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8 만남
아무리 스스로 인간이라고 주장해도, 스스로 인간이라는 믿음을 가져도.
아무리 피를 많이 흘려도, 심장이 터져나가고 머리가 사라져도 죽지 않는 인간을 과연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의심.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심장이 뛰고 있지만 진정 이것이 진짜인지. 자신의 믿음이 만들어낸 환영은 아닌지.
감정을 느끼지만 그저 스스로를 암시하고 있을 뿐이 아닌지.
모든 것이 자신의 힘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닌지.
아무리 스스로 인간이라 믿음을 가져도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물며 인간을 초월한 힘까지 지니고 있으니.
그래서 항상 생각하고는 했다.
한 명.
단 한 명이라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힘을 가지고 있다면 조금이나마 의심을 지울 수 있을 텐데.
조금이나마 더 확신을 가질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인간의 한계는 너무 명확했고 인간중 최강자들인 마스터급의 경지조차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그런데.
찌지지직.
찢기는 어둠과 그 사이를 가르고 날아드는 푸른 검.
분명 자신을 반으로 갈라버리겠다는 의지가 가득 들어차 있는 것이 확실하건만,
"후후후."
누리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 차 있었다.
촤아아악!
"누리님!!"
막지도, 그렇다고 피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던 누리를 올리버의 검이 가차없이 배고 지나갔고.
그 모습을 본 레이첼의 비명이 울려 퍼진다.
"뭐지?"
하지만 가장 당황한 것은 누리를 베어낸 올리버 자신이었다.
환영도 속임수도 아니다.
분명 손에 베는 감각이 남아있다.
이렇게 쉽게 죽었다고?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냈던 그림자이자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죽은 자들의 왕이?
뒤를 돌아 반으로 갈라진 시체를 보아도 믿기지를 않는다.
그래도 언제까지고 멍하니 있을 수는 없기에 아직도 시체를 바라보고만 있던 레이첼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이 느낌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를 않네."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올리버와 레이첼이 동시에 누리의 시체가 있는 장소로 시선을 돌렸다.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있던 시체와 그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
스르륵.
분명 이미 생명이 빠져나가 죽음만이 가득해야 하는 시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시간을 뒤로 감는 것처럼 갈라진 몸이 합쳐지고 흘러나온 피가 스며든다.
"이거 죄송합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순간 막는 것도 잊어버렸네요."
이내 피 한 방울 없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누리.
"....그래. 분명 예언에는 불사가 있었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강림한다는 구절.
여러 가지 해석이 있었지만 가장 설득력 있던 것은 불사성을 뜻한다는 해석이었다.
"정작 저는 이 느낌을 싫어해서 다칠 일을 만들지 않지만요."
고통이라 말하기도, 그렇다고 쾌감이라 말하기도 오묘한.
죽었지만 살아있는 듯한, 말 그대로 생과 사의 경계에 있는 느낌.
누리는 이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을 달가워하지 않았기에 웬만해서는 상처 입거나 죽는 것을 지양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너무 기쁜 나머지 올리버의 공격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자. 다시 시작할까요."
누리는 기쁜 감정을 전혀 숨기지 않으며 올리버를 향해 말했고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올리버는 이내 자세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장기전은 전혀 의미가 없을 것 같으니 한 방에 끝내겠다."
"원하시는 데로."
쿵.
누리는 발을 가볍게 구르며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어둠을 뽑아낸다.
세계구축. Abyss(어비스).
상대가 한계를 넘어설 가능성을 보여줬으니 그에 보답하는 게 맞겠지.
'사실 내가 보고 싶은 것도 있긴 하지만.'
그가 과연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말이다.
우우우웅.
그때 들려오기 시작한 소리.
마치 말벌의 날갯짓과 닮아있는 소리는 올리버가 들고 있는 검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오오오!"
"사실 이 기술은 자네 덕분에 만들었다고 할 수 있지."
영상 속에서 봤던, 그리고 지금도 보고 있는 것.
자신의 심상에 가상이 아닌 현상세계 자체를 담는 기술.
처음 영상으로 이 기술을 접했을 때 올리버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목표로 해야 하는 지표가 바로 저것이라고.
'하지만 당장 저것을 따라 하는 것은 불가능이란 걸 나도 알고 있다.'
솔직히 저 남자가 지금 보여주는 기술은 도저히 따라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저 김누리라는 남자가 나타나 흑탑주를 죽이기 전 흑탑주가 사용했던 기술.
김누리가 펼친 세계를 어설프게 따라 한 듯한 기술.
물론 흑탑주가 사용한 기술 또한 당장 올리버가 펼치기에는 불가능하지만, 그 범위를 검에만 축소 시킨다면?
'오로지 검에만 한정시켜서.'
직접 현실에 끌어올 수 없는 심상세계의 힘을 한정된 공간에 쑤셔 넣어 흘러 넘치게 만든다.
올리버의 심상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요새.
그 모든 것을 검에 담는다.
키이이이잉!!
그러자 진동하는 것을 넘어 엄청난 고주파를 뿜어내며 푸른 빛이 흘러넘치기 시작하는 검.
