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회
4. 공작님의 영지에서 (2)
식사를 끝낸 후, 노만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영주의 집무실은 내 방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동선 낭비가 뭐 이따구야?'
멀리 떨어진 식당에 갔다가 다시 되돌아와야 한다니. 효율성이 심각하게 떨어졌다.
'방 위치를 옮겨달라고 해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하며 집무실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눈에 들어온 광경을 보고 나는 깨달았다.
어째서 내 방이 성안에. 그것도 집무실 근처로 배정되었는지.
세르펜스의 책상은 말할 것도 없다. 내 자리로 추정되는 책상 위에도, 서류의 산이 가득 쌓여있었다.
'이건 야근을 전제로 한 위치 선정이었구나!'
그곳에 더 이상의 농땡이는 없었다. 방을 식당 가까이 옮길 게 아니라, 식사를 방에서 해야 할 판이다.
세르펜스는 급하게 처리해야 할 서류를 우선하여 살폈다.
나는 저택에서 처리했던 사본 서류들과 이곳에서 작성된 원본 서류들의 대조 작업을 맡았다.
특히 회계 관련으로는 숫자를 하나하나 대조해가며 검산까지 해야 해서, 눈도 아프고 머리도 핑핑 돈다.
그러는 동안에도 행정관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다녀가며 계속해서 보고서를 올렸다.
손이 빠른 편인 세르펜스의 서류조차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원작에서 시온이 죽고 난 후에는, 이 많은 걸 혼자 다 했다고?!'
기차에서 밤을 꼬박 새워가며, 꾸역꾸역 업무를 처리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 그런 식으로 어떻게든 한 거겠지.
타임머신이 있다면 설렁설렁 시간만 보내고 퇴근했던, 지난날의 자신을 한 대 때려주고 오고 싶다.
"주, 죽을 것 같아요···."
세르펜스가 신성력을 간간이 불어넣어 주지 않았다면, 이미 진작에 그로기 상태가 되어 나가떨어졌겠지.
적어도 나흘 동안 나눠서 진행하면 되는 작업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내일은 봉사활동과 거리 시찰을 가야 하고, 글피는 일반 서류를 처리해야 한다나?
그러니 실질적으로 이 작업에 주어진 시간은 오늘과 모레, 이틀뿐이었다.
'근 한 달 분량의 서류를 이틀 만에 확인하라니···!'
대충 훑어봐도 좋을 작업도 아니다.
아주 드물게도 오탈자인지 비리인지. 확실한 건 아직 모르겠다만, 원본과 사본이 다른 서류가 발견되었으니. 보고 후, 원인 규명도 해야 했다.
일이 바쁘다 보니, 식사도 부실하게 샌드위치로 때워야 하고···.
세르펜스의 보좌관이 된 이후 첫 야근이다.
'이 바쁜 와중에 봉사활동은 또 뭔데! 이게 봉사지!'
나와 세르펜스가 이렇게 프라시더스령을 위해 열심히 갈려 나가고 있는데, 뭔 놈의 봉사 타령이란 말인가!
한 가지 다행이라면, 시찰이라고 해서 공작령 전체를 다 확인해야 하는 건 아니라 했다.
변장하고 적당히 돌아다니면서 물가나 생활상, 치안 등을 확인할 뿐이라나?
'그건 좀 재밌겠네.'
숨 돌릴 시간을 주긴 하는구나···.
* * *
다음 날 아침 일찍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노만에게 반쯤 끌려 마차에 올라탔다.
노만이 내 담당이 되어버린 건가?
"아침은 교단 소속의 보육원에서 먹을 예정입니다."
먼저 마차에 올라타 있던 세르펜스가 문이 닫히자마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자마자 한다는 얘기가 저건가? 세르펜스의 속에서 나는 먹는 것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린 듯하다.
물론 물어볼 생각이긴 했다.
"보육원에 가는 겁니까?"
내 말에 세르펜스가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는 시선을 던진다.
그러고 보니, 세르펜스는 내 앞에서 착한 척을 그만둔 이후로는 부쩍 말수가 줄었다.
