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화 (4/925)

4회

2. 공작님의 보좌관 (1)

일단 오늘은 첫날이니 집사를 따라다니며, 저택 구조를 익히거나 자주 보게 될 사람들을 소개받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실제로 보니 더 훌륭하시지 않습니까?"

"네, 그런 것 같습니다."

한스가 '허허허-' 소리 내 웃었다. 자부심과 뿌듯함이 엿보이는 웃음이었다.

이제 인사밖에 하지 않았는데, 훌륭한지 아닌지 어떻게 판단하란 건지 모르겠다.

'뭐, 얼굴은 몹시 훌륭하긴 했지만···.'

세르펜스가 있는 집무실과 점점 멀어지니, 슬슬 긴장감이 풀리기 시작했다.

[성검의 주인]의 최종 보스를 만난다는 걱정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주변이 보였다.

사치스럽지 않으면서도, 품위 있는 예스러운 물건들이 장식된 복도가 저 멀리까지 이어져 있다.

'수도에 자리한 저택이 이 정도로 넓다면, 대체 영주 성은 얼마나 크다는 거지?'

밖을 보니 건물이 이곳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스의 설명에 따르면 사용인들의 숙소라던가 병영, 손님들을 위한 별관 등등이라 한다.

그리고 지금 있는 본관은 5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집무실이 있는 곳은 무려 4층이었다.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그렇지, 4층의 계단을 오르면서 힘든 것도 못 느꼈다니···.'

사람의 심리가 육체에 미치는 영향이란 참 대단하다.

시온의 몸을 보니, 본래의 나처럼 딱히 운동한 것 같지도 않았다. 아침에 층계를 올라 집무실에 도착만 해도 진이 다 빠져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앞으로는 세르펜스가 아니라 계단 때문에 출근이 싫어질 것 같다.

공작의 개인 공간인 5층을 제외하고, 본관 전체를 돌아다녔다.

길을 안내받고 시종장이니, 행정관이니, 기사단장이니 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마지막으로 식당에 도착했을 때는 타이밍 좋게도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뭐지, 이거. 계산한 건가?'

그런 거라면 정말 대단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시장하실 텐데, 우선 저녁부터 드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러고 나서 공작님께 인사드린 뒤 퇴근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보니 엄청나게 배가 고파졌다.

오늘 아침에는 세르펜스 때문에 신경 쓰여서 빈속으로 출근 했었···.

"잠깐만요. 아침에 출근했는데, 왜 저녁이 된 겁니까? 제 점심은요?!"

내 위장에 안부조차 남기지 못한 채, 떠나가 버린 점심 식사에 대한 원망을 담아 한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내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인자한 할아버지의 미소를 띠며 무시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집무실까지는 혼자 찾아가 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러면서 빨리 일에 익숙해지길 바란다는 말과 함께, 이제는 제 할 일을 하러 가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여기 모든 이들이 원하는 꿈의 직장 아니었나? 출근 첫날부터 점심을 굶기다니?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에 속지 말아야 할 대상이 세르펜스 뿐만이 아니었어?'

생각해보니 저 양반은 세르펜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프라시더스 공작가에 충성을 바치던 인물이다.

어린아이가 학대당하는 걸 방조한 사람이 좋은 사람일 리 없잖아?

'어라···? 설마 이 집안사람들 다 이따위인 거야?'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져서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틀림없이 집에 돌아가면 배가 고파지겠지.

'에휴, 집에 돌아가면 야식으로 컵라면이라도 끓여 먹어야···, 잠깐만! 컵라면은커녕 봉지 라면조차 없잖아? 치킨도 못 시켜 먹어!'

인생의 모든 낙이 사라진 기분이다.

자고 일어났더니 느닷없이 시온의 몸에 빙의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보다, 더욱 큰 박탈감이 엄습했다.

'억지로라도 꾸역꾸역 입에 욱여넣을 걸···.'

방금 작별한 저녁 식사가 벌써 아쉬워졌으나 어쩌겠는가, 이미 떠나버린 님인 것을.

세르펜스의 집무실까지 가면서 헤매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4층 제일 안쪽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기에 바로 찾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헤매지 않았다는 거지, 식당과는 더럽게 멀리 위치했기 때문에 도착했을 땐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이 넓은 저택을 모두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4층까지 다시 올랐다.

