."
한동안 보지 못했던 유길성이 찾아와 가주가 부른다는 말을 전해왔다.
"왜 가주님이 저를...."
천유가주 유시윤.
여자의 몸으로 첫 번째 기둥 천유의 가주에 오른 입지적인 인물로 수십 년 전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지금에 와서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로 자리매김한 당사자.
"요즘 미르님의 소문이 자자하지 않습니까. 아마 그 때문이 아닐는지."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일반대중의 이능력자에 대한 관심이 끝도 모르고 높아져만 가는 상황에서,
침공이 시작된 직후 이능력자가 되어 실력을 높이고 있는 인물의 소문이 나지 않을 리 없었다.
그것도 첫 번째 기둥 천유가문의 소속이니 일반대중뿐만이 아닌 이능력자들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그런 와중 천유가주의 귀에 소문이 들어가지 않을 리 없었다.
"자. 가시죠."
"네."
너무 갑작스럽긴 해도 여기서 거절할 정도로 강미르는 멍청하지 않았다.
애초에 가문소속이라 거절할 명문도 없긴 하지만.
유길성이 인도에 도착한 곳은 바로 천유그룹 본사의 꼭대기 층.
큼지막하게 회장실이라 쓰여 있는 방을 보니 방의 사용 용도를 착각할 일은 없어 보였다.
철컥.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집무 볼 때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책상, 손님용 테이블과 소파들.
"가주님 데려왔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강미르라고 합니다. 가주님."
그 테이블 가장 상석에 앉아있는 할머니. 아마 천유가주인 유시윤이겠지.
"그래. 길성이는 수고했고. 넌 이리 와서 앉아봐."
"....."
그리고 유시윤의 오른편에 앉아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한 명의 남자.
"저 이분은...."
"아. 소개를 깜빡했네. 이쪽은 이래저래 가문을 도와주고 있는 파불라 엑시티움의 수장. 김누리."
그때까지도 강미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 김누리는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김누리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