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화 (5/925)

5회

2. 공작님의 보좌관 (2)

한동안 그렇게 큭큭 대며 웃던 세르펜스가 이젠 진정이 됐는지 다시 일어섰다.

촉촉이 젖은 눈가를 손가락으로 슬쩍 닦는 걸 보아, 눈물이 나올 정도로 실컷 웃었나 보다.

'그게, 그렇게 웃겼나?'

그러는 동안 아까의 갈색 머리 시녀가 청소도구를 가져왔다. 나도 도울까 싶어 다가갔지만, 그녀가 본인의 일이라고 사양했다.

"그나저나, 오늘이 첫날인데 어떠셨습니까?"

"아직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제대로 된 업무도 안 들어갔고."

"하지만 함께 일할 사람들은 만나보셨잖습니까."

사실 너무 많아서 누가 누군지 하나도 모르겠다.

'기억에 남는 사람이라고···. 점심밥의 원수인 한스와 저기서 청소 중인 시녀 정도?'

수첩을 가져와서 이름이라도 적었어야 했는데,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혹시 업무 관련된 일로 필요한 사항이 생기시면 언제든 제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럼 저기···."

슬쩍 운을 띄우자 세르펜스가 괜찮으니 말해도 된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출퇴근 말고 여기서 숙식하면 안 됩니까?"

나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저택까지 걸어오고, 이 커다란 저택부지를 가로질러 본관의 4층까지 올라올 자신이 없다.

당장 돌아갈 길도 막막하다!

그에 반해 저택에 살면 어떤가?

늦잠도 더 잘 수 있지, 삼시 세끼 꼬박꼬박 나오지, 혼자 출퇴근하다 마차에 치여 죽는 일도 없겠지!

'대한민국의 직장이라면 집이 가까우면 야근시키고 휴일에 예고 없이 튀어나오라고 하겠지만···.'

세르펜스는 그야말로 칼퇴의 요정이다.

아무도 모르게 밤마실도 종종 나가야 하는데, 보좌관처럼 줄곧 붙어 다녀야 하는 사람을 계속 옆에 두려 할 리 없다.

애초에 보좌관을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녀석인데, 공작가로서의 품위 때문에 달고 다니는 것 뿐이겠지.

그러니 저녁 식사 전까지만 일하고, 식당가서 저녁 먹고, 바로 근처에 있는 숙소로 기어들어가 푹 쉬면 되는 거다!

그야말로 완벽한 계획!

"안될 건 없습니다."

세르펜스는 흔쾌히 대답해주었다.

듣자 하니 전 보좌관도 이 저택에서 살았다는 모양이고, 가정을 꾸린 게 아니라면 오히려 출퇴근하는 경우가 더 드물다는 것 같았다.

"다만 오늘 당장은 준비가 안 될 것 같으니, 일단은 집사에게 말해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퇴근해도···될까요?"

"예, 그럼 들어가 보십시오."

세르펜스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꾸벅 허리를 접어 인사하고,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가는 길에 열린 가게에서 요깃거리라도 사 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닫힌 문에서 시선을 떼고 몸을 돌렸다.

몇 걸음 앞, 아까의 시녀가 자신의 키보다 큰 카펫을 돌돌 말아 안은 채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이 보였다.

나와 대화하는 도중에 세르펜스가 내 뒤쪽을 향해 살짝 눈짓하는 듯 보였는데, 그녀가 나가면서 인사하는 걸 받아주던 거였나 보다.

'그새 청소를 다 끝낸 건가?'

걷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이기에, 빨리 다가가 카펫을 받쳐주었다.

자세히 보니 팔로 카펫을 안고, 양손엔 주전자 파편이 담긴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각각 들고 있었다.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안 그러셔도 괜찮아요!"

"반은 제 책임이니, 하나는 제가 들겠습니다."

시녀가 도리질 쳤지만, 카펫을 거의 빼앗다시피 가져왔다.

'아무래도 오늘은 육체노동을 하는 날이려나 보네.'

카펫을 든 채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까 세르펜스가 신성력을 불어넣어 준 덕분인지 몸에 활기가 넘친다는 점?

덕분에 내일 근육통에 시달리는 일도 없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봉사 정신 투철한 몇몇 신관이나 신성력 보유자들 말고는, 보통은 프라이드니 뭐니 신의 힘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니 하면서 비싸게 군다고 하던데.

아니, 봉사 정신이 있는 신성력 보유자라도 이런 작은 일에서까지 마구 남발하진 않겠지.

