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회
6. 공작님과 황궁 연회 (1)
다음 날 아침. 황궁으로 가는 마차에 올라타니,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새삼 실감 났다.
"식사는 잘하셨습니까?"
"······."
세르펜스가 굉장히 묘한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 표정에 담긴 의미를 분석하고자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느닷없이 세르펜스가 품속에서 다이어리 같아 보이는 것을 꺼내 건넸다. 그것도 세 권이나.
'뭐지? 세르펜스 관찰 일기라도 쓰라는 건가?'
그것을 받아들고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자, 세르펜스가 펼쳐보라는 듯 턱짓했다.
시키는 대로 그 안의 내용을 보니···.
"어?! 이거 소설책 아닙니까?"
자문회에 처음 참가하던 날, 어느 천재적인 보좌관이 메모하는 척 읽던 것과 비슷한 종류다.
"제, 제가 이걸 갖고 싶어 하는 걸 어찌 아시고···!"
생각도 못 했던 선물에 감동의 물결이 밀려 들어온다.
아무리 자문회가 흥미진진해도 처음 한 시간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하품을 참는 것만으로도 곤욕을 치를 정도였으니.
하지만 이제 그것은 옛말이 되었다!
"오늘 자문회에는 폐하께서 직접 참여하십니다."
"네?"
황제가 자문회에 참석하는 것과 이 선물이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황제에 대해서는, 아들을 무척 아낀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게 없었다.
[성검의 주인] 극 초반에 휴마누스가 성검의 선택을 받고 떠나기 전과 암흑가와 세르펜스의 일로 잠깐 돌아왔을 때 등장한 것이 전부인 엑스트라 격 인물이다.
'그 뒤, 제국의 패망과 함께 사망해 버렸으니.'
뒤늦게 휴마누스가 황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그렇게 그는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 나라와 백성. 그 모든 것을 잃었다.
'그때, 휴마누스가 작중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눈물을 흘렸던가.'
밝고 유쾌한 모습으로 일행들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이전과 다름없었지만, 밤이면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과 후회와 무력함에 발버둥 쳤다.
『
휴마누스는 자신이 얼마나 미숙한 존재인지 깨달았다.
자신의 친우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있었다는 것을 자신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것을 눈치챘더라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자신을 알아봐 달라며 밀어붙이면서, 정작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굳게 걸어 닫힌 그의 마음에 홀로 서운해했다.
이기적이었던 과거의 자신이 어리석어 견딜 수가 없었다.
휴마누스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떠올리며 회한에 잠겼다.
만약 세르펜스를 죽였더라면, 그래서 그가 악마숭배자들에게 힘을 보태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제국이 버텨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친우에 대한 미련을 끊어내지 못하여, 그의 목숨 또한 끊어내지 못한 자신의 유약(幼弱)함에 통탄했다.
그렇게 휴마누스는 모든 것을 잃고 오열했다.
하지만 아무리 지난날을 후회한들, 과거는 되돌릴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검을 휘두르는 것뿐이다.
그렇게 휴마누스는 검을 휘두르고,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과거의 잔영(殘影)을 베어낸다. 한 명이라도 더 구해낼 수 있도록.
친우의 환영(幻影)을 베어낸다. 조금이라도 더 강해질 수 있도록.
자신의 망령(亡靈)을 베어낸다. 그저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도록.
』
어쩌면 휴마누스가 최후의 순간까지 세르펜스의 본심을 듣고자 했던 것은.
그가 어째서 그런 행동 했는지 알게 된다면, 지난날의 후회를 조금이라도 메꿔보려 했던 것이 아닐까?
'아니면, 자신의 실수로 인해 벌어진 참극을 부정하고 싶었던 걸지도···.'
이 모든 일에 무언가 의미가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자신에게 더 나은 선택지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것이 최선이었노라 믿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과거의 인연과 추억들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린 휴마누스에게 남은 단 하나의 편린이 세르펜스 뿐이었기에.
그나마라도 어떻게든 붙들고 싶었을 뿐일지도.
'···그러고 보면 얘도 친구 사귀기에 참 서투네.'
어쨌든 그런 탓에 황제에 대해선 아는 게 별로 없지만, 시온의 기억에 따르면 꽤 성군이라는 모양이다.
신성 루멘 제국이 제정 분리 사회인지라 역대 황제와 교황의 알력다툼이 다소 있었지만, 당대는 적당히 균형을 잘 이루고 있다고 한다.
'하긴, 신이 직접 성검을 내리면서까지 재앙을 예고했는데. 다른 곳도 아닌 신성 제국에서 서로 치고받고 싸우면 신성 모독이지.'