"간다."
만약 3년 전 저 남자에게 당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자신을 혹사하는 수련으로 성취를 보지 못했다면 불가능했을 기술.
램파트 소드맨십. 미완성 형. Fortress Gun(요새포).
올리버가 검을 허공으로 찌름과 동시에.
콰장창!
터져나가는 검.
올리버의 연속적인 강공에도 버티던 검이 고작 찌르기 한 번에 터져나갔지만, 표정에 만족스러움이 번져나가는 올리버.
'온다.'
그 이유가 누리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올리버의 검이 터져나감과 동시에 쏟아져 나온 올리버의 '세계'.
흑탑주처럼 어설프게 세계의 힘만 빌리는, 심상세계와 다를 바 없는 사용법이 아닌 누리의 어비스와 같이 세계 그 자체를 사용하는 공격.
'세계동화를 사용하면 쉽게 막을 수 있겠지만....'
그러지 않는다. 그의 공격이 어디까지 닿는지 확인하고 싶으니까.
미련하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만약 그의 공격이 어비스를 뚫어낸다면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내가 인간이라는 확신을.'
누리는 어비스를 조종해 자신의 앞과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 레이첼의 앞까지 막아둔다.
설명은 길었지만, 올리버의 '세계'가 누리에게 도달하는 시간은 찰나.
올리의 '세계'와 누리의 '세계'가 충돌한다.
번쩍!
충돌음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빛과 소음이 인지를 초월했다고 해야 하나?
'레이첼에게도 어비스를 씌워두길 잘했네.'
눈에 좀 더 힘을 집중하자 그제야 보이기 시작하는 광경.
누리의 세계는 묵묵하게 막아내고 올리버의 세계는 어떻게든 누리의 세계를 뚫기 위해 끊임없이 충돌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이 또한 설명은 길었지만, 찰나지간에 일어난 일.
비등비등해 보이던 전세는 순식간에 한쪽으로 기울어졌고,
콰직.
푸름은 어둠에 잡아먹혔다.
쿠와아아앙.
그제서야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하는 소리.
마치 폭발의 후폭풍 같은 강렬한 바람과 은은한 폭발음이 사라져간다.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완전한 침묵을 되찾은 누리의 심연.
'결국 뚫어내지는 못했군.'
누리는 내심 실망하였지만 그래도 희망을 보았다는 것에 충분히 만족했다.
분명 올리버는 불완전하게나마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기술을 사용했고,
어비스를 뚫어내지는 못했지만 분명 그의 세계는 어비스에 맞서는 데 성공했다.
"....졌군."
그때 올리버가 손잡이만 남은 자신의 검을 멍하니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어떻게, 만족하셨습니까."
"...그래."
완전히 졌다.
상대에게는 상처는커녕 흠집 하나 내지 못했다.
심지어 무기까지 부서졌으니.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패배하기도 처음이다.
하지만 패배해서 다시 자존심의 상처를 입었나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이번의 패배로 보게 된 가능성.
잠시나마 느낀 초월의 경지.
물론 그마저도 불완전하기는 했지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과 반 발자국이나마 걸쳐본 것은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만족하셨다니 다행이군요."
솔직히 레이첼처럼 한 번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주기적으로 찾아오겠다고 하면 그것도 골이 아프기에 누리는 내심 안도 했다.
"좋아. 약속을 지켰으니 나는 이만 돌아가지."
"....네?"
갑작스러운 올리버의 귀환 선언에 누리는 당황한 채 되물었다.
"아니 몸이라도 추스르고서..."
"바로 돌아가지."
저벅저벅.
멈칫.
무엇이 그리 급한지 훈련장의 입구로 향하던 올리버는 잠시 멈추더니 아직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레이첼을 향해 말했다.
"이곳에서 활동하는 것은 좋지만 연락은 주기적으로 해라. 걱정된다."
그러고서는 훈련장을 빠져나가는 올리버.
"....걱정?"
그리고 그런 올리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레이첼.
조금 전까지는 초월적인 싸움에 경악하여 멍하니 있었다면 지금은 도저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레이첼의 눈에 들어차 있었다.
-----
번쩍.
이동마법진을 타고 파불라 엑시티움의 본부로 이어진 폐가로 돌아온 올리버.
털썩.
폐가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무릎을 꿇은 그는.
"쿨럭."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냈다.
"쿨럭. 쿨럭. 커억."
한 번으로 멈추지 않고 몇 번에 걸쳐 피를 토한 올리버는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는지 숨을 가다듬었다.
"허억. 역시 무리였나."
사실 새로운 기술을 제대로 성공시킨 것은 이번이 처음.
그동안 무언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기분이었는데 김누리의 세계를 직접 눈으로 보니 조금이나마 감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경지에 맞지 않는 기술을 억지로 사용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몸에 무리가 가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다고 딸 앞에서 피를 토할 수도 없으니."
초인적인 정신으로 겨우 여기까지 버틸 수 있었다.
"후우."
겨우 몸을 진정시킨 올리버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비행기가 바로 있을지 모르겠군."
돌아가서 정리할 것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