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
3. 공작님과 기차여행 (2)
점심식사를 마치고 서류들을 정리하고 있으려니, 곧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지금 시각은 오후 3시. 인간이 간식을 먹기에 가장 적절한 시간대지.'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니다.
진짜로 간식 섭취의 가장 적당한 시간이 오후 3시라는 전문가 의견을 TV에서 얼핏 봤던 기억이 있다.
시녀가 내 책상 위에 두고 간 접시를 보니, 달콤한 초코 쿠키와 소금이 뿌려진 짭짤한 솔트 쿠키 두 종류가 놓여 있다. 어제 포피나에게 부탁했던 대로다.
'이걸 세르펜스에게 어떻게 전해줘야 하지?'
고민하고 있자니 자괴감이 몰려온다. 내가 왜 다 큰 사내 녀석 간식까지 챙겨줘야 하는 걸까.
속으로,
'세르펜스는 부모에게 방치된 불쌍한 어린애이며, 상처 입은 길고양이다. 나는 그의 조부모이며 캣맘이다'
···라고 스스로를 세뇌하듯 되뇌었다.
그래, 원래 사람이든 일반 동물이든. 길들이기에는 먹는 것 만한 게 없다.
"와, 이거 진짜 맛있네! 공작님도 하나 드셔 보시겠습니까?"
"아니오, 괜찮습니다. 저는 리벨론 경이 드시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릅니다."
세르펜스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왜 네가 어머니 같은 소리를 하고 있냐? 너 때문에 몰입이 깨져버렸으니, 책임져!
"에이, 그래도. 아! 제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일어서면서 고의로 펜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천천히 허리를 굽혀 펜을 다시 줍고 일어나, 책상 위에 놓는다.
'이 정도면 세르펜스가 나에게 보이면 안 될 서류들을 숨기는데 충분한 시간이겠지?'
물론 내가 퇴근한 이후에 처리할 가능성이 크지만, 혹시 모르잖아? 유비무환이다.
쿠키가 담긴 접시를 들고 세르펜스에게 다가갔다.
"자, 자-! 어서 드셔 보십시오."
"정말 괜찮···"
"제가 이렇게 직접 들고 왔는데, 성의를 봐서라도 안됩니까?"
일부러 서운한 티를 팍팍 내며 말했다.
지난 일주일간 지켜본 세르펜스라면 이 정도만 해도 받아들일 거다.
'봐라, 조금 고민하는 기색이 있긴 했지만 결국 쿠키를 하나 집어 드는 저 모습을!'
그가 집어 든 것은 솔트 쿠키다. 짭짤한 게 취향인가?
"어때요? 맛있죠?"
"네, 맛있습니다."
세르펜스가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는 미소를 지었다. 뭔가 기대한 바와 많이 다르다.
요리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눈물을 줄줄 흘리거나, 춤을 추는 건 기대도 안 했다.
하지만 놀라서 살짝 눈이 커진다거나, 그런 거 있잖아?
"쿠키가 두 종류인데, 하나만 먹으면 초코 쿠키가 섭섭하죠!"
그렇게 말하며 내가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빤히 바라보니, 세르펜스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다른 쿠키를 집어 들었다.
옳지, 옳지! 우리 새끼 잘 먹네!
"마지막 하나!"
세르펜스가 포기했다는 듯 살짝 웃음기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순순히 그릇 쪽으로 손을 뻗는다.
접시 위에서 살짝 방황하는 듯했던 그의 손이 초코칩 쿠키를 집었다.
'달달한 게 좋은 건가?'
그의 표정은 여전히 평소와 같다.
그래, 인정한다. 이 작전의 허점을 발견했다.
'우리 새끼는 항상 연기 중이라, 좋은 것인지 싫은 것인지 구분을 못 하겠어!'
에라, 원래 인생은 외길이다. 일단 달달한 걸로 밀자. 맛있으니까 두 개 먹었겠지?
그리고 주말에 밖에 나가 뭔가 매콤한 것도 사다 먹여보자!
그렇게 약 2주가 조금 안 되는 기간에 걸쳐, 세르펜스에게 꾸준히 간식거리를 먹였다.
처음 1주 차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2주 차부터는 오히려 세르펜스가 먼저 적극적으로 나왔다.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는데, 서류 사이에 처음 보는 양식이 끼어있더라.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니 내 자리로 와 친절히 설명해 주기에, 혹시 몰라 하나 더 권해보았다.
세르펜스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국 하나 더 집어먹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 뒤로도 알 수 없는 전문용어가 등장한다거나, 다른 부서의 서류가 잘못 끼어있다거나 하는 일이 매일 한 번씩 생겼다.
심지어 교묘하게 세 시 반 전후에 발견될 위치에 끼워져 있는 것이···.
'벌써 내 업무 처리 속도 파악을 끝낸 거야?'
