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속 중간보스에 빙의했다-49화 (50/60)

EP.49 만남

"괜찮아?"

올리버가 밖으로 나간 후 여전히 멍하니 훈련장의 입구를 바라보고 있는 레이첼에게 다가갔다.

"....네. 괜찮습니다. 잠깐 당황했을 뿐입니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레이첼은 누리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뒤.

"누리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누리를 야단치기 시작했다.

"어? 나? 갑자기?"

"네. 지금, 누리님 말입니다."

레이첼은 사나운 눈을 하고는 말을 쏟아붓는다.

"제정신이십니까? 그러다 진짜 다치거나 죽으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다행히 옆에 있던 게 저라서 그렇지 만약 하나양이 봤다면 어떤 충격을 받을지 상상이나 가십니까?!"

말하는 도중에도 화가 치솟아 오르는지 점점 목소리가 놓아지는 그녀.

"지금 당신을 보고 따르는 사람이 몇 명인 데! 도대체 언제까지 자신의 목숨을 함부로 다루실 겁니까!"

"아니. 난 어차피 안 죽으니까...."

"보는 사람은 생각 안 하십니까! 얼마 전에도 큰일 날뻔했다고 하나양에게 들었습니다! 그 이후로 하나양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아십니까!"

누리는 모르고 있었지만,

흑탑의 유물이 누리에게 흡수되고 목숨을 잃을 뻔했던 일 이후 하나는 한동안 극심한 불안감에 시달렸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유일하게 남은 하나뿐인 가족을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

그 공포가 하나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하지만 하나는 괜히 누리에게 이야기했다가 누리가 스스로를 탓할까 봐 최대한 내색하지 않았다.

그나마 가연과 레이첼에게 털어놓고 이야기하다 보니 최근 들어 나아졌을 뿐.

"그런데 당신이란 사람은...!!"

"....."

레이첼은 스스로의 감정에 북받쳤는지 말을 잇다 말았고 누리 또한 충격을 받았는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레이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리 당신이 죽지 않는 사실을 알더라도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소중한 사람이 다친다면 그 누가 걱정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제발 스스로를 함부로 다루지 마십시오."

"...미안하다."

누리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불사의 몸이 된 후 자신의 행동방침에서 죽음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니까.

상처를 입은 후 재생되는 느낌이 싫어 상처 입는 것을 지양할 뿐.

죽음으로서 일이 편해진다면 망설이지 않고 목을 내주었다.

그런 사고방식 때문에 얼마 전 멍청한 짓을 해 진짜 죽을 뻔했건만 한번들인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내가 멍청했어."

만약 내 목숨을 바쳐서 내 소중한 사람들을 난 거리낌 없이 바칠 것이다.

더 이상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경험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내 멍청한 짓으로 소중한 사람들이 상처받게 하면 안 되는데 그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아시면 됐습니다."

그제서야 화가 완전히 가라앉았는지 평소의 어조로 돌아온 레이첼.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곁에는 하나양, 가연양, 실렌님, 사영님, 그리고....저도 있다는 것을."

"그래. 고맙다."

그렇게 한바탕 폭풍이 지나가고 레이첼이 이곳에 공식적으로 머무를 수 있게 되었으니 정식으로 등록하기 위해 잠시 본부에 머무르는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고 보니 레이첼의 말처럼 올리버씨가 엄청 냉정하거나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던데?"

레이첼의 울분에 찬 이야기를 듣고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의 모습을 예상했던 누리.

하지만 좀 딱딱할 뿐. 딸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면 냉혈한으로까지는 보이지는 않았다.

"그건...."

누리의 질문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레이첼.

왜냐하면 그녀 또한 아버지의 생각으로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 '걱정된다.'

어렸을 적. 기억이 시작되는 지점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을 전부 뒤져봐도 아버지에게 걱정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던 질문이건만 입 밖으로 나온 것은 모르겠다는 대답.

평생을 미워하며 살았는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확신했는데,

고작, 고작 '걱정된다' 한마디에 왜 이렇게 자신의 마음이 요동치는 것일까.

"가족이니까."

그런 레이첼의 생각을 정리해주는 누리의 한마디.

"가족...말입니까."

"그래. 하나뿐인 가족."

아무리 미워도, 아무리 싫어도 가족이라는 단어의 무거움은 퇴색되지 않는다.

좋아하면 좋아하는 대로 미워하면 미워하는 대로 가족은 언제나 머릿속의 큰 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한 명뿐이 남아있지 않을 때는 더욱 크게 다가오는 법이고.

"한번 이야기해보는 건 어때?"

잠깐뿐이지만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던 올리버의 성격상 그가 먼저 레이첼에게 이야기를 청하지는 않을 것 같다.

"...."

