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22화 (22/925)

22회

6. 공작님과 황궁 연회 (3)

"···그럼 이상으로, 다들 연회를 즐겨주게나. 허허허."

지루하기 짝이 없는 황제의 개회사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박수가 점차 사그라들자, 그 소리를 메우듯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황제는 단상 위에 마련된 화려한 의자에 황후와 나란히 앉았다.

'황제의 매가리 없는 목소리를 생각하면···. 휴마누스의 힘찬 목소리는 어머니 쪽 유전이려나? 들어본 적은 없지만.'

황제 내외를 대신하여, 황태자인 휴마누스가 자신의 약혼녀인 레니에와 첫 춤을 추는 것으로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었다.

"프라시더스 공작님! 안녕하십니까!"

금방이라도 연미복이 터질 것만 같은,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사내가 세르펜스에게 아는 체를 해왔다.

자문회 상임위원인 케르투 프그누토 백작이다.

세례명이 없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시피, 프그누토 백작가는 대귀족치곤 드물게도 신성력을 보유하지 않은 가문이었다.

프그누토 백작가는 오래전, 전쟁을 통해 공을 세워 작위를 하사받은 케이스였다.

신성력을 타고나지 않았기에, 순수한 단련을 통해 오러를 깨닫고 연공을 통해 그것을 쌓아 올림으로써 무(武)를 이룩했다.

『오러는 신성력보다 더 패도 적인 힘이다.』

신성력을 응축시킨다 한들, 순수한 파괴력에서는 오러가 우위를 점한다.

그러다 보니 인간들끼리의 전쟁이라면, 보조적 측면을 배제하고 본다면 신성력보다는 아무래도 오러쪽이 더 유리했다.

'그래 봐야 메인 빌런이 악마와 그들의 숭배자들이니···.'

역시 이 세상에선 신성력이 짜세다.

신성력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타고난 한계가 명확하다는 것 정도일까?

만유인력이 신성력에도 작용하는 건지, 신성력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세월이 지나면 조금씩 늘어난다는 특징이 있었다.

'즉, 처음 타고난 질량. 신성력의 양이 많을수록 유리하다 이거지.'

개미 눈곱만하게 타고나면, 평생을 가도 개미에서 끝나는 거다.

물론 다른 능력들과 마찬가지로 깨달음 등을 통해 발전시킬 수는 있으나, 깨달음이 무슨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것도 아니니.

'이 동네 신은 편애가 너무 심한 거 아냐?'

그에 비해 오러는 천부적 소질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으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 때문에 신성력을 너무 애매하게 타고난 경우, 그것을 버리고 오러를 수련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오랜만입니다, 프그누토 백작. 저번 주에 아드님께서 혼례를 치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정말 정신없었지 뭡니까? 저도 이제 슬슬 물러날 때가 된 건가 싶기도 하고···."

"아닙니다, 백작께서 아직 이렇게 정정하신데 무슨 말씀입니까. 저도 자리에 참석하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일이 바빠서···."

세르펜스의 말 대로 프그누토 백작은 무척이나 정정하기 짝이 없었다.

머리에 약간의 새치가 눈에 띄긴 했지만, 연미복 너머로도 선명하게 꿈틀거리는 근육이 예사롭지가 않다.

당장이라도 웃통을 까고, '한 판 붙자!'를 외칠 것만 같은 비주얼이다.

"이해합니다! 뭐, 그래도 꼭 사과하고 싶으시다면 대련이라도 한 판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비주얼만 그런 게 아니었네?

이제 보니 처음부터 그런 목적으로 다가온 것 같다.

'프그누토'라는 성이 어째 익숙하다 했더니, 세르펜스에게 배틀 신청···이 아니라 자문회의 적극적인 참여를 제의했던 것도 바로 이자였다.

"예, 언제 한 번 공작저에 방문해 주십시오."

세르펜스가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럼 내일 당장이라도!"

"이번 달은 토벌 때문에 여러모로 일정이 몰려서···."

"아, 아아─! 확실히. 잠시 깜박했습니다."

토벌이라면, 볼타 산맥 건인가.

대부분의 마물들은 신성 결계가 쳐져 있는 볼타 산맥에 갇혀있다. 그 이유는 볼타 산맥 아래에 고여있는 마핵이 마물들을 계속 만들어내기 때문.

간혹 흑마법사들의 소행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거나, 마계로부터 소환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논외다.

처음부터 마핵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본래는 미약한 마기가 대륙 전역에 퍼져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어떤 미친 흑마법사가 그것을 모두 흡수하여 새로운 마왕이 되겠다면서 한데 모아 응축시켰다고 한다.