그에 비해 세르펜스는 다른 사람이 보기엔 하찮아 보여도, 당사자에겐 큰 고통일 수 있다면서 일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돕는다.

'···고 알려졌다.'

그 착한 얼굴로 저런 말을 하면서 넘치는 신성력으로 친절을 베푸니, 보통 사람들에게 신의 사자처럼 떠받들어질 수밖에.

사실은 그가 타인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란 걸 안다면, 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데 왜 다른 사람에게 도와달라 하지 않고, 혼자 옮기고 있었어요?"

"실수한 거 들키면 혼나잖아요."

" ······."

눈앞에서 직접 본 세르펜스의 얘긴 아닐 테고, 시녀장이나 집사 얘기려나.

하지만 어차피 찻주전자 개수도 안 맞고, 카펫도 세탁하고 나면 마르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게다가 이 커다란 카펫을 들고 다니면서, 눈에 안 띌 거라 생각한 건가.

"누가 묻거든 제가 부딪혀서 그랬다고 하세요."

"···그래도 돼요?"

"첫 출근날 긴장해서 상사 앞에서 실수하는 건 흔한 일이죠."

"보좌관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신다면야···, 감사합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미안해서 양심이 찔릴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었다.

시녀가 미안해하는 듯하면서도 슬쩍 눈을 빛내며 답하는 모습이, 상당히 솔깃한 제안으로 받아들인 눈치다.

세탁실로 가는 동안의 대화로, 그녀의 이름이 '메리 가우디움'이고 가우디움 자작가의 방계 출신이라는 것을 들었다.

백모의 소개로 공작가에 들어온 지 일 년째라나?

이제야 어느 정도 인정받아 공작님께 차를 내갈 수 있게 되어 신났었는데, 그만 실수를 해버렸다는 이야기까지.

"···죄송합니다."

재차 사과를 건네며, 나중에 맛있는 간식거리라도 사다 주기로 약속했다.

집무실에서는 세르펜스가 있어서 몰랐는데, 이렇게 따로 보니 메리도 나름 미인 축에 속하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아까까지만 해도, 그냥 '갈색 머리 시녀 A'로만 보였다니···.'

새삼 세르펜스의 미모가 와 닿았다.

그런 세르펜스 옆에 앞으로 쭉 붙어 다녀야 할 나는 어떻게 보이려나.

'부디 해양생물이 아닌 인간으로만 봐줬으면!'

나는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 * *

다음날 출근해서 층계를 마주하여 마음을 다잡고 있으니, 마침 마주친 한스가 오늘은 세르펜스가 황궁으로 출근하시는 날이라 알려주었다.

공작님께서 아래로 내려오실 예정이니, 굳이 집무실까지 올라갈 필요가 없다나?

"그런 건 미리 좀 말씀해 주시지···."

"어제 말씀드렸는데, 기억 못 하시는 겁니까?"

···오늘은 수첩을 가져왔으니, 되는대로 다 적어야겠다.

방금의 말을 메모하고 있자니, 한스가 나를 조금 한심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월수금 격일로 황궁으로 출근한다는 정보와 일요일은 휴일이니 쉬어도 된다는 사족까지 덧붙여줬다.

내가 아무리 이곳의 상식이 부족하다지만 일요일에 쉬는 것까지 모를···!

'일요일만? 이 세상은 주 6일 근무제가 기본이었냐?!'

하마터면 토요일날 무단결근할 뻔했다. 사족이 아니었구나.

조금 기다리고 있으려니, 세르펜스가 내려왔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모든 사람이 경의를 표하며 고개를 가볍게 숙였고, 나는 한국인답게 허리를 꾸벅 접어 인사했다.

"어제 돌아가실 때도 말씀드릴까 했었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예의를 차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하하."

내가 한국에서 나고 자란 게 무려 25년이다. 몸에 익어 반사적으로 나오는 행동은 어쩔 수 없다.

아니지? 몸에 익은 건 아니고 정신에 익은 건가.

"리벨론 경은 제가 많이 불편하신가 봅니다."

세르펜스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 제발. 남들 앞에서 그런 표정 짓지 마. 다들 날 쓰레기 보듯 보잖아!'

저거 무조건 일부러다! 그렇다고 해서, '아뇨, 완전 편한데요?'라 말하며 어깨동무하고 친한 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랬다간 세르펜스가 날 죽이기 전에, 저기 서 있는 기사가 불경하다며 내 목을 베어버릴 거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뻘하게 서 있자 세르펜스가 씁쓸하게 웃으며,

"제가 친해지고 싶어서 한 농담이었는데, 실수였나 봅니다."

