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7 만남
3년 전 그림자를 찾기 위해 레이첼이 한국에 남겠다고 말했을 때.
사실 올리버도 그림자를 찾아내고 싶었다.
아주 잠깐이라지만 완전히 제압당해 무방비상태에 노출되었던 자신.
만약 그때 그림자가 공격하려고 마음을 먹었으면 아마 그 자리에서 살아 돌아가지 못했겠지.
자신이 살아남은 것은 오로지 그림자가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
'하. 이 내가 적의 자비로 살아남았다는 건가.'
자신의 실력에 큰 자부심을 지니고 있던 올리버는 적의 자비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자존심의 상처로 다가왔다.
마음 같아선 레이첼과 함께 남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퀸즈가드를 이끄는 자신과 레이첼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혼자서 본국으로 귀환했지만, 자존심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올리버를 계속 괴롭혔다.
하지만 고작 자존심의 상처 때문에 무너질 정도로 자신은 약하지 않다.
고통을 양분 삼고 상처를 밟판 삼아 더욱더 자신을 몰아쳤고,
결국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데 성공한 올리버.
특히 그림자의 출현조차 느끼지 못한 것을 복기하며 감각을 중점으로 실력을 끌어올렸다.
그 성과가 있던 것일까.
레이첼이 안내한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흑마력.'
건물 곳곳에서 정제된 흑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흑마력을 느끼고서 떠오른 3년 전의 일.
폭주한 모조엘릭서와 흑마력. 그것을 진정시킨 그림자.
그리고 그림자를 찾겠다고 남은 레이첼.
'이곳의 수장이 그림자인가 보군.'
3년 전 자신을 제압하고 폭주를 진정시킨 뒤 사라진 그림자.
만약 3년 전이라면 못 느꼈을 것이 분명할 정도로 정제된 흑마력이었기에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아마 모조엘릭서를 폭주시킨 흑마력과 같은 것이겠지.
이내 도착한 곳에는 평범한 인상의 청년이 한 명 앉아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저는 파불라 엑시티움을 이끄는 김누리라고 합ㄴ...."
"네가 그림자로군."
"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코어라는 순수한 에너지 덩어리를 지니고 태어난다.
이 코어의 에너지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천천히 감소하고 이 코어의 에너지가 떨어지면 그것이 자연사.
과거 몇몇 위정자들이 코어를 채워 수명을 늘려보려고 시도했었지만 모두 실패.
신이 아닌 이상 채울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코어다.
하지만 이 코어라는 것이 평생 활동하지 않느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바로 감정.
코어의 에너지는 사람의 감정에 반응을 보인다.
사람이 격렬한 감정을 느끼면 코어도 격렬한 활동성을 띠는 것이다.
물론 그런다고 총량이 변하진 않지만 어쨌든
올리버의 한층 더 확장된 감각은 이런 코어의 움직임까지 느끼게 해줬고 눈앞에서 자신을 김누리라 소개한 남자의 코어 또한 느껴졌다.
하지만 김누리라는 남자의 코어에서는 그 어떠한 움직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감정이 없거나.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처럼 말이야."
코어를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람의 범주를 벗어난 존재.
그리고 얼마 전 올리버는 사람을 뛰어넘은 존재에 대해서 보고 받았다.
바로 죽은 자들의 왕.
만약 3년 전의 그림자가 보고받은 죽은 자들의 왕이라면 자신을 제압한 힘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렇군요."
올리버의 설명을 전부 들은 누리는 그제야 자신의 정체를 들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누리에게는 코어가 없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누리의 몸 자체가 거대한 흑마력으로 이루어진 코어이다.
그 크기가 일반적인 이능력자조차 느낄 수 있을 정도.
그러니 숨기기 위해 흑마력을 통제하여 일반적인 코어처럼 보이도록 해 놨는데...
"설마 그 통제 때문에 들킬 줄은 몰랐네요."
통제가 너무 완벽하기에 생겨난 맹점.
하지만 누리도 억울한 점은 있었다.
"코어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애초에 누리의 코어가 예외적인 경우일 뿐. 일반적인 코어는 이능력자는커녕 마스터급도 직접 접촉하지 않는 이상 감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글쎄. 네놈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딱히 칭찬 같지는 않군."
자신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낸 대상에게 칭찬을 들어봤자 기분이 좋아질 리 없었다.
"아뇨. 이건 진심입니다. 코어를 직접 느낄 수 있다니."
실제로 누리는 대단하다는 생각을 넘어 기쁨까지 느끼고 있었다.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을 올리버는 해낸 것이다.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
즉 인간의 한계.
올리버는 일부분이긴 하지만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원인도 이유도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한계를 넘어설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것.
'어쩌면....'
누리가 혼자서 생각에 빠져 들으려니 올리버가 입을 열어 누리의 정신을 일깨웠다.
"지금 내 얘기는 할 필요 없는 것 같군."
"아. 죄송합니다. 다신 한번 저는 파불라..."
"그렇다고 네 소개도 필요 없다."
"....네?"
그럼 이곳에 무엇을 하러 왔단 말인가?
라는 질문을 표정으로 표현해낸 누리의 생각을 알아챈 듯 올리버는 자신의 용건을 말했다.
"나는 너와 싸우기를 원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누리는 약 3년 전 레이첼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당신이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군요.'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저와 싸워주십시오.'
