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3 세계협회
경제 대국 이자 국방비로 연간 천조가 쓰인다고 하여 흔히 천조국이라 불리는 부동의 군사력 1위 미국.
하지만 이 군사력이 이능사회에서 통하느냐 묻는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
웬만한 현대화기의 위력을 뛰어넘는 마법과 강철판조차 간단하게 찢을 수 있는 오러 사용자의 오러.
애초에 범주 자체가 다르기에 비교하기 어렵지만, 미국의 이능사회 또한 절대 만만하지 않았다.
거대 이능집단 히어로즈를 필두로 미국의 이능사회는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하였기에 정부의 간섭이 타국보다 심한 편이었지만 그만큼 탄탄한 체계와 질서가 잡혀있었다.
실제로 얼마 전 침공에서도 정부와 히어로즈의 지휘로 한국 다음으로 사태를 빠르게 진정시킨 국가 중 하나가 바로 미국.
"반갑습니다. 천유가주님."
그리고 지금 유시윤의 앞에서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며 악수를 청하고 있는 남자가 바로 히어로즈의 수장이자 국토안보부 산하 이능관리국의 국장 톰 스미스였다.
"반가워요. 톰."
"세계이능협회 설립 회의에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도움으로 세계평화에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회의는 내일부터 3일간 진행되니 오늘은 편히 휴식을 취하시길."
톰은 방문 인사들을 일일이 맞아주고 있는 것인지 인사가 끝나자마자 바쁘게 자리를 떠났다.
"우와. 역시 미국은 미국인가? 무슨 호텔 하나를 통째로 사용하네."
톰이 떠나자 조용히 있던 가연이 감탄사를 내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일행이 있는 곳은 워싱턴 D.C.의 한 고급 호텔.
미국 정부는 회의를 위해 이 호텔을 일주일간 통째로 대절한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회의라는 거지."
가연의 말에 수행원에게 무언가 명령을 내리던 유시윤이 다가와 답했다.
"괜히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다가 문제가 일어나면 골치 아파지니 한곳에 몰아두고 있는 게 낫지."
하지만 모이는 인물들이 인물들인지라 아무 곳에서나 맞이할 수 없으니 결국 호텔을 통째로 대절하는 것이 오히려 미국으로서도 편했을 것이다.
"자. 올라가자고. 수행원들은 좀 떨어지는 방이니까 그거에 불만 갖지말고."
"에이. 그런 걸로 불만 가질 사람이 어디 있어요. 스승님."
"글쎄 과연 어떠려나."
쓴웃음을 지은 유시윤은 이번엔 누리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넌 아까부터 왜 이렇게 말이 없어."
"하하. 저도 외국에 비행기 타고 와보는 건 또 처음이라."
"....일 시키려고 데려왔더니 관광을 처하고 앉아있네."
머리가 꽃밭에 가 있는 조력자의 행태에 한숨을 깊게 내쉬는 유시윤.
어쩌겠는가? 자신이 약한 것을 탓해야지.
"교회 놈들도 와 있을 테니까 조심하고. 난 먼저 올라간다."
유시윤이 먼저 방으로 올라가고 남은 셋도 각자의 방으로 흩어져 짐을 정리하고는 다시 한곳으로 모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연과 하나가 일방적으로 누리의 방에 쳐들어온 거지만.
아무튼.
"그럼 오빠는 사일 뒤에야 놀러 다닐 수 있겠네."
"어떻게 진행될지는 나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럼 그동안 우리끼리..."
하나가 슬쩍 눈치를 보며 가연과 둘이서의 여행 이야기를 꺼내려 했지만, 누리가 단칼에 끊었다.
"절대 안 돼."
"췟."
"나흘만 참으면 되니까 호텔에서 놀아 돈은 마음껏 써도 되니까."
"그러면 나흘 동안 호캉스나 즐겨야겠다."
"아. 여기 수영장 있던데 내일 거기 가서 놀자."
"너 수영복 챙겨왔어?"
아쉬운 건 벌써 잊어버린 듯 신나서 호캉스 계획을 짜기 시작하는 둘을 어처구니 없는 눈으로 바라보던 누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지만 호텔에는 미국 측의 인력도 있고 천유가의 경호 인력도 있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렇게 첫 번째 날이 무사히 지나가고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는 두 번째 날.
회의 장소는 미 국회의사당.
그 안에서도 많은 좌석이 있는 하원 의사당에서 회의가 진행되었다.
"아. 심심하네."
물론 누리가 그 회의에 직접 참석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수행원 자격으로 유시윤을 따라온 누리는 국회의사당 바깥에서 대기할 뿐.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유시윤의 부탁대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하여 감각을 끌어올려 인근을 전부 감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빌런놈들도 이번 회의를 건드리면 뭣 된다는 것을 아는 건지 의사당 주변은 평화롭기만 했다.
"하긴 어떤 미친놈이 전 세계를 적으로 돌리고 싶겠어."
게임 설정에서도 한 줄로만 지나가는 것을 보면 별일 없다는 뜻.
물론 자신이 벌여 놓은 일이 있기에 긴장을 풀지는 않는다.
어떤 나비효과가 미칠지 모르니까 말이다.