그들은 악마들이 일으킬 재앙을 대비하기 위해, 힘을 합쳐 군대를 키우고 성전을 준비했다.
'악마 진영에 붙은 세르펜스에 의해, 제대로 써보기도 전에 각개격파돼서 그렇지.'
그러고 보면, 악마 숭배자들은 뭘 하느라 제국이 군대를 모으거나 말거나 손 놓고 있던 건가 하는 의문이 생길 법하다.
'그냥 무슨 머저리 집단처럼 보이려나?'
한두 해도 아니고, 성검이 주인을 선택하기까지 무려 25년이나 되는 세월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대체 뭘 하느라 마왕이든 뭐든 빨리 소환도 안 하고, 재앙을 대비할 시간을 주는 것인가.
'하지만 [성검의 주인]의 작가가 작성한 세계관에 따르자면···.'
이 땅은 '가나안'이라는 단일 대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물론 몇 개의 크고 작은 섬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논외로 치고.
가나안이 존재하는 이곳은 '중심계'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이곳을 중심으로 마계, 천계, 정령계가 공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안쪽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회전하는 정령계. 그 바깥으로 마계와 천계가 타원형 궤도로 회전한다.
문제는 이것이 같은 방향이 아닌, 서로의 궤도를 가로질러 가위자 모양을 이룬다는 데에 있다.
차원이 가까워질수록, 간섭력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
악마 숭배자들은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처럼 힘이 애매할 때 날뛰었다가는 토벌당하기 딱 좋았다.
'악마도 아직 소환 못 하지 않나?'
성검의 선택이 있고 나서 1년이 지난 후, 암흑가를 시작으로 악마가 등장했으니.
어쨌거나. 이번 시기는 악마 숭배자들에게 있어 천혜의 기회다.
마계와 천계가 일직선 위에 놓여, 천계가 마계에 의해 완벽하게 가려지게 되니. 마왕을 소환하기에 이보다 적기일 수 없었다.
'그렇기에 특히나 신중을 기하며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오늘은 각자의 영지에 대한 월례 보고와 함께 이번 달의 일정과 새로운 법안 등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니 괜히 졸다가 걸리지 말고, 얌전히 책이나 읽고 계십시오."
날 위해 준비한 게 아니라, 본인의 이미지를 위해 준비한 거였나보다.
"하지만 중요 안건이라거나, 메모해야 할 게···"
"그런 건 제가 알아서 다 정리할 테니, 리벨론 경은 그저 깨어있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세르펜스가 고개를 저으며 거듭 강조해서 말했다.
대체 얼마나 자문회가 지루하기에 저러는 거지? 아니면 나를 무시하는 건가.
개인적으로 후자에 중점을 주었으나, 막상 자문회가 시작하고 황제가 입을 연 순간.
나는 세르펜스의 현명함에 혀를 내두르며, 소설책을 꺼내 펼쳤다.
'저 정도면 그냥 자장가지!'
황제가 말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위원이고 보좌관들이고 벌써 지쳐 보인다.
그런데도, 이것저것 받아 적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을 보니 참···.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이라는데, 세르펜스의 머리가 좋으니 내 몸이 편하네!'
뚜껑도 열지 않은 만년필을 괜히 까딱거리며, 독서를 시작했다. 역시 판타지 세계라 그런가?
일반 문학도 판타지 소설 같아 흥미진진하다.
책은 생각보다 술술 읽혔다. 결국 3권을 모두 완독 후, 첫 번째 책을 절반 정도 다시 읽었을 즈음에야 회의가 끝났다.
세르펜스는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오늘 회의에 언급됐던 내용을 정리하여 수첩에 적기 시작했다.
조금의 막힘 없이 술술 잘도 써 내려간다.
"혹시 회의 내용을 통째로 다 외우신 겁니까?"
"으음···. 애석하게도 제가 그렇게까지 뛰어난 인물은 아닌지라."
"그럼 지금 적고 계신 건 뭔데요?"
"회의 중 적어 놓은 키워드를 기반으로 복기하여, 정리하는 겁니다."
그러며 덧붙이길, 회의 중에는 갑론을박이 심하고 다소 두서없이 진행되는 경향이 있어서 이편이 깔끔하다나?
완전 기억 능력까지는 아니더라도, 저 정도면 이미 과하다 못해 넘치는 천재성이다.
저런 괴랄하기 짝이 없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며, 자신을 부족하다고 말하다니.
어처구니가 하늘로 승천하여 온데간데도 없다.
"으···, 뒷골 땅겨."
갑자기 온몸에 따스한 기운이 감돌아 세르펜스를 보니, 역시 그가 신성력을 일으키고 있었다.