내일 아침엔 엄청난 근육통에 시달릴 게 분명했다. 일어날 수는 있을까?

'게다가 나 다시 집까지 돌아가야 하잖아?!'

벌써부터 정신이 아득하다.

"꺅-!"

갑자기 집무실 문이 열리며, 동시에 여성의 비명소리와 '와장창-'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문 앞에서 입을 '헤-'하고 벌린 채 넋 놓고 있던 탓에, 문을 열고 나오던 시녀가 나를 발견하곤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쟁반을 떨어뜨린 것이다.

세르펜스에게 식후 차라도 가져다준 건지, 찻주전자가 바닥에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으악! 괘, 괜찮으세요?!"

"네, 네! 괜찮아요···."

나와 시녀는 잠시 동안 흔들리는 시선으로 서로를 마주했다.

그렇게 잠시 시선이 얽히다가 그녀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쭈그려 앉아, 주전자 파편을 주워 찌그러진 쟁반 위에 담았다.

"저도 돕겠습니다!"

나 때문에 놀라서 일어난 일인데, 위험한 일을 그녀 혼자 하게 둘 순 없었다.

시녀의 옆에 같이 쭈그려 앉아 주전자 파편에 손을 뻗으려는 순간, 어느새 다가온 세르펜스가 내 손을 잡아챘다.

슬쩍 보니 내 손뿐만 아니라, 시녀의 손도 마찬가지였다.

"맨손으론 위험합니다. 청소 도구를 가져오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가 짐짓 걱정스럽다는 말투로 얘기하며, 나와 시녀를 가볍게 일으켜 세웠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주의해서! 세상에, 이걸 어째! 어떡하면 좋죠?"

"아뇨, 제가 문 앞에서 멍때린 탓에···! 제 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시녀가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찻주전자를 깨 먹고, 카펫까지 찻물로 얼룩진 탓에 울먹거렸다.

나는 나대로 그녀에게 미안하고, 무엇보다 최종 보스가 두려워 우왕좌왕해버렸다.

"괜찮습니다. 두 분 모두 진정하십시오."

세르펜스가 다정한 목소리로 우리 둘을 진정시켰다.

그와 맞닿은 손으로부터 무언가 따스한 기운이 흘러들어오니, 마음이 매우 차분해졌다.

'이게 신성력이란 것인가···?'

몸이 편안히 이완되는 것이 느껴진다.

"단순한 사고였을 뿐입니다. 그보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그녀와 내가 횡설수설하는 걸 멈추자, 세르펜스가 안심했다는 듯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눈매가 가늘어지며,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긴 속눈썹이 천사의 날갯짓처럼 사락거린다.

'아, 정말 모든 죄를 용서받는 기분이야···.'

시녀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의 초점이 조금 흐려졌다.

한껏 풀린 그녀의 표정을 보자 내 정신은 반대로 또렷해졌다.

'어휴, 하마터면 홀릴 뻔했네!'

세르펜스는 나와 시녀의 손을 살펴보았다.

파편에 닿지도 않은 내 손은 물론이고, 시녀 또한 다친 곳 하나 없이 무사했다.

주전자가 시녀의 발치에서 떨어졌지만, 시녀복이 발목까지 오는 긴 기장의 치마 형식인 덕분에 튀어 오른 파편에도 다치지 않은 듯했다.

'다쳤다 해도 세르펜스가 불어넣은 신성력으로 치유 된 후겠지?'

그걸 뻔히 알면서도 그가 굳이 꼼꼼히 확인한 것은, '내가 너희를 이렇게나 걱정하고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 같은 것이리라.

상처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세르펜스의 손이 떨어졌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시녀는 청소도구를 가지러 나갔다.

"그런데 조금 섭섭합니다."

"네?!"

뭐지? 내가 뭘 잘못했기에 마왕의 뒤통수도 후려치는 최종 보스님의 심기를 거스르고 만 것일까.

'방금 깨뜨린 찻주전자가 세르펜스의 애장품이었나? 아니면 카펫인가? 내가 뭘 잘못했지? 나는 내일 출근하다가 마차에 치여 죽는 건가! 아아─! 소설 속 세계에 들어온 지 이틀째, 짧은 생이었다···.'

