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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회개해주세요!-17화 (17/925)

17회

4. 공작님의 영지에서 (4)

'제대로 따라오는 거 맞겠···지?'

지금 나는 홀로 어두운 거리를 걷고 있었다.

으슥하고 외진 곳은 아니고, 주점 등이 밀집한 골목이다. 곳곳에 연주하는 음유시인도 있다 보니, 시끌벅적한 게 홍대 밤거리를 연상케 했다.

하나, 내가 혼자 돌아다니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치안 확인을 위한 미끼 역.

옆을 지나치는 무기를 든 거한이 내게 시비를 걸까, 괜히 움츠러든다.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는 건가···."

평범해 보이는 음식점에서 함께 저녁을 먹던 세르펜스가 느닷없이 말해왔다.

오늘은 평소보다 제대로 된 치안 확인이 가능할 것 같다나? 그리고 이어진 게 지금의 상황.

자신은 멀리 숨어서 지켜볼 테니, 나는 그냥 평소대로 행동하라면서 용돈으로 100만 아스짜리 지폐를 쥐여주었다.

'아스'는 신성 루멘 제국의 화폐 단위로, 1아스=1원으로 보면 된다.

쓰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못 쓸 것도 없는 금액. 하지만 나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 있어, 하룻밤의 용돈으로는 과한 금액이었다.

'그런데 이거, 잔돈이 아니잖아?'

덜렁 한 장짜리 지폐다.

이걸 내게 쥐여주며, 세르펜스는 오늘 밤이 끝나면 남는 금액은 모두 회수하겠노라 말했다. 그러니 부지런히 쓰는 게 좋을 거라나 뭐라나.

분명 내가 한층 더 뛰어난 호구가 될 수 있도록, 잔돈이 있으면서 일부러 그런 것이 분명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무 술집이나 들어가서 골든벨이라도 한 번 울려봐?'

···라는 생각도 잠시 했었지만, 그러기엔 또 부족한 금액. 거, 되게 애매하게도 줬다.

당장 필요한 것도 없고. 공작저 식구들에게 환심이라도 얻을 겸, 기념품이라도 사다 줄까?

장신구를 파는 가판대에 가서 스무 개가량의 물건을 골라 담고, 100만 아스권을 내밀었다.

"5만 아스입···. 손님? 혹시 잔돈은 없으십니까?"

"아니, 장사하시는 사람이 고작 95만 아스도 못 거슬러 주십니까? 허, 참! 어떻게 사람이 95만 아스도 없을 수가 있지?"

내 능청스러운 말에 상인이 일그러진 미소를 짓는다. 뭐 이딴 진상이 다 있냐 싶지만, 돈이 많아 보이니 참는다는 표정이다.

"그럼 최대한 거슬러 주시고, 모자란 건 대충 물건으로 담아주시던가요?"

이어진 말에, 상인이 언제 기분이 나빴냐는 듯 환하게 웃었다. 가판의 물건을 모두 쓸어 담아 80만 아스와 함께 내 손에 쥐여 준다.

내가 처음 집어 든 20개의 장신구가 총 5만 아스였으니, 장식 하나당 2~3천 아스 안팎이란 얘긴데.

심지어 남은 물건도 그렇게 많진 않았잖아?

'이건 호구가 아니라, 호갱인데?!'

훌륭한 바가지였으나, 어차피 오늘 밤이 지나면 사라질 돈. 그냥 좋은 일 했다 생각하며, 옆의 공예품을 파는 가게로 발길을 옮겼다.

이번엔 잔돈이 있었기에 물건을 모두 쓸어 담는 일은 없었다. 대신 상인은 척 봐도 과한 금액을 불렀다.

'보고 있나요, 세르펜스? 당신의 영지 상인들이 보여주는 바가지 정신을.'

간간이 군것질도 했다. 아까는 세르펜스 때문에 지나쳐야만 했던 매콤한 것들 위주로.

세르펜스에 대해 떠오른 김에, 그에게도 뭔가 사줄 만한 게 있지 않을까 했으나.

'이런 곳의 싸구려 물건은 취급하지 않겠지?'

나중에 월급을 받고 나면, 유명 가게의 생크림 케이크라도 주문 넣어야겠다. 그런 곳은 얼마 정도 하려나?

가끔 경비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나 누군가를 포박해 가는 모습이 보였지만, 나에게는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시비를 걸어온다거나, 소매치기를 당한다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굳이 미끼 작전 같은 거 안 썼어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이 도시의 치안은 경비대가 단단히 지키고 있었으니, 안심해도 좋을 듯하다.

지금도 경비대 복장을 한 사람이 또 몰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구경이나 가볼까?

"꺅-!"

갑작스러운 방향전환 탓일까?

짐이 많아져 임시로 구매한 배낭에 둔탁한 느낌이 들면서, 여자의 비명이 울렸다.