"···뭐 하십니까?"
"리벨론 경이 급격히 피로해 보이기에."
"댁─이 아니라, 공작님 때문이거든요?"
내가 입이 댓 발 나와서 투덜거리자, 그는 고개를 갸웃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내일 저녁에는 황궁에서 연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연회요?"
"예, 이 또한 월례 행사라 보시면 됩니다. 그런 거 좋아할 것 같은데?"
"바로 보셨습니다, 아주 좋아합니다!"
그럴 줄 알았다며, 세르펜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말 돌리기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금세 또 기분이 좋아지는 단순한 내가 싫어진다.
'그도 그럴 게 연회라 하면, 맛있는 음식들이 풀 코스로 갖춰진 뷔페 같은 거잖아?'
그것도 애피타이저부터 시작해서 디저트까지. 완전 풀코스로!
무한리필집 같은 곳이야 친구들이랑 많이 다녔지만,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 뷔페는 가끔 누나가 선심 쓰듯 데리고 가준 게 전부다.
평생 여자친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고등학생 때 잠깐 사귀었던 것이 전부.
학생 시절에, 일 인당 몇만 원이나 하는 금액을 한 끼에 쓰기란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나마도 누나가 집에서 빈둥거리다 불현듯 먹으러 가고는 싶은데, 씻고 치장하기 귀찮다는 이유로 날 데리고 간 거였지 아마···.'
5살 터울이라 그런지 괴롭히기도 많이 괴롭혔지만, 나름 귀여워해 주기도 많이 했다.
부모님이 맞벌이다 보니, 대부분 시간은 누나가 날 돌봐줬다.
그래서 그런가, 성격이나 사고방식 등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다들 보고 싶네.'
연회 얘기에 신이 났던 건 잠시뿐, 가족과 친구들을 떠올리니 다시 우울해진다.
그러다가도 급격히 기분이 나아지는 게···.
"···공작님?"
"갑자기 또 울적해 보이시기에."
자기 감정은 마주 보지도 못하는 주제에, 남의 감정 기복은 잘도 알아채고 신성력을 흘려 넣는다.
'아니, 쫌!'
기분이 나빴다가 좋아지기를 반복하니 무슨 조울증 환자라도 된 기분이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지?
"···이번엔 공작님 탓이 아니라,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런 겁니다."
"더 해드릴까요?"
"아뇨, 됐습니다!"
타의에 의해 감정이 강제로 변화되는 게, 조금 소름 돋는다.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몽롱해지거나 들뜨게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단지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평온하게 만들어주는 것뿐이나, 왠지 모르게 꺼려진다.
'부작용 없는 마약 같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즉효성 신경안정제?'
금단증세도 없고, 다치거나 우울한 게 아니라면 평상시에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지만. 아무리 좋은 약도 과하면 독이 된다.
이런 게 반복된다면, 우울증 환자가 신경안정제에 의존하듯.
별것 아닌 일에도 견디기 힘들어지고, 결국 그것에 의지하게 될 테다.
'···어라? 이거 생각할수록 굉장히 위험한 것 같은데?'
이것을 과연 부작용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
오히려 금단 증세가 없기에, 언제든 끊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더욱 빠져들게 되는 것 아닌가.
"공작님, 방금 그거 신성력만 있다면 다 할 수 있는 겁니까?"
"단순해 보이지만 나름 섬세한 작업인지라···. 신성력의 양보다는 기술적인 문제라, 가능한 자는 대륙에서도 열 명 내외뿐일 겁니다."
"그런 고급 기술을 너무 남발하시는 거 아닙니까?"
워낙에 숨 쉬듯 편안히 쓰기에, 그냥 신성력 고유의 성질인 줄 알았다. 그래서 그냥 불어넣기만 하면 되는 건 줄 알았는데, 대체 얼마나 자주 썼···으면?
'···잠깐, 그렇다는 건 설마?'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어떠한 생각을 떨쳐내려 애썼다. 뭔가 알면 안 되는 것을 알게 된 기분이다.
"더 해드립니까?"
"아뇨, 됐습니다!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다치거나, 제가 따로 부탁한 게 아니라면. 앞으로도 절대! 제게 신성력 불어넣지 마세요."
앞으로 세르펜스표 신경안정제와 피로회복제는 전면 사용 금지다.
"그건 어째서지?"
"당장 설명하기가···. 어쨌거나, 정 흑마력 여부를 확인하고 싶으시다면 적어도 제가 우울하지 않을 때. 그리고 물어보고 해주셨으면 합니다."
세르펜스는 의미를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