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속 중간보스에 빙의했다-51화 (52/60)

EP.51 세계협회

힘들다.

너무 힘들다.

죽은 자들의 왕으로 각성한 이후 이렇게 힘들었던 적이 있던가.

육체적인 고통이 아닌 정신적인 고통.

그나마 인간으로서의 정신도 시간이 지날수록 성장하여 웬만한 일에는 피로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게이트 토벌이 너무 어려워서 힘든 것이 아닌,

'이건 너무 쉽잖아.'

쉬워도 너무 쉬웠다.

평범한 게이트라도 누리에게는 별 어려움이 없을 텐데 하필 흑마력 게이트.

이건 마치 물 만난 물고기랄까, 새장을 벗어난 새랄까.

마법 한번 잘못 쓰면 그대로 게이트 자체가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아찔함.

심지어 고위마법사로 보이기 위해 영창까지 전부 외워야 하는 상황이니.

손가락 하나만 잘못 놀려도 지금 눈앞에서 걷고 있는 주인공 강미르를 날려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일부로 의지를 내리누르고 강제로 흑마력을 흩트린다.

하지만 영창을 외우려니 의지가 솟아오르려 해 오히려 그냥 마법을 사용할 때보다 정신력 소모가 곱절로 들어가는 느낌.

'아니 곱절보다 훨씬 많다고 해야 하나.'

평소 영역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평범한 마법을 사용할 경우 느껴지는 정신력 소모는 거의 없었기에 더욱 지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누리의 생각이 표정에 나타난 것일까.

"이쯤에서 한번 쉬다 가죠."

"네? 아. 네.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운 강미르의 휴식 제안에 반문했던 누리는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얼마나 힘들어 보이면 저런 말을 했겠나 싶어서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누리님은 어쩌다 한국에서 활동하시게 된 겁니까?"

"네?"

"보통 흑마술사들은 흑탑에 속하지 않습니까. 뭐 흑탑이 테러 단체이기는 하지만 흑마력 사용자들은 흑탑으로 간다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강미르의 질문에 순간 이게 뭔 말인가 싶은 누리.

흑탑은 얼마 전 자신이 흑탑주를 죽이고 이사까지 하지 않았던가.

'교회가 뻘짓 한 건 자기들끼리 입단속 했다 쳐도 흑탑주의 일은 영상으로 퍼졌을 텐데?'

하지만 이는 이능집단의 이해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누리의 착각이었으니.

죽은 자들의 왕이라는 존재의 출현은 이능사회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웬만한 이능집단의 수장이라면 알만한 정보가 맞지만,

그렇다고 집단의 말단까지 퍼질 정도로 함부로 다룰만한 정보는 또 아니었기에 일련의 사건을 모르고 있던 것이다.

"음....기밀은 아니지만 이건 제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토벌이 끝나고 유시윤가주님께 물어보면 말해 주실 겁니다."

이를 모르는 누리는 일단 적당히 얼버무리며 유시윤에게 일을 미뤘다.

괜히 여기서 자신이 대답했다가는 일이 꼬일 수도 있으니,

유시윤이라면 현명하게 처리해주겠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다행히 강미르도 별 의심을 하지 않고 넘어갔다.

이후에도 겉으로는 무난한, 속으로는 누리 혼자 개고생을 하는 토벌이 진행되었고 보스도 무탈하게 토벌하는 데 성공하였다.

게이트 보스인 백랑을 처치하자 떨어진 하얀색의 보석.

아마 저 보석이 에너지 스톤이겠지.

흘끔.

슬쩍 강미르를 바라보자 얼굴에 대놓고 가져가고 싶다는 얼굴을 하고 있기에 누리는 입을 열었다.

"챙기시죠. 미르님."

어차피 일반적인 아티팩트는 이미 자신에게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고, 유물은 흑탑의 유물이었던 Superbia(슈페르비아)와 같이 어떤 폭주를 일으킬지 모르기에 현재로선 피하는 것이 맞다.

즉 에너지 스톤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뜻.

여기서는 양보하는 척 생색을 내며 호감을 쌓는 것이 이득이다.

"저 그렇게까지 눈치 없지는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하하. 나중에 제 이름만 기억해주시면 됩니다."

그가 정석루트를 따르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실력을 키운 후 파티를 모을 테고 심지어 그 파티에는 각종 주요 엔피시들이 즐비할 테니,

만약 호감도를 쌓아 그 파티에 잠깐씩만이라도 낄 수 있다면 상황에 대처하기 훨씬 쉬워질 것이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무사히 끝난 흑마력 게이트 토벌 이후.

강미르를 일별한 누리는 곧바로 유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그래도 강미르에 대한 일을 별 설명 없이 그녀에게 일임해 둬서 미안한 상황인데 또 그녀에게 미뤄뒀으니 미리 알려주기라도 해야겠지.

뚜르르르.

[또 뭔 일이야.]

"...일이 있어서 전화를 건게 맞긴 하지만 어떻게 아셨습니까?"