"...그래도 지루한 건 지루하네."
지루한 시간이 흘러 첫 번째 날 회의가 끝이 나고 유시윤이 밖으로 나왔다.
"빌어먹을 새끼들."
회의가 어떻게 진행됐는지는 유시윤의 표정과 말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잘 안되셨나 보네요."
"뱃속에 아귀만 가득 들어찬 새끼들밖에 없어."
세계협회를 세우는 것 자체는 동의한다고 해도 그 외에 결정할 사항들은 쌔고 쌨다.
협회의 위치부터, 구성원은 어떻게 할 것인지, 협회의 회장은 어떻게 선출할 것인지, 등.
어떻게든 하나의 이권이라도 더 가져가려는 아귀들이 저 안에 득실거렸다.
"저 새끼들 하는 꼬라지 보면 진짜 멸망하는 것도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
확실한 증거가 없기에 믿지 않았던 멸망의 이야기조차 신뢰도가 급상승하는 지경.
"후우우. 오늘은 좀 푹 쉬어야겠어."
"그러시죠."
그렇게 아무 일 없이 지나간 첫째 날.
두 번째 날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병신 새끼들. 누가 테러 안 하나? 그냥 뒤지는 게 세계평화에 더 도움이 될 텐데."
유시윤의 기분이 좀, 아니 많이 언짢아졌을 뿐.
하나와 가연도 호캉스를 제대로 즐기고 있는지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자신은 지루해 죽겠는데 즐기고 있는 둘을 보니 심통을 부릴까 했지만 이내 피식 웃으며 관뒀다.
"그래. 방학인데 실컷 놀아라."
학생이 방학 아니면 언제 놀겠나.
이내 두 번째 날도 지나가고 마지막 세 번째 날.
만약 빌런들이 테러를 계획하면 마지막 날인 오늘을 노릴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여 온종일 긴장을 끌어올리고 있었지만.
"...진짜 제대로 겁먹었나 보네."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여기까지는 나비효과가 미치지 않은 건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오히려 불안하기까지 한 누리.
하지만 누리의 불안이 괜한 걱정이라는 듯 삼 일차 회의가 끝나고 유시윤이 나올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쯧. 아무래도 조만간 한 번 더 와야 할 것 같군."
"결국 결론이 나지 않은 겁니까?"
"위치와 구성원 비율은 결정됐어. 결국 초대 회장이 문제지."
세계 모든 이능력자를 관리하는 세계이능협회의 회장.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게 뻔한 자리이기에 어떤 국가도 양보하지 않으려 했다.
"방식은 투표가 될 테지만 그 투표권이 문제지."
협회를 세우는 일에는 큰돈이 필요하고 그 돈은 협회에 참가하는 나라에서 차출하게 된다.
문제는 나라마다 차출하는 돈의 규모가 다를 수밖에 없는데.
다른 나라에 비해 큰돈을 차출한 나라는 공평하게 더 많은 투표권을 요구하고,
적게 차출한 나라는 평등을 내세우며 평등하게 하나의 투표권을 요구한다.
"뭐 결국 힘 있는 놈이 이기겠지만."
결과가 정해져 있는 논쟁만큼 쓸모없는 것도 없다.
"호텔은 삼일 더 머무를 수 있다니까 더 놀려면 호텔 잡아줄게. 비서한테 말하면 처리해 줄 거야."
"네. 감사합니다."
"대충 예상하기는 했지만 결국 너는 괜히 온 게 돼버렸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좋은 거죠."
사고에 대비한다 해도 최상의 결과는 사고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것.
그러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이번 미국행은 최상의 결과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
뚜르르르.
누리에게 전화가 걸려 오기 전까지는.
"응? 하나?"
갑자기 동생에게 걸려 온 전화에 의문스러웠지만 하나가 가지고 있는 위기 감지 아티팩트에서는 별 반응이 없었기에 유시윤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잠시 전화 좀 받겠습니다."
"그래."
뚝.
[오빠.]
"어. 하나야. 무슨 일 있어?"
[그게......]
왠지 모르게 망설임이 느껴지는 하나의 목소리에 불안감을 느낀 누리가 급히 물었다.
"왜 그래? 진짜 무슨 일 생겼어? 지금 바로 갈까?"
[일이 생기긴 했는데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한 게 아니라....]
"뭔 일인데. 똑바로 말해봐."
당장이라도 호텔을 향해 쉐도우 점프를 사용하려던 누리는 하나의 말에 순간
[....나 사고쳤어.]
".....뭐?"
모으던 흑마력조차 흩어내며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너무 화가 나서 사람을 쳤는데....]
"설마 죽었어?!"
[아니!! 누가 살인마인 줄 알아?!]
누리의 경악에 찬 물음에 곧바로 소리 지르며 반박하는 하나.
"그럼 뭔데?!"
[아니. 피가 나긴 하는데.....아 몰라. 시체, 아니 기절한 사람은 숨겨뒀으니까 일단 와봐.]
"시체라니? 여보세요? 하나야? 하나야?!"
뚝.
뚜. 뚜.
일방적으로 끊긴 전화를 멍하니 바라보던 누리는 이것도 나비효과인가 하고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