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6 성녀
국제적인 단위의 일을 진행할 때, 필수적인 요소는 무엇이 있을까.
참가국들의 협력과 인력, 조직도, 시스템, 공간 등등, 정말 많은 것이 필요하지만 이 중 가장 필수적인 요소 두 가지를 뽑자면.
일단 돈.
무엇을 하려든 돈이 없으면 그 무엇도 진행되지 않는다.
일을 진행할 터를 구하고, 사람을 고용하고, 자재도 구매하고, 정말 온갖 곳에 돈이 들어가고 소모된다.
그것도 일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필요한 돈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는 법.
돈이 필요한 곳을 나열하자면 정말 끝도 없다.
하지만 어찌보면 이러한 돈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한 가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여론.
수레 여(輿)에 논할 론(論)자를 써 여론.
사회의 어떠한 현상이나 정치적 문제 등에 대하여 국민들이 나타내는 공통된 의견.
국가란 결국 국민의 집합체이고 그런 국가에서 국민들의 의견이나 다름없는 여론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심지어 독재국가마저도 어떻게든 여론을 통제하고 조작하려는 것을 보면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여론의 중요성.
이번 세계이능협회의 설립에 참여하는 참가국들 또한 여론의 동의를 얻기 위해 홍보하며 협회의 설립과 참가에 명분을 부여하려 애썼다.
실제로 그들의 노력 덕분인지 아니면 침공과 몬스터들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마음때문인지 여론은 반응은 긍정적.
국가들은 이런 여론의 반응을 등에 업고 당당히 협회의 설립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여론이 동의 했다고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었고 반대하는 이들은 분명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반대하는 이들은.
후릅.
달칵.
"세계협회라...."
기존의 이능사회 기득권층들.
즉.
"어떻게 생각하나 로베르트 추기경."
교황이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로베르트 추기경에게 물었다.
달칵.
"신을 따르지 않는 저 삿된 무리에게 신의 철퇴만이 답이지요."
"그렇지. 감히 신의 뜻을 행하는 교황청이 있는데 세계를 수호하기 위한 협회? 신성모독이 따로 없어."
지금까지 세계를 지켜오던 것이 누구던가.
이능력 전쟁을 종식시킨 것도,
평화를 위해 스스로 명예를 포기하면서까지 그림자 속에 숨어든 것도,
그림자 속에서 세계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한 것도,
전부 교황청이건만.
세계협회?
용납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물론 헌신한 것은 현대가 아닌 과거의 교황청이었지만 욕심에 찌들은 그들에게 그딴 것은 상관없었다.
"영상은 잘 퍼트렸겠지."
"네."
"좋아. 이제 어찌 되든 우리가 손해 볼 건 없겠군."
흑탑이 나타나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좋다.
흑탑이 나타나면 토벌하여 저번 실패를 만회하면 되고 나오지 않고 버티면 협회의 설립을 방해하며 계속 누명을 씌우면 된다.
"그래. 자네도 이번에 잘해서 저번 실수를 만회해 보게."
저번 흑탑 토벌 때 총지휘를 맡았던 로베르트 추기경은 결국 실패의 모든 책임을 강제로 지게 되었고,
"....명심하겠습니다."
지금 와서는 살아남기 위해 교황의 사냥개를 자처하고 있었다.
"아. 그리고 다니엘레 추기경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나?"
"네. 아직도 탐색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예산도 반으로 줄였건만 고집을 버리지 못하고. 쯧쯧."
사라진 흑탑의 행방과 내부에서 정보를 흘린 배신자의 추적을 맡겠다고 스스로 나섰던 다니엘레 추기경.
반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별 성과가 없었기에 차근차근 배당된 지휘권과 예산을 회수당했다.
"포기하면 자신의 지위가 끝이 난다는 걸 알고 있으니 발악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슬슬 없애버려도 상관없겠군. 다른 놈들이야 오히려 환영할 테니."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아주 간단한 대화로 다니엘레 추기경의 운명이 결정되려던 순간.
철컥!
우르르르.
교황과 로베르트 추기경이 대화를 나누던 집무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일련의 무리가 집무실로 쏟아져 들어왔고.
척! 척! 척!
무기를 겨눈 채 둘을 포위했다.
"뭐냐 네놈들은!"
우우웅.
교황을 만나느라 무기를 패용하고 있지 않던 로베르트는 두손에 신성력을 집중시키며 자세를 잡고 소리쳤지만,
"....."
무기를 겨눈 사람들은 침묵할 뿐.
또각또각.
그런 그들의 뒤로 구두 소리를 내며 추가로 집무실에 들어오는 또 한 명의 사람.
보는 것만으로도 거룩함을 느끼게 하는 백발의 미인.
"오랜만이네요. 성하."
규모가 규모인 만큼 교회에는 다양한 직급이 존재했고 그중 가장 높은 직급을 꼽으라면 당연히 교황을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교회인들에게 신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백이면 백 교황이 아닌 다른 사람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성녀....!!"
그것이 바로 성녀.
신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신께 사랑받는 사람.
태어날 때부터 몸에 성흔을 지니고 범상치 않은 신성력을 품고 있어 존재 자체만으로 신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인간.