누리의 말에 한참을 고민하던 레이첼은

"...고민해보겠습니다."

결국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미뤄버렸다.

"그래. 천천히 생각해봐."

그녀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일이 년 해묵은 감정이 아닐 테니 결정 내리기만으로도 쉬운 일이 아닐 테지.

이후 서류작업이 끝나고 여전히 복잡한 얼굴을 한 채 돌아간 레이첼.

"나도 이제 가볼까."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어차피 더 이상 할 일도 없고 사장이 퇴근하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나.

[안녕하십니까. 저번에 인사드렸던 강미르입니다.]

[혹시 도움을 주실 수 있으실까요.]

하지만 주인공님이 가지 말라는 건 어쩔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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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르.

누리의 판단으로는 가장 유력한 주인공 후보.

그가 하는 행동들을 보면 게임 속의 정석루트와 꼭 빼닮아 있었지만, 아직 확신할 수는 없다.

원래 이곳의 인물인지, 아니면 자신처럼 빙의 환생이라도 한 건지, 이것도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건지.

직접 보고 듣기 전까지는 무엇도 확신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직접 확인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혹시 도움을 주실 수 있으실까요.]

저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그 내용은 게이트를 하나 토벌하려 하는데 흑마술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강미르의 정보를 하나라도 더 모으고 싶은 누리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

"네. 도와드리죠."

당연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락했다.

그렇게 성립된 약속 당일.

약속 장소인 카페에 가니 강미르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오셨군요."

"제가 도움을 요청한 입장인데 늦을 수는 없지요. 오늘 이렇게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천유가에 잘 보일 수 있으니 저야 손해 볼 거 없으니까요."

최대한 천유가에 잘 보이고 싶은 이능집단의 수장을 연기하며 경계심을 낮춘다.

이런 누리의 연기에 속았는지 희미한 미소를 짓는 강미르.

"꼭 잊지 않고 기억해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하. 자. 그럼 가실까요?"

다행히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목표지점으로 가면서도 간간히 수다를 떨며 강미르의 오늘의 목적을 물어봤다.

"별거 아닙니다. 이쪽 특이한 게이트가 나타났다길래 토벌 겸 조사차로 왔습니다."

"아. 그렇군요."

'아이템이군.'

천유가에서 안전하게 사냥만 하다가 굳이 혼자 게이트를 토벌하기 위해 나온 것을 보면 뻔할 뻔 자.

재료아이템인지 아티팩트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가는 게이트에 무언가 얻어야 할 것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필수템이 뭐가 있더라.'

안전을 추구하는 정석루트의 성장이 끝나기 전에 움직였다는 것은 그 정도로 중요한 무언가가 이 시기에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그런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이.....

'하나 있네.'

정말, 매우 매우 드물게 게이트 내부가 온통 흑마력으로만 가득 차 있고 그곳에서 나오는 몬스터들 또한 흑마력만을 사용하는 게이트가 출현한다.

그리고 이런 게이트에서는 반드시 흑마력을 제외한 자연에너지가 한 지점에 집중되어 거대한 에너지가 물질화 되어 나타나는데.

통칭 에너지 스톤.

게임 속에선 최상위 아이템을 제작할 때 빠지지 않는 주요 재료였다.

'그래. 분명 초반부에 나타나는 흑마력 게이트가 딱 하나 있었어.'

초반부에서 후반부의 최종템 재료를 얻을 수 있는 기회이기에 웬만한 루트에서는 필수 코스로 지정된다.

하지만 이는 정석루트에서는 예외였는데.

흑마력으로 들어찬 만큼 흑마력 사용자가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공략에 필요했는데.

초반부엔 집단 안에서 안전함만을 추구하는 정석루트는 흑마력 사용자를 만날 길이 없기에 공략코스에서 제외되었다.

'그래서 굳이 나를 부른 거였군.'

하지만 김누리라는 인맥을 얻게 된 강미르는 에너지 스톤을 놓치기 아까웠을 것이다.

얻어두면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니까.

'스스로의 판단일까 아니면 이것도 게임으로서 판단한 걸까.'

만약 그가 주인공이라면 과연 어느 쪽일지 궁금해하며 걷다가 보니 어느새 검은색 안개를 뿜어내고 있는 게이트에 도착했다.

"호오. 이래서 저를 부르신 거군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일단 모른 척, 놀라는 척.

"왜인지 게이트에서 흑마력이 뿜어져 나오고 몬스터도 흑마력을 사용하기에 누리님께 도움을 요청한 겁니다."

"하하. 이런 곳이라면 확실히 저만큼 전문가도 없죠."

실제로 죽은 자들의 왕인 누리에게 흑마력 게이트는 놀이터나 다름없다.

"그럼 가실까요."

"그러죠."

그렇게 주인공과 중간보스의 게이트 공략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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