'원래 이런 성격인 건지, 연기하지 않는 자신을 어색해하는 건지 잘 모르겠네···.'
그도 아니라면,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나다는 내 거짓말 때문인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이해하겠거니 생각하며, '눈으로 말해요.'를 시전하는 것 같기도 했다.
'마지막 이유면 정말 난리 나겠는데···?'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이래서 블러핑은 함부로 날리는 게 아니다.
"그냥요. 뒤에 따라오는 짐마차에 가득 담긴 게 아이들 선물이었나 싶어서?"
사실은 어린아이가 받아야 했을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했던 그가, 보육원 봉사를 간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져서다.
세르펜스는 내 질문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늘은 책을 읽지 않는 건가?'
공작가의 마차가 도착하니, 아이들이 잔뜩 달려 나왔다. 말이 신기한지 가까이 가려는 것을, 위험하다며 마부와 신관이 말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모두 잘 계셨습니까?"
마차에서 내린 세르펜스가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춰 아이들과 시선을 맞췄다. 그러고는 안겨오는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안아주며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새삼 공작저 사람들이 세르펜스를 그렇게까지 열성적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워낙에 외모에서 오는 효과가 커서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단순히 연기라고만 치부하기 힘든 성의가 느껴졌다.
그런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일 테니, 많이 과하긴 해도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 오신 보좌관님이시죠?"
세르펜스가 양팔에 아이를 하나씩 안고 일어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려니.
50대쯤 되었을까? 어느새 다가온 신관복을 입은 여성이 말을 걸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시온 리벨론이라 합니다."
"아멜리아 C. 세레니티입니다. 부족하지만 프라시더스령 지부의 보육원 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녀는 푸근하게 웃으며, 식사가 준비되어 있으니 함께 들어가자며 나를 안쪽으로 이끌었다.
음식을 먹기에 앞서 잠시 짧은 기도가 있었다.
아이들은 짐짓 엄숙하게 고사리 같은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으나, 기도문이 끝나기 무섭게 왁자지껄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세르펜스도 그들 사이에 앉아 무릎 위에 한 살 안팎의 아기를 앉혀 두고, 이유식을 천천히 떠먹였다.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따스한 눈길로 아기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굉장히 숭고하고도 고결해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선뜻 다가갈 수 없을 만큼 성스러운 모습이다.
그러나 순수한 아이들은 그저 세르펜스가 아기를 신경 쓰느라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것이 걱정된 모양이다.
스프에 적신 빵을 그의 입에 가져다 댔고, 그는 조금 난처한 듯하면서도 행복해 보이는 얼굴로 빵을 받아먹었다.
'···저건 연기든 진심이든. 어느 쪽이든 너무 슬프잖아?'
어째선지 무척이나 가슴이 먹먹해지고, 물을 마셔도 자꾸만 목에 음식이 걸려 넘어가지 않는 것 같다.
세르펜스와 처음 만났을 때의 나라면 가증스럽다며 속으로 코웃음 쳤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 없게 돼버렸다.
그는 소설 속 최종 보스도, 대륙을 위한 희생양도 아닌. 한 명의 사람이었다.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없었던, 어린아이일 뿐이다.
그를 이해하는 길을 선택한 이상, 단순히 내가 살아가고 그것을 위해 이 세계가 평화롭길 바라는 게 아니라···.
'저 녀석도 행복해졌으면 좋겠네.'
연기가 아닌, 진심으로.
식사가 끝난 후 세르펜스는 원장님과 얘기를 하러 원장실에 들어갔고, 나는 아이들 사이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얘, 얘들아 안녕~?"
수많은 아이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로 나 하나만 바라보는 모습을 보니, 절로 긴장이 되었다.
일단 최대한 환하고 상냥하게 웃으며 인사해보았다.
"아저씨 웃는 거 이상해!"
"전에 같이 온 아저씨는 무서웠는데, 이 아저씨는 바보 같아!"
살짝 상처받을 뻔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재밌다며 '꺄르륵-' 웃으며 내 손을 잡아끌고 같이 놀자 권해 주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면 어떤가, 애들이 재밌다고 좋아하는데!