[네가 언제 일없을 때 전화한 적 있냐?]

"....죄송합니다."

[됐고. 용건이나 말해.]

그녀의 말에 할 말이 없어진 누리는 미르와 있었던 일을 말하고 왜 미르가 흑탑에 대해 모르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렇게 됐던 거군요."

[그래. 사건이 사건이니 핵심 간부면 모를까 말단까지 알만한 정보는 아니지. 심지어 그 직후 침공까지 있었으니 소문 퍼지는 게 멈추기도 했고.]

"그럼 제가 말해도 상관없는데 괜히 천유가주님에게 미뤘네요. 죄송합니다."

말 몇 마디 하는 것뿐이지만 동생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나 다름없는데 그냥 넘어가는 것은 아닌 것 같아 다시 한번 사과했다.

[진짜 미안해?]

그때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유시윤.

"미안...하죠?"

갑작스런 그녀의 질문에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지만 여기서 아니라고 할 수도 없으니 대답하는 누리.

[그럼 다음 주 일주일 시간 비워놔.]

"혹시 무슨 일 때문에...."

지은 죄가 있으니 거절하지는 못하고 조심스럽게 이유를 묻는다.

[나랑 미국 좀 가자.]

"네? 미국이요?"

[그래. 자세한 건 만나서 설명해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아니...."

뚝.

"....."

누리는 일방적으로 끊어진 휴대전화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그래서 미국은 왜 간다는 겁니까?"

"....그렇다고 바로 달려올 줄은 또 몰랐네."

유시윤은 통화한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눈앞에 나타난 누리를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궁금해서요."

도저히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어 곧바로 유시윤이 있는 천유그룹 본사로 달려온 누리는 다시 물었다.

"미국에 무슨 일 있습니까?"

이곳으로 오면서 떠오르는 게임 속 이벤트나 퀘스트를 전부 훑어봤지만 미국으로 넘어가야 하는 것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맵이 한국밖에 없는데 미국으로 넘어갈 이벤트가 있을 리 있겠나.

"이번에 각 국가에 존재하는 협회를 전부 통합하기로 결정 났다."

"협회 말입니까?"

"그래."

유시윤의 설명은 이랬다.

침공 이후 이능력자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괴물을 사냥하면서 온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괴물을 사냥하고 세상을 지키는 영웅의 모습.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이능력자가 되고 싶다는 지원이 물 밀듯이 쏟아졌고 이 틈을 타 이능집단들은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소속원들을 대규모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급작스러운 규모의 확장은 언제나 부작용을 불러오는 법.

이능력자들이 늘어나며 빌런의 숫자 또한 점차 증가하고 있었다.

아직은 각 국가의 통제 능력하에 있었지만 언제 어디서 사고가 터질지 모르는 노릇.

그래서 결국 각 국가와 이능집단들이 회의해 협회를 통합하여 이능력자들을 관리하기로 한 것이다.

바로 그 시발점이 이번 미국의 워싱턴에서 이뤄지는 회의.

"....허어."

"왜 그러지?"

"아. 아닙니다."

설명이 끝나고 누리가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자 그녀가 물었지만 얼버무리는 누리.

왜냐하면 그녀의 설명을 듣자 게임 속에서 미국이 어디에 등장하는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 분명 있었어.'

단 한 줄.

게임 내에서 단 한 줄 언급되는 세계협회.

그냥 그런 게 설립되었다~는 식으로 언급 한번 하고 그 뒤로 언급조차 안 되는 설정.

아무리 기억력이 좋아진 누리라고 해도 고작 한 줄 언급되고 넘어가는 설정을 고려하고 있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제가 왜 필요한 겁니까? 전 신분을 드러낼 수도 없는데."

"정확히는 네 힘이 필요한 거지."

"힘 말입니까?"

"그래. 세계협회가 설립되는 것에 모두가 찬성한다면 좋겠지만, 세상 모두가 착하다면 빌런이 생길 일도 없겠지."

세상에는 다양한 이능력자들이 있고 개중에는 통제받는 것을 싫어하는 이도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이들 중 극단적으로 나오는 이 또한 없으리라는 법도 없다.

"물론 최선을 다해 사고를 막겠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알 수가 없으니까. 보험 정도는 있는 게 좋겠지."

만약 누리가 회의에 참석한다면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부탁이라면 거절할 수 없겠네요."

개인적인 욕심도 아니고 세상을 위해서라니 무슨 명분으로 거절하겠는가.

누리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충분히 납득가는 의견이었다.

"좋아. 출발은 다음 주 일요일. 티켓이랑 호텔은 이쪽에서 준비할 테니까 짐만 들고 와."

"네. 그럼 다음 주에 뵙죠."

갑자기 생긴 스케줄이지만 파불라 엑시티움이야 자신이 없어도 잘 돌아갈 테니 몇 명에게만 말해두면 별일 없겠지.

"뭐? 미국? 나도 같이 가!"

"저도 같이 갈래요. 오빠!"

라고 생각했었던 적이 누리에게도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