그렇기에 교회인으로서 성녀는 신의 대리자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녀의 위상은 성녀에게 따로 직급이나 권한이 주어지지 않아도 교황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녀를 부정하는 것은 신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하지만 성녀는 교회의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약자들을 돕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밖으로 나돌았기에 교황과 추기경들은 아무 방해 없이 교황청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뜯어고쳤다.
실제로 성녀가 가장 최근 교황청에 들른 것이 5년 전, 그전에는 10년 전이니 말이다.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그런 성녀가 병력을 이끌고 갑자기 이곳에 나타나다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성녀님."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교황을 대신해 로베르트 추기경이 물었다.
"저야말로 묻고 싶군요. 로베르트 추기경. 거룩하신 주님의 사제들이 흑탑과 손을 잡은 데다가 테러라니요."
그녀의 되묻는 말에 교황과 추기경의 얼굴이 굳어졌다.
밖으로 나돈다고 해도 성녀는 성녀. 그녀의 귀에만큼은 교황청의 일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했건만 도대체 어떻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가 테러라도 저질렀다 이 말입니까?"
일단 잡아뗀다.
부정을 저지르는 자들이 대게 그렇듯 그들도 부정의 증거를 남겨두지 않았고,
특히 이번 테러는 어찌 보면 처음으로 직접 저지르는 테러였기에 신중에 신중을 더했다.
'정보가 새어 나갔을 리 없어.'
이번 일의 전체적인 그림을 아는 것은 자신과 교황뿐,
그 외에는 전부 점조직 형태로 지시했기에 물리적으로 정보가 새어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로베르트 추기경. 저는 이곳에 확인을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의 변명에도 성녀의 눈에 서린 확신은 전혀 흔들림 없었다.
"....무슨 오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들을 처리하고 다시 오해를 풀어야겠군요. 교황님 부탁드립니다."
"으음. 알겠네."
우우웅.
성녀는 분명 규격 외의 엄청난 강자였지만 둘 또한 만만치 않았다.
마스터 급의 사제인 교황의 보조가 있다면 성녀 또한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로베르트.
"낮은 곳에서 어린 양을 돌보다 보면 가끔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이 접근해 오기도 합니다."
그때 성녀가 갑자기 이야기 하나를 시작했다.
"처음엔 저도 당황하고 위험할뻔한 적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익숙해지더군요."
"지금 무슨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그런 상황을 몇 번 겪다 보니 몇 가지 잡기를 익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녀님!!"
자신을 무시한 채 이야기하는 성녀에게 추기경이 분노를 터트리려던 순간.
우웅.....
그의 손에서 환하게 타오르던 신성력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이게 무슨!"
"아. 드디어 효과가 돌았나 보네요."
성녀가 낮은 곳에서 어려운 이들을 돌볼 때 그녀에게 부정한 목적으로 접근하는 이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 아직 미숙한 시절, 독에 중독되어 위험에 처한 적이 있었고.
그 이후 성녀는 약학의 필요성을 느끼고 본격적으로 약학을 익혔다.
하지만 약과 독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했던가.
"중국에선 이런 걸 산공독이라고 한다죠?"
약학을 익히며 자연스레 독 또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크윽. 도대체 언제...."
"찻잔은 검사하지만 정작 물을 끓이는 주전자는 검사하지 않더군요."
결국 독에 중독되어 반항다운 반항도 하지 못하고 제압되는 교황과 추기경.
"무슨 속셈이냐. 루이나."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교황이 그녀의 본명까지 언급하며 성녀에게 물었다.
"당장이라도 당신을 지옥으로 보내고 싶지만 교회를 정화할 때까지 살아주셔야겠습니다."
이미 썩을 대로 썩은 교회를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숙청이 필요할 테고,
이를 위한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교황이 살아있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저에겐 이름이 없습니다."
성녀라는 것을 자각한 후 신에게 바친 이름.
그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신밖에 없다.
"데려가세요."
"네."
"읍! 으읍!"
결국 재갈까지 물려진 채 끌려가는 둘.
"감사합니다. 성녀님."
모든 일이 끝나자 밖에서 누군가 감사인사를 하며 성녀만 남은 집무실로 들어왔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은 저예요. 다니엘레 추기경."
바로 방금 전 교황과 로베르트 추기경이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던 다니엘레.
"다니엘레 추기경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교회가 어디까지 망가졌을지....제 죄가 깊어요."
성녀에게 타락의 증거들을 모아 전달한 인물이 바로 그였다.
"성녀님께서는 약자들을 살피셨을 뿐이지 않습니까."
"아니요. 밖으로 나돌며 정작 교회를 방치한 저도 죄를 피할 수는 없어요."
"그러면 교회를 정상화하는 것으로 속죄하시면 됩니다."
"네. 반드시."
"아. 그리고 흑탑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미 흑탑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퍼트린 영상은 퍼질 대로 퍼진 상황.
"그냥 내버려 두세요. 어차피 흑탑도 멸해야 할 존재들이니."
흑탑주가 죽었어도 흑마술사들은 부정한 존재. 이번 일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저 멸할 뿐이다.
그렇게 다니엘레와 대화를 마친 성녀는 아직 일이 완벽히 마무리되지 않았기에 곧바로 떠나갔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네. 저도 이곳을 정리하고 뒤따르겠습니다."
그렇게 성녀마저 떠나고 혼자 남게 된 다니엘레.
"이걸로 어느 정도 시간은 벌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