'그런데 왜 조금 슬퍼진 것 같을까···, 흑흑.'
아이들과 블록으로 탑도 쌓고, 안아서 둥개둥개도 해주며 한창 놀다 보니 세르펜스도 원장실에서 나와 합류하였다.
세르펜스가 무릎 위에 아이를 앉히고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한 마리의 말이 되어, 등에 아이를 태우고 바닥을 네발로 기었다.
아이들이 세르펜스의 긴 머리칼을 서투른 손길로 땋아 내릴 때, 내 머리는 거친 손길로 쥐어 뜯겼다.
여자아이들이 크면 세르펜스에게 신부 삼아달라 말했고, 남자아이들은 커서 나를 부하 삼아주겠다 말했다.
'뭐지? 이 온도 차는 대체 뭐야?!'
대우가 너무 차이 나는 것 아닌가!
나도 모르게 서러움에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그런 내 서글픈 마음을 눈치챈 것일까.
내가 말 시늉을 할 때부터 가만히 지켜보던 여자아이가,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괜챠나, 괜챠나. 울지 마."
아이가 내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날 위로했다. 모든 설움이 씻겨나가는 기분이다.
"내가 크면 우리 집 개가 될래?"
···잠시 귀가 좀 고장 났었나 보다.
내가 강아지처럼 귀엽다고 말했던가? 그래, 분명 그렇게 들었다. 아이가 내 머리를 계속해서 쓰다듬는다.
이후의 일정이 있었기에 나와 세르펜스는 점심시간까지만 아이들과 함께했다. 아쉬워하는 그들을 뒤로하며 마차에 올랐다.
떠나려는 우리에게 원장님은 아이들이 참 좋아했다며, 앞으로도 함께 와주셨으면 기쁠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가슴이 부풀어 오를 듯, 따스함으로 충만해졌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인원이 많았네요."
뭔가 세르펜스라면 복지 같은 것을 잘해서, 미연에 방지하는 설정을 추구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공작령쯤 되다 보면 사람도 많고 땅도 넓으니, 뭐. 어쩔 수 없으려나요?"
나의 질문에 세르펜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공작령 출신의 아이들도 있기는 합니다. 하나, 공작령에 있으니 어디까지나 교단 소속이다 보니···."
그의 설명을 따르자면, 다른 지부의 보육원에서 수용 인원을 넘어 이쪽으로 옮겨오는 경우가 가장 많다고 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것이 가장 문제가 되는 경우다.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아이를 버리러 일부러 오는 경우.'
처음에는 그들을 잡아내어 이야기를 들어봤다고 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비록 사정이 좋지 못해 이렇게 되었지만, 아이라도 좋은 곳에서 지내기 바란 것뿐이었습니다."]
···라 답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대외 이미지를 생각하다 보니, 기부나 후원을 많이 하여 다른 지역의 보육원들보다 시설과 교육이 좋은 탓이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죄책감을 덜어내려는 변명에 불과했다.
'그 증거로···.'
처음에는 그들에게 지원금을 쥐여주고, 아이들과 함께 돌려보냈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본래 영지의 보육원에 보내지거나, 심한 경우 돌아가는 길에 버리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 때문에 모르는 척 받아줄 수밖에 없었노라, 세르펜스가 고저 없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들을 보며, 부모를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했던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찌하여 저를 그런 눈으로 보십···. 보는 건가?"
내 시선을 느낀 것인지, 세르펜스가···.
'···어?'
기차에서 내린 후부터 말수가 부쩍 줄었다 했더니. 내가 했던 말을 담아두고, 말을 놓기 위한 타이밍이라도 재고 있었던 건가?
지금 말 놓은 거냐고 촐싹대며 물었다가는 무안해 하면서 없던 일로 칠 것 같다.
괜히 티 내지 말고 자연스럽게 넘어가자.
"아뇨, 그냥? 오늘은 책을 안 읽으시는 건가 해서요."
잠깐 나를 응시하는 듯하던 세르펜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그 심경이 복잡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