그녀는 아버지인 올리버를 싫어하는 모양이지만 누리가 보기에는 둘이 똑 닮아있었다.
저 고집 어린 얼굴 좀 봐라. 빼다 박지 않았나.
"....이유는 듣지 않아도 알겠군요."
3년 전. 가연이를 치료하기 위해 잠시간 제압했던 일.
"알고 있으면 따로 설명은 필요 없겠군."
올리버는 투쟁심이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누리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봐주지 않아도 된다. 목숨을 잃어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 나와 싸워라."
"당신이 책임을 묻지 않아도 제가 곤란합니다만....."
영국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침공 당시 활약하는 모습 덕분에 이제 대중들에게 마저 영웅으로 불리고 있는 올리버가 만약 한국에서 실종이 된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조차 되지 않는다.
거기다 개인적으로도 인간의 한계를 조금이나마 벗어난 올리버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저 고집어린 얼굴을 보니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도 않은 상황.
'그냥 솔직하게 정체를 밝히고 레이첼이 이곳에 머무는 걸 허락받을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기사들의 고집과 명예를 상정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도 있긴 하지만 어쩌겠나. 이미 벌어진 일.
"네. 알겠습니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좋아. 그럼..."
"단."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칼을 뽑을 기세인 올리버의 말을 끊는 누리.
"제 쪽에서는 전혀 이득 될 것이 없으니 저도 조건을 걸겠습니다."
"뭐지?"
올리버는 몸이 달아오르는지 빨리 말하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우선 첫 번째로 전 최선을 다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으니까. 대신 당신이 최선을 다할 수 있을 정도로는 해드리죠."
싸움은 레이첼과 비슷한 조건으로.
"두 번째로 레이첼이 이곳에서 활동하는 것을 허락해주십시오."
본 목적도 잊지 않고 챙긴다.
"....."
급한 표정이던 올리버는 누리의 조건을 듣고는 다시 굳은 표정을 지으며 잠시간 고민했다.
"....첫 번째 조건은 그렇다 치고."
그리고 이내 입을 연 올리버.
"두 번째 조건은 레이첼이 원한다면 허락하는 걸로 하지."
그 말에 나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올리버의 뒤에서 있던 레이첼은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거라면 당연히 받아들이죠."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다.
"좋아. 이제 앞장서라."
"네. 이쪽으로."
그렇게 올리버를 이끌고 누리가 도착한 곳은 확장공사를 하는 김에 규모를 확 늘려버린 널따란 훈련장이었다.
"이곳에서는 안심하고 실력을 발휘하셔도 됩니다."
스르릉.
올리버는 침공 이후 이능력자들이 공식적으로 국가에 인정받고 딱히 숨길 필요가 없어진 검을 가타부타 말도 없이 허리춤에서 뽑아낸다.
스르륵.
어쩌면 초월을 엿볼지도 모르는 올리버이기에 누리도 미리 어둠을 꺼내 든다.
쿵.
그런 누리의 모습을 보고 묵직하게 말을 굴리는 올리버.
램퍼트 소드맨십. 제1형. Battering Ram(배터링 램).
올리버의 커다란 체구가 전신에서 푸른 오러를 줄기줄기 내뿜으며 돌진해온다.
누리의 어둠과 올리버의 몸이 충돌하는 순간.
콰과강!!
울려 퍼진 엄청난 폭음.
레이첼에겐 미안하지만 비교할 수 없는 묵직함이 누리에게 다가왔다.
뿜어져 나오던 오러도 누리와 부딪히는 순간 순식간에 안정되어 마치 푸른 장벽을 온몸에 두르고 있는 듯한 올리버.
카가가각!!
올리버의 돌진은 막혔음에도 멈추지 않았다.
막든 피하든 상관없다는 듯이 그저 우직하게 전진할 뿐.
물론 누리의 어둠이 그저 우직하게 전진한다고 부서질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카각!카가가각!
조금씩. 정말 조금씩이나마 어둠이 밀려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누리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쿵!
올리버가 다시 한번 발을 굴러 어둠의 반발력을 이용해 높게 뛰어오른다.
램퍼트 소드맨십. 제 2형. Siege Tower(시즈 타워).
푸른 장벽을 두르고 떨어지는 올리버의 모습은 마치 혜성을 보는 듯했고.
콰아아아앙!!!
그 위력 또한 진짜 혜성과 다름없었다.
추락과 동시에 내려쳐진 검은 엄청난 거력을 지닌 채 어둠을 밀어낼 뿐만이 아니라
카가가각.
어둠을 갉아내고 있었다.
램퍼트 소드맨십. 제 3형. Trebuchet(트레뷰셋).
그대로 공중에서 이어지는 검의 반발력을 이용한 연계.
쾅!쾅!쾅!쾅!
공격이 이어질수록 더욱 강해지는 충격.
레이첼때와는 다르게 그의 검은 부러질 생각을 하지 않고 점점 충격이 쌓아갔다.
그리고 이내.
찌지지직.
푸른 검이 어둠을 찢어발겼다.
말 그대로 천이 찢겨 나가듯이 찢어져 버린 어둠.
그리고 그 너머로 다가오는 푸른 검.
그때까지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검을 멍하니 바라보던 누리는.
씨익.
만면 가득히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