그때마다 세르펜스는 각종 쿠키나 브라우니 등을 한 조각씩 집어 갔다.
참고로 주말엔 그리 맵지도 않은 닭꼬치를 사서 갖다 바쳤는데, 이땐 반응이 있었다.
'한 조각 입에 물고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며 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그 모습이란···!'
내가 기대한 반응은 이런 게 아니었건만.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 닭꼬치를 바라보는 세르펜스의 표정은, 마치 고행을 각오하는 승려와 눈빛과 닮아있었다.
'이 자식, 매운 거 더럽게 못 먹네!'
뜯어말리느라 정말 혼났다.
생각해보니 24년간 매일 심심한 음식만 먹어 온 그에게, 매운 음식은 너무 자극적이었던 것 같다.
매운 길은 빠르게 포기한 후, 단 길 외길 인생을 걸었다.
당도를 천천히 올리다가, 이번엔 단맛을 확 올려 과감히 초코 마카롱에 도전해 봤다.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지.'
보통은 처음 내가 가져다주는 한 번, 서류 장난질로 세르펜스가 오는 한 번으로 끝났었다.
하지만 오늘은 무언가 자료를 찾는 척, 내 자리 뒤편의 책꽂이를 어슬렁거리는 것이 아닌가?
한 개 더 먹여줬다.
너무 순조로워서 불안해질 정도로 잘 길들여지고 있다.
"참, 리벨론 경. 짐은 싸두셨습니까?."
즐겁게 퇴근하려는 나를 세르펜스가 불러 세웠다.
"예?! 저, 저 짤리는···겁니까?"
왜죠! 아까 전까지만 해도 마카롱 잘 먹어놓고 어째서?
망연자실한 눈으로 세르펜스를 바라보니 그가 '푸흣-'하고 웃었다.
그가 매달 마지막 주는 자문회 일정이 없으므로, 프라시더스 공작령으로 내려갈 거라 설명했다.
듣고 보니 첫날 한스에게 그런 얘기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그 날 수첩을 챙겼어야 했는데!!'
웬만한 서류들은 수도로 전달되어 업무를 보긴 하지만, 영지 밖으로 반출시킬 수 없는 문서가 있어 매달 내려가 봐야 한다는 모양이다.
그 밖에 직접 방문해봐야 할 곳도 있고, 서류로 전달된 서류 사본과 원본을 비교하여 혹시 모를 비리를 찾아내는 감사 업무 등 할 일도 많다!
"언제 출발합니까?"
"금요일 자문회가 끝나면 점심식사 후, 바로 출발할 겁니다."
참고로 지금은 목요일 저녁이다.
금요일 옷은 입고 갈 테고, 대충 서너 벌 챙겨간 후 거기서 세탁 맡기면 되려나.
'잠깐, 세르펜스 먹일 간식은 어쩌지?'
* * *
점심 식사를 빠르게 마치고 부랴부랴 방에 올라가 짐을 챙겨 들고나왔다.
다행히 세르펜스는 아직인 듯했다.
'휴, 안 늦었나 보네.'
마차 안을 보니, 이미 커다란 서류가방 하나와 작은 짐가방이 놓여 있었다. 시종들이 먼저 올려놓은 듯했다.
세르펜스는 어차피 저쪽에도 필요한 물건들이 갖춰져 있어서 그런가? 짐 자체는 생각보다 간소했다.
'그보다 서류가방이 너무 큰 것 같은데. 설마 가는 길에도 일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마차에 짐을 싣고 안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곧 평소보다 가벼운 차림을 한 세르펜스가 올라탔다.
평소에는 이것저것 받쳐입는 화려한 제복 형식의 밝은색 옷을 입고 다니던 그였는데, 오늘은 심플하고 간략한 정장 차림이다.
"마차가 한 대밖에 없던데, 설마 저희 둘만 가는 겁니까?"
내 질문에 세르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해주었다.
'명색이 공작인데 수행원이 이렇게 조촐해도 되는 건가?'
가는 길에 수발을 들어줄 시종···은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른이인 세르펜스가 거추장스러워할 테니 필요 없다.
호위병력···은 세르펜스가 더 강하니 더욱 의미가 없다.
'자문회를 홀로 평정한 인물에게 호위는 개뿔.'
그러고 보니 [성검의 주인]의 중반부쯤, 작가가 언급했던 내용이 떠오른다.
인간의 몸으로 악마와 정면으로 1:1 맞다이 가능한 자는 세르펜스와 성검의 선택을 받은 휴마누스 뿐이랬나.
'최대 중급까지라는 한정 조건이 달리긴 했지만, 그게 어디야.'
그 말대로라면 현재 실질적 인간 최강은 세르펜스라는 게 된다.
수명이 긴 이종족까지 포함하더라도 최상위 1%에 들어가지 않을까?
'이거 완전 밸런스 파괴 먼치킨 아냐?'