아연실색하는 내 모습에, 세르펜스가 안타깝다는 듯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검지와 중지로 내 이마를 '톡-.' 하고 짚으며, 또다시 신성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퇴근 후 집에 와서 따스한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시원한 맥주를 '탁-!'하고 까서 '크-!'하고 들이킨 기분이다.

'물론 아직 대학생이라 직장은 안 다녀봤지만.'

그냥 그 정도로 개운하다는 소리다.

머리에 직접 닿으니, 아까보다 정신 안정 효과가 더 뛰어난 것 같다.

'내가 너무 과민반응을 했나···?'

그래, 아무리 최종 보스라지만 그깟 주전자와 카펫 때문에 사람을 죽이다니.

아직 그 정도까지 타락하진 않았을 것이다.

"제가 무섭습니까?"

'어떻게 아셨지, 귀신이세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내가 생각해도 티를 너무 많이 내긴 했다.

그의 어린 시절이 안쓰러운 것과는 별개로, 그가 악마 세력에 합류해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고 고통스러워했다는 것도.

그것을 알면서 죄책감을 느끼긴커녕, 희열을 느끼며 광기에 휩싸여 가던 그의 모습도···.

내가 무언가를 바꾸지 않는 이상, 세르펜스는 또다시 파멸할 것이고 대륙은 악의가 가득한 업화로 뒤덮일 것이다.

'그 전에 내가 세르펜스에게 죽는 게 먼저려나?'

"안 죽입니다."

나도 모르게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혹시 내가 입 밖으로 생각을 내뱉은 건가?

굉장히 놀랐지만, 어째 무섭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아, 신성력···. 아직 불어넣고 있었구나.'

신성력에 생각을 읽는 기능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얘기는 한 번도 못 들어 봤다. 그런 편리한 기능이 있었다면 [성검의 주인]에서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을 리 없다.

"아까 살려달라 하셨잖습니까."

내가 눈알만 데록데록 굴리면서 시선을 회피하자, 세르펜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애달픈 마음이 들게 하는 얼굴이다.

다른 누군가가 본다면, 세르펜스가 저런 표정을 짓게 한 사람을 분명 쓰레기라 매도할 것이다.

시녀가 청소도구를 가지러 나가서 이 자리에 없길 망정이지, 출근 첫날부터 쓰레기로 이름을 날릴 뻔했다.

'그나저나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아까 횡설수설하다가 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아니, 것보다 방금 분명···.

"정말 안 죽여요?"

"제가 제 보좌관을 왜 죽입니까?"

'이미 죽였잖아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꾹꾹 눌러 담았다.

"제가···, 그런 사람으로 보입니까?"

"말실숩니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쓰레기예요. 재활용도 안 될 쓰레깁니다! 이 구역 제일의 쓰레기가 바로 접니다!"

천사 같은 얼굴의 세르펜스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자, 내가 정말 나쁜 놈이 되어버린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쓰레기 선언을 해버렸다.

내 선언에 세르펜스가 이쪽을 보며 살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풋-'하고 웃었다.

보고 있자니, 어딘가 마음을 흐뭇하게 만드는 웃음이다.

"아닙니다, 리벨론 경은. 오늘 처음 뵙지만, 굉장히 순수하고 좋은 사람이란 느낌이 듭니다. 쓰레기 같은 게 아니니, 그런 슬픈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네, 전 쓰레기가 아닙니다. 좋은 사람이에요."

팥으로 메주를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메주로 팥을 만든다고 해도 그렇다고 답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이끌려 되는대로 말했다.

나의 말에 세르펜스가 내 이마에서 손을 떼고, 아예 주저앉아 끅끅대며 웃어 재꼈다.

그 모습이 마치 순진무구한 소년의 해맑은 웃음처럼 보였다.

'얘가 원래 이런 캐릭터였나?'

생각해보니 [성검의 주인]에서 언급된 그의 모습은 학대당하던 어린 시절의 회상과 성검의 선택을 못 받고 타락한 이후뿐이었다.

'생각보단 안 무서운데?'

이 또한 계산된 연기일 가능성도 없잖아 있지만.

···없는 셈 치기로 마음먹었다.

'저런 거까지 다 연기면 너무 무섭잖아!'

너무 경계를 풀어도 안 되겠지만, 나는 어떻게든 그와 친해져야 하는 입장이었다.

무서워서 벌벌 떨어서는 죽도 밥도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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