···라고 덧붙였다. 주변의 시선이 더 매서워진다.

'역시 나더러 엿 먹으란 건가?!'

이것이 세르펜스식 신고식인가 보다.

그렇지? 나한테만 이러는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제가 존경하는··· 공작님의 보좌관이 됐다는 게 아직 실감이 안 나서 그만!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앞으로 저와 함께 하는 일이 대부분일 텐데, 그렇게 계속 긴장하다간 몸이 못 버팁니다."

세르펜스가 편하게 해도 된다며,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고는 앞장서 마차로 향했다.

만일 내가 빙의하지 않은 본래의 시온이었다면 감격에 겨워 그에게 충성을 바치며 질질 짜지 않았을까?

모르는 게 약이라더니 딱 그 꼴이다.

난 아마 세르펜스가 무슨 선행을 펼치든 그가 무슨 꿍꿍이인지를 먼저 의심하게 될 것 같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세르펜스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적어도 밖에 나가서 탈 줄 알았는데, 저택 부지 내에서 마차를 굴리다니···.'

마차로 이동해야 할 만큼의 거리를 매일 출퇴근하는 건 나로서는 불가능했다.

역시 공작가에 내 방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한 건 참 잘한 일이었다.

마차가 출발하자, 처음에는 약간 흔들리는 듯하더니 이내 자동차를 탄 듯 안정적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공작님께서 타시는 고오급 마차라 그런가, 판타지 소설 속에서 으레 보던 것과 달리 엉덩이의 안부는 묻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난 이미 출근했는데 또 출근하는 셈인가?'

이 무슨 악몽에서 깨고 났는데, 그곳도 악몽 같은 소리람. 끔찍한 얘기다.

"참, 어제 말씀하셨던 건에 대해선 한스에게 말해두었습니다."

"숙식 말입니까?"

"네. 오전 중에 방을 정리해 놓겠다고 했으니, 오늘 퇴근하시면서 물어보면 안내해 줄 겁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내일은 조금 일찍 와서 당장 필요한 물건들 위주로 방에 갖다 놓고, 주말에 본격적으로 옮겨야겠다.

어떤 물건을 먼저 챙겨와야 할까 곰곰이 고민하고 있자니, 빤히 쳐다보는 세르펜스의 시선이 느껴진다.

"왜 그렇게 빤히 보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절 어려워하시는 듯하면서도, 이런 부탁은 쉽게 하시는 게 신기해서···."

아무것도 아니라더니 할 얘긴 다 했다.

무섭다면서 왜 한 집에 들어와 살려는 거냐는 질문인가, 아니면 말 그대로의 얘긴가? 그냥 둘 다에 해당하는 답변을 하면 되겠지?

"어제 하루 출근을 해보니 너무 힘들어서요."

"으음, 확실히 저택이 좀 넓긴 합니다."

무섭고 자시고 당장 죽는 것도 아닌데, 내 몸이 편한 게 우선이다.

내 말이 대답이 됐는지 세르펜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화가 끊겼다.

'갑자기 대화가 끊기니까, 엄청 어색한데?'

심지어 맞은편에 앉은 세르펜스가 싱긋 웃으며, 내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더더욱 그러하다.

'[성검의 주인]에서 세르펜스가 누군가와 독대할 때, 어떤 분위기였더라?'

일단 주인공과 싸우던 두 번의 전투 장면에서는···.

첫 번째는 일대일 상황이었고, 휴마누스는 세르펜스를 몇 번이고 설득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세르펜스의 마음에 조금도 다다르지 못했다.

최후의 결전 때는 동료들과 싸웠지만, 세르펜스가 쓰러진 뒤 그의 심장에 성검을 찔러넣을 땐 주변을 물린 이후였고.

'그때도 제대로 된 대화는 이뤄지지 않았지.'

그렇다기보다는 주인공 혼자 떠든 느낌이 강했다.

'세르펜스가 대화를 주도해 나간 상황은 어땠더라?'

협박하거나, 고문하거나, 타락시키거나.

비웃고 깔보면서, 상대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천사 같은 얼굴로 내려다보는 상황만 언급됐던 것 같다.

상대방의 멘탈을 아작내면서 반존대를 하는데, 여성 독자들이 섹시하다면서 드러누웠더랬지.

'섹시는 개뿔, 다 얼어 죽었다!!'

지금의 상황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되려 불안감만 커지는 게, 서스펜스라는 독자들 사이의 별칭이 다시금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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