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7 아테르
"성녀?"
흑탑을 사칭한 테러리스트의 의도가 무엇일지 돌아온 실렌과 사영에게 의견을 물으려 했을 때 먼저 실렌의 입에서 나온 정보는 누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맞음. 10년 넘게 외유하던 성녀가 교황청에 복귀함."
"갑자기 성녀가 왜?"
"이유는 모름. 하지만 오자마자 교황에게 실권을 넘겨받고 대대적인 숙청을 벌이고 있음."
그 정보를 들은 누리는 순간 말을 잃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면 이 시점에 성녀가 나타난단 말인가.
아니. 나타난 것 자체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 있으니 시점이야 이해할 수 있지만,
"숙청이라니."
성녀가 누구인가.
확정된 무소불위의 권력도 마다하고 10년 넘게 낮은 곳을 살피며 그야말로 누구보다 자비로운 사람이 바로 성녀 아닌가.
그런데 그런 성녀가 숙청?
'또 내가 모르는 나비효과인 건가? 아니면 이것도 숨은 설정?'
저번 슈페르비아를 흡수하고 죽을 뻔한 이후로 숨은 설정을 경계하고 있었건만.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 튀어나왔다.
'자. 진정하고 생각해 보자.'
어지러워지려는 머리를 진정시키고 상황을 따져본다.
지금은 게임의 시작 후 극 초반.
원작에서 성녀가 나오는 시점은 중반부.
'역시 숨은 설정인가?'
숨은 설정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그저 나비효과에 의한 우연의 일치일 경우도 무시할 수 없다.
'타락한 교회, 흑탑주의 죽은 자들의 왕 사칭, 숙청을 진행하는 성녀.'
교회의 타락은 숨은 설정인 것이 확실하고 흑탑주의 사칭은 자신으로 인한 나비효과가 확실하다.
'잠깐, 흑탑주?'
그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하나.
원작에서의 흑탑주는 메인스토리의 폭주하고 플레이어에게 토벌당한다.
지금은 자신의 나비효과로 인해 벌써 사라졌지만, 만약 원작의 흐름대로 진행되었다면...
'분명 성녀가 출현한 직후 흑탑주가 폭주했지.'
지금까지 원작에서 흑탑주가 폭주한 이유가 욕심에 찌들은 교회에서 흑탑을 손절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만약 아니었다면?'
원작에서도 성녀가 나타나 교회를 정상화하고 흑탑을 직접 노리자 흑탑주가 최후의 발악을 한 것이라면,
원작에서 왜 교회의 타락한 모습을 볼 수 없었는지,
흑탑주가 왜 폭주했는지,
'그리고 왜 성녀가 숙청을 진행하는 것인지.'
설명된다.
원작에서도 숙청이 있었고 그 숨은 설정이 나비효과 때문에 그 시기가 당겨졌다.
'아마 시기가 당겨진 이유는 이번 흑탑 사칭 테러.'
이번 테러가 교회의 짓이란 사실이 어떻게든 성녀의 귀에 들어갔다면 성녀가 숙청을 감행한 것도 이해된다.
성녀도 어찌 되었든 신의 사제.
아무리 자비롭다고 해도 악에 한해서 잔악해져도 이상할 것 전혀 없다.
'물론 전부 추측이지만.'
설명되지 않는 부분도 많다.
특히 테러가 교회의 짓인지 확신도 없을뿐더러 교회가 만약 맞다 해도,
"확실히 나도 교회가 벌인 일이 아닐까 추측해봤지만 확실하지 않음. 교회 쪽에도 정보가 전혀 없음."
실렌조차 알아내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숨긴 일이 과연 어떻게 성녀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냐가 말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장님."
고민하고 있으려니 옆에서 사영이 물어왔다.
그가 묻는 것은 이번 사칭에 대한 대응.
원래대로라면 다시 사칭하기 전에 빠르게 방법을 마련하려고 했지만.
"숙청이 진행되고 있다면 대응하지 않아도 더 이상의 사칭은 없을 듯싶습니다."
만약 테러의 주체가 교회, 정확히는 교황청의 수뇌부가 맞다면 숙청이 진행되는 지금 대응하지 않아도 상관없겠지.
하지만 교회가 저질렀다는 확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흐음..."
잠시 고민하던 누리는 이내 생각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그래도 대응한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사영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누리는 자신 있게 말했다.
"오히려 이게 기회가 될 수도 있어."
"기회...말입니까."
"흑탑도 숨어만 있으란 법은 없지."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흑탑은 자신의 휘하로 들어왔고 현재는 그 규모가 더욱 커진 상태였다.
언제까지고 숨어 살게만 할 수 없으니 차라리 이번 일을 기회 발판 삼아 사회로 나선다.
"하지만 교회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걔네 지금 바쁘다잖아."
실렌의 말에 따르면 성녀의 숙청 때문에 교황청 내부가 상당히 소란스럽다고 하니 오히려 지금이 적기이다.
"그쪽이 신경 쓰지 못하는 틈을 타 여론을 가져오면 돼."
"방법이 있음?"
"아마 조만간 기회가 올 거야."
실렌의 물음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누리.
'분명 '그' 퀘스트가 이쯤이었지.'
사람들은 영웅의 출현에 열광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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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자유도가 높은 오픈 월드 게임이라 해도 레벨 디자인은 절대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요소이다.