얼른 뒤를 돌아보니, 20대 초반 즈음으로 보이는 여자가 엉덩방아를 찧은 채 넘어져 있었다.

"괜찮으세요?"

다가가 손을 내밀었지만, 여자는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가방 안을 뒤적거리더니 깨진 병 조각 같은 걸 꺼내 들고 울상을 짓는다.

"내 시약! 세상에, 이게 얼마짜린데!"

이건 설마, 드디어 온 것인가! 이제야 내 역할을 충실히 해낼 수 있었다.

반갑다, 이 사기꾼아!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무, 무슨 문제? 지금 이게 얼마나 비싼 것인지 아세요? 어쩜 좋아, 스크롤들도 다 젖었잖아!"

가방 안쪽을 슬쩍 보니, 깨진 유리병에서 쏟아진 액체와 가루에 범벅된 종이 뭉치들이 보였다.

'저게 다 스크롤이라고?'

세상천지에 누가 그 비싼 스크롤들을 저렇게 한가득 들고 다니겠는가. 아무리 싼 것도 50만 아스는 넘을 텐데.

거기다 유리병에 든 마법 시약들과 함께? 부주의해도 정도가 있지.

주변 사람들도 처음의 소란에 무슨 일인가 하고 보다가, 스크롤 운운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저, 오늘 처음이세요? 크게 한탕 하고 싶으신 건 알겠는데···."

"사기 아니야! 사기 아니라구우···!"

여자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럽게 말했다. 눈물로 촉촉이 젖어 든 하늘색 눈동자가 무척이나 슬퍼 보였다.

세르펜스만큼은 아니지만, 누가 봐도 진심으로 오인할 만큼 훌륭한 연기.

그러나···.

"상대를 잘못 고르셨습니다."

세르펜스라면 단순히 설움 한 가지가 아니라, 훨씬 풍부한 감정을 담았을 것이다.

좀 더 침통하게, 애처롭게, 비통한 심정을 담아. 애달픈 표정으로 구슬프게 눈물을 흘리며, 상대의 심장을 쥐어뜯어 놓았을 테다.

'네, 제 점수는 탈락입니다. 매길 가치조차 없어요.'

냉정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 보고 있자니, 세르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 지켜보고 있었구나.

"마, 만지지 말아요!"

세르펜스가 가방 안의 마법 스크롤인 척하는 평범한 두루마리를 꺼내 들자, 여자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가짜인 거 다 들켰는데도, 아직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녀가 가방을 끌어안고 그 입구를 막았으나, 이미 두루마리 중 한 장은 세르펜스의 손에 들려진 후.

"자, 시온! 어서 그 여자의 사기 행각을 밝혀주시죠!"

두루마리를 펼쳐 들고 살펴보던 세르펜스가 내 쪽을 보며 말했다.

"이거 진짭니다."

"···예?"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진짜라고? 저 많은 종이 뭉치가 다 스크롤이라고?

"그것도 상당히 잘 만든 겁니다. 하필 마력이 섞인 시약이 스며드는 바람에 못쓰게 되어버렸지만···."

"아, 알아보시겠어요?! 제가 만든 거에요!"

"제가 마법 전문은 아닌지라. 일단 들어간 마법진의 배치라던가, 사용된 문장의 어휘를 보아···."

제작사라니. 그쪽으로는 예상 못 했는데···?

세르펜스와 사기꾼인 줄 알았던 스크롤 제작자가 부여된 마법이 어떻고, 들어간 재료가 어쩌고.

뭐라 뭐라 대화를 나누는데,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이라고는, 오직.

'저거 다 배상하려면 대체 얼마나 드는 거지?'

···라는 생각뿐.

시온의 월급은 얼마일까. 공작가의 보좌관인데 많이 주···겠지?

"어째서 이 많은 물건을 가지고 돌아다니셨던 건지,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투자 신청 하러 영주님 성에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그런데···, 그런데 다 망했어요···."

여자가 서럽게 펑펑 울었다. 저거 진짜 우는 거였구나.

어쩐지 너무 진심이 담긴 것 같더라니, 너무 세르펜스를 기준으로 삼았나 보다.

'그나저나 영주님에게 투자를 신청하러 갔었다라···.'

이 영지의 영주님이라면 세르펜스잖아?

"일단 진정하시고, 장소를 옮겨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세르펜스가 그녀를 일으켜주며, 조심히 신성력을 흘려 넣어 주었다. 그녀가 살짝 놀란 표정을 한다.

"어머, 마법사가 아니라···? 정말 전문가 아니셨어요?"

그녀의 질문에 세르펜스는 말없이 미소로 대답했다.

마침 그녀가 머무는 여관이 주점을 같이 하고, 이 근처인지라 그곳의 1층에서 이야기를 이어 하기로 했다.

"우선 제 소개를 하자면, 솔레르티아 레세라투스라고 해요."

이제 막 스승으로부터 독립했다는 그녀는, 자신의 가게를 새로 차리기 위한 투자를 받기 위해 영주성으로 찾아갔다는 모양이다.