어디까지나 소설 중반부의 언급이라, 이후에 휴마누스가 더 성장하여 상급 악마까지 홀로 처치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대단한 건 대단한 거다.
만약 성검이 세르펜스를 선택했다면. 그래서 성검을 비롯한 각종 장비 빨까지 갖췄다면 어땠을까?
'마왕도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마왕이 10초 만에 대륙을 찍고 턴 해버리는 바람에, 그 수준을 몰라 확실한 것은 아니나 가능성은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창밖을 멍하니 보고있자니, 3시간을 내리닫던 마차가 멈춰 섰다.
공작령에 도착한 것은 당연히 아니고, 기차로 갈아타야 한다.
'마나를 연료로 쓴다고 들었는데···.'
심지어 무려 충전식이란다.
필요한 마나의 절반은 대기 중의 마나를 흡수하고, 절반은 마법사들을 고용해 충전한다니 창조 경제란 말이 절로 나온다.
아주 옛날에는 판타지 세계답게 순간이동이 가능한 마법 게이트를 사용했었다고 한다.
갑자기 마법이 퇴화해서, 기차로 바뀐 것은 아니다.
'어떤 나라에서 수도 게이트가 반역자에게 탈취당하는 바람에, 수도 내에 갑자기 나타난 적군 때문에 대비도 못 하고 망해버렸다나?'
그런 사건이 있었던 뒤로 이동 게이트는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그리고 원작의 흐름대로라면, 나중에는 이 기차도 운행을 중지하게 되는 건가?'
볼타 산맥. 신성 결계를 이용해 마물들을 가둬둔 장소다.
이후 그곳의 신성 결계가 깨지며 마물들이 풀려나게 되는데, 그들이 대륙 곳곳에 퍼져나가게 됨으로써 철도의 운행 관리가 힘들어진 탓이다.
'그러고 보니 그 결계가 깨지는 것도 막아야 하는구나.'
할 일이 많다. 적어도 선택의 날이 오기 전에는 세르펜스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어휴─."
나도 모르게 크게 한숨을 내쉬니, 기차에 오르자마자 서류 가방을 열던 세르펜스가 날 의아하게 바라본다.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십니까?"
'네, 당신이 제 최대 걱정거리입니다.'라고 대답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뇨, 이틀이나 기차에서 생활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답답해져서 말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쾌적하지 않습니까?"
확실히 그의 말대로다.
뒤쪽의 다른 칸은 일반 기차와 다름없지만, 우리가 타고 있는 칸은 그것 하나가 커다란 방처럼 구성되어있었다.
칸막이가 세워진 4개의 싱글 침대에 소파와 테이블. 화장실은 물론 심지어 한 쪽에는 간단히 씻을 수 있는 샤워룸까지 갖춰져 있었다.
"리벨론 경은 퇴근 이후에도 공작저를 많이 돌아다니시는 것 같던데, 한 장소에 머무는 것이 답답하신 모양입니다."
"제가 워낙에 외향적인 사람이라, 하하."
사실 목적이 있어서 그런 거지만. 괜히 멋쩍어져서 웃어넘겼다.
"그보다 공작님께선 모처럼의 기차여행인데 벌써 일을 하시는 겁니까?"
"매달 타다 보면 그런 낭만은 사라지게 됩니다."
세르펜스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인정. 그리고 앞으로 나도 그렇게 되겠지.
"그래도 모처럼이니 좀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공작저에서 지내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세르펜스는 도통 쉬지 않는다.
새벽 일찍 일어나 연무장에서 홀로 검술 수련을 하고, 내가 퇴근한 뒤로도 남은 일을 처리하거나 기사들 검술을 봐준다거나 한다고 들었다.
"그럼 리벨론 경이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세르펜스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들고 있던 서류를 흔들며 말한다.
'아니, 그건 좀···.'
아닌가? 돕는다고 해야 하나.
어쩐지 '틀림없이 네가 거절할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뉘앙스였기에 왠지 오기가 생겼다.
"네,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돕겠습니다."
"···그저 농이었습니다."
의외라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본다.
마치 나를 분석하는 듯한 시선. 전에도 분명 이런 느낌을 받아본 적 있었는데.
"리벨론 경이라면 분명 거절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예? 그래도 제가 보좌관인데, 공작님의 업무를 돕는 거야 당연하죠!"
"하지만 리벨론 경은."
세르펜스가 뚫어질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한 박자 쉬고 다시 말문을 연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건지. 괜히 나까지 긴장되었다.
"일하는 거 싫어하시잖습니까."
"네? 그건 누구나 다 그런 거 아닙니까?"
갑자기 김이 팍 새버렸다. 난 또 뭐 대단한 얘기라도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평소에도 일부러 업무 속도를 늦추고 계시잖습니까?"
···이런, 대단한 얘기 맞았네.
상관에게 업무 땡땡이 현장을 발각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