그중에서도 RPG 장르의 게임이라면 더욱 그러한데,
스타팅 지역에서 종결 몬스터가 돌아다니고 있으면 과연 그 게임이 진행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런 게임이 있다면 출시하자마자 비추 폭탄을 맞고 수정되던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겠지.
이는 레벨 시스템을 차용하는 이스트헌터스토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유도가 높다 하더라도 레벨별 필드는 분명히 구분되어 있고 중간중간 서브퀘스트와 필드 보스를 넣어 부족한 경험치를 보충할 수 있게 해두었다.
하지만 악명 높은 난도답게 레벨디자인도 범상치 않았으니.
동 레벨의 몬스터도 잡으려면 충분한 피지컬이 필요했고,
서브퀘스트도 절대 쉽게 깰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필드 보스는 말이 필요 없지.'
화창한 날씨의 월요일 오전.
모든 직장인과 학생들이 가장 원한을 가지는 시간.
심지어 한여름이었기에 맑은 아침 햇살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고통을 선사했다.
하지만 그런 거리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평안한 표정으로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누리.
"이런 몸이 되니까 더운 것도 모르겠네."
덥고 추움이 아예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딱히 덥고 춥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냥 온도가 높다 낮다의 느낌 정도?
"땀 안 나는 거 하나는 좋네."
그렇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헛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으려니 누리에게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사장님."
"그래. 고생했어. 알렉스."
바로 전 흑탑 부탑주 알렉스.
그의 말에 감각을 펼쳐 일대 전체를 감지해본다.
지금 있는 곳은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로 한창 학생들이 등교중이었는데.
"음. 잘 숨었네."
곳곳에 어둑시니와 흑탑, 아니 이제 파불라 엑시티움 산하 아테르 소속의 흑마력 사용자들이 곳곳에 숨어있었다.
"오늘 이곳에서 무엇이 나타나는 겁니까?"
누리의 옆에 가만히 서 있던 알렉스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지금 이곳에 숨어있는 이능력자들만 해도 어지간한 이능집단의 힘을 간단히 뛰어넘는다.
거기에 자신과 숨어있는 사영까지 마스터 급의 실력자가 둘.
심지어 사장인 누리까지 있으니 지금 당장 전쟁을 벌여도 이상할 것 없는 전력이었다.
이러한 전력으로 잡아야 할 괴물이 이곳에 나타난다니.
"뭐, 과한 전력이긴 하지."
하지만 오늘은 그 과함이 필요한 날이다.
"네가 그렇게 원하던 걸 이루려면 말이야."
"제가...원하던 것 말입니까?"
누리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알렉스.
"있어 봐. 아. 그리고 말했던 대로 사람을 구하는 일 빼고 나서지 않을 거야."
'이 주변은 초반부 필드니까 둘이서 충분하겠지.'
누리는 혹시 모를 사망자를 막기 위해 이곳에 왔을 뿐.
오늘 일은 알렉스와 사영, 그리고 아테르의 소속원들끼리 해결하게 둘 계획이었다.
'그래도 아직 이 이벤트가 지나가지 않아서 다행이야.'
지금 누리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로 필드 보스.
곧 있으면 이곳에 돌발 게이트가 나타나 필드 보스 하나를 뱉어낼 것이다.
사실 이곳에 나타날 필드 보스는 게임적으로는 중요하지 않았다.
드랍하는 아이템도 별로고 경험치도 딱히 많이 주는 것도 아닌 그저 그런 필드 보스.
하지만 스토리적 측면으로 보면 충분히 주목할만 했다.
'사람이 모인 도심에서 나타난 첫 번째 게이트.'
침공 당시부터 지금까지 게이트는 오로지 사람이 밀집되지 않은 곳에서만 나타났고,
이러한 점은 사람이 모인 도심지역을 수비하기에 큰 이점이 되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언제나 예외가 있었는데.
'극소수 또는 한 마리만 출현하는 게이트는 도심에서도 열릴 수 있다.'
도심이라도 절대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인식시키는 것이 바로 이번 필드 보스.
드라칸의 존재의의였다.
모든 필드 보스 중 출현 날짜가 위치가 공식 설정에 존재하는 유일한 필드 보스일 정도면 말 다했지.
'그래서 나도 기억할 수 있었고.'
띠리링띠리링. 띠리링띠리링.
맞춰둔 시간에 되었는지 울리는 핸드폰 알람 소리.
"시간 됐다. 잘해봐."
"네. 사장님."
다른 인원들과 같이 정해둔 장소에 대기하러 가는 알렉스.
그리고 알람이 울린 지 5분이 지나고 10시 정각이 되자.
쩌어억.
고등학교 앞 도로 한복판의 허공에 실선이 생겨나더니 순식간에 벌어지며 검은 구멍을 만들어냈다.
"어?"
"저게 뭐야."
"설마...."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이었지만 이내 그것의 정체를 눈치챘고.
"게이트다!"
"미친 게이트가 왜 여기에?!"
"빨리 도망가!"
"꺄아아악."
패닉에 빠진 채 전력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침공이 시작된지 이제 반년 조금 지난 지금, 아직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던 그때의 공포를 잊지 못한 사람들.
하지만 바로 옆 학교에서는 아직 이변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대피하는 인원이 얼마 없었고.
쿵!
퀘에에에엑!!
재앙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