미리 만들어둔 스크롤들과 혹여 만드는 모습을 확인시켜 달라 할까 봐, 각종 시약까지 바리바리 챙겨 들고 호기롭게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정해진 절차를 지키라는 이야기.

"절차가 있다는 얘긴 못 들었단 말이에요! 스승님도 제 실력 정도면, 그냥 찾아만 가도 환영받을 거라 했는데···."

"그런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역시 가게 하나 말아먹고, 마탑으로 기어들어 온 양반 말을 믿는 게 아니었어요!"

부정하는 세르펜스의 말에, 솔레르티아가 분통을 터트렸다.

투자 신청서를 내고 나서도, 그녀의 신분이나 이것저것 확인 절차가 있었다.

그 때문에 서류가 세르펜스에게 도달하기까지 며칠의 시간이 걸리나, 정작 그가 프라시더스령에 머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으니.

이번 기회를 놓치면 꼬박 한 달을 기다리거나, 수도까지 찾아가 다시 절차를 밟고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가게를 차리고 싶다는 욕망에 눈이 먼 솔레르티아는 제3의 선택을 했다.

"소문에 의하면, 프라시더스 공작은 호구스러울 정도로 착하다고 들었는데···."

실력에 자신도 있고, 호구···. 아니, 관대하기로 유명한 프라시더스 공작이었으니.

사정하면 만나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성문 앞에서 죽치고 있어 봤다 한다.

"다 거짓말이었어요···! 이번 주에는 성에서 머무신다는 걸 다 듣고 왔는데! 게다가 공작가의 마차가 들어가는 모습도 봤는데! 자리를 비웠다니, 말도 안 되는 변명이잖아요?"

솔레르티아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며, 울분을 터트렸다.

나는 슬쩍 '호구스러운' 프라시더스 공작을 바라보았다. 후드에 가려지지 않은 입매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은은한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혹시 시온씨라도 저와 함께 찾아가서, 이 스크롤들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 얘기해주신다면···. 아~, 그래도 안 믿으시겠죠! 망가진 스크롤을 보고 투자 신청을 받아주시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하다못해 프라시더스 공작님도 시온씨처럼 스크롤을 독해하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가 테이블 위에 머리를 '쿵-'하고 떨궜다.

솔레르티아가 저렇게까지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마법사도 아닌 사람이 스크롤에 그려진 마법진들만 보고 그것을 해석해 내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닌가 보다.

'대체 세르펜스, 이 녀석은 왜 그런 것까지 익혀 둔 거지?'

성검의 주인이 되고 나면, 동료 없이 혼자 다 해 먹을 생각이었나···.

"으음···. 괜찮으시다면 다른 것들도 볼 수 있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어차피 다 폐기해야 할 거···. 아, 찢지는 마세요! 폭발할 수도 있으니까."

"주의하겠습니다."

종이에서 마법이 나가는 세상인데, 종이가 폭발하는 것쯤이야.

그래도 스크롤이 어떻게 생겨 먹은 건지 궁금하긴 했으니. 스크롤을 받아 든 세르펜스의 등 뒤로 돌아가, 어깨너머로 슬쩍 그 내용을 엿봤다.

시온의 기억을 뒤져봐도 해석할 수 없는 마법 문자가 깨알 같은 크기로 빼곡히 적혀있고, 알아볼 수 없는 원과 선이 잔뜩 그려져 있다.

"이런 걸 즉석에서 그릴 생각이셨다고요!? 한참 걸릴 것 같은데요?"

"좀 간단한 것들도 있어요. 아니면 며칠 머물면서 제작해도 되고···."

내 질문에 솔레르티아가 망연자실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든 건지, 테이블에 뺨을 댄 채 늘어져 있던 그녀가 불현듯 고개를 번쩍 들어 나를 노려본다.

아까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 탓일까? 이마에 살짝 생채기가 났고, 그 주변부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대체 얼마나 세게 박은 거지?

"이제 어쩌실 건가요? 책임져주세요!"

"이제 어떡해야 하죠? 책임져주세요!"

솔레르티아가 나에게 책임을 요구했고, 나는 세르펜스에게 그것을 전가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싶은 시선으로 나를 잠시 응시했다.

"후우···. 어쩔 수 없으니, 책임지겠습니다."

"네?! 시온씨가요?"

세르펜스의 말에 솔레르티아가 '어떻게?'와 '네가 왜?'라는 의문이 가득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단, 이 스크롤들을 만든 것이 레세라투스씨가 맞는다는 증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이 가능하시다면, 보상은 물론 적당한 후원자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물론 그것이 불가능하더라도, 금전적인 피해 보상은 해드릴 테니 거절하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저, 정말···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솔레르티아의 이마에 세르펜스가 가볍게 손끝을 가져다 대었다.

이마의 생채기를 치료해주며, 자애로운 미소를 띠었다.

"네, 정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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