'그 때문에 대륙 전역에 자연 발생하던 마물들이 볼타 산맥에서만 생성된다는 설정이었지?'

대신에, 이전보다 강하고 지능도 높아지고 단결력까지 생겼다고 하니···.

결과적으로 잘 된 건지, 안 된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 흑마법사는 전대 성검의 주인에게 처단 당했다.

전대 성검의 주인은 성검의 힘으로 산맥 전역에 결계를 펼쳤고, 현재는 교단에서 그것을 관리하는 중이라 한다.

그래도 마물들이 자꾸 불어나다 보면 결계에 충격이 가해지기 때문에, 일정 주기로 결계 안으로 들어가 적당히 개체 수를 솎아내야 한다는데···.

그 일정이 이번 달 내에 있나 보다.

"그럼 다음 달 중에는 괜찮겠습니까?"

"일단 되어 봐야 알겠지만, 괜찮을 것 같습니다."

세르펜스가 오늘도 훌륭한 가식적인 미소로 대답했다.

아까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하지만 프그누토 백작은 그런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는지,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연회를 즐기러 자리를 옮겼다.

"그럼 다음 자문회에서 또 뵙겠습니다!"

2m가 훌쩍 넘는 거구의 프그누토 백작이 사라지자, 학자풍의 귀족들이 우르르 몰려와 세르펜스를 둘러쌌다.

밀고 들어오는 기세가 어찌나 드센지, 정신이 들고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르펜스와 떨어져 버렸다.

슬쩍 들어보니 이번에 발표된, '마법적 관점에서 본 신학의 해석'이란 논평 문에 대해 토론하는 것 같았다.

'···뭐라는 건지. 난 그냥 뷔페나 즐겨야지.'

이왕 이렇게 된 거, 배나 채워야겠다는 마음으로 접시에 여러 음식을 옮겨 담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저 멀리 휴마누스의 금붕어 머리카락 색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연갈색 머리를 높게 틀어 올린 영애와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런데 레니에는 금발 벽안이잖아?'

저건 다른 영애임이 분명했다.

연주가 바뀌고 약혼녀의 곁으로 돌아간 휴마누스를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맞이한다.

하지만 레니에의 긴 드레스 자락이 휴마누스의 발을 살짝 덮은 순간, 그가 크게 움찔하는 것이 보인다.

구두 굽으로 발등을 밟았나 보다.

그럼에도 휴마누스는 그 질투가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듯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혹시 질투심 유발 작전, 뭐 그런 건가?

'저러다 한 방에 훅가지···. 쯧쯧쯧.'

그래도 앞으로 후보가 네 명이나 더 생길 테지만. 있는 놈이 더 하다.

[성검의 주인]에서는 리에나가 첫째 부인이었는데···.

과연 레니에는 본처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그녀의 고난이 예상된다.

"시온 리벨론 경?"

위스키를 홀짝이며 레니에를 응원하고 있자니, 갑자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의아함에 뒤를 돌아보니, 자문회에서 종종 봤던 아르젠토 공작의 보좌관이었다.

"네, 무슨 일이십니까? 네루스 팔숨 경."

사실 보좌관의 이름까지 외우고 다닐 내가 아니다.

그러나 아까 마차에서 다른 보좌관들은 몰라도, 그의 이름 정도는 외워두는 게 좋을 거라고 세르펜스가 미리 알려주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자, 팔숨 경이 무척이나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리벨론 경도 저희와 함께 하는 게 어떻습니까?"

팔숨 경이 자신의 뒤쪽에 있는 무리를 가리켰다. 자문회에서 보았던 얼굴들이다.

'보좌관 모임 같은 건가···?'

그나저나 아까는 풀네임으로 불렀으면서, 이번에는 성만 부르는 것이. 내 반응을 보고 자신의 풀네임을 기억하는지 확인하려는 목적이었나 보다.

어물쩍거렸다면 텃세라도 부렸을 기세다. 세르펜스, 나이스 어시스트!

"반갑습니다, 프라시더스 공작님의 보좌관인 시온 리벨론이라합니다."

그들의 무리로 합류하자마자, 팔숨 경 같은 놈이 또 있을까 냅다 자기소개를 먼저 했다.

내가 먼저 자기소개로 시작을 끊으니, 그들도 자신이 누구의 보좌관인 누구인지 소개를 이어갔다.

일단 간단하게 성만 대충 외워두고, 나중에 세르펜스에게 보좌관 인명록 같은 건 없냐고 물어봐야겠다.

"그나저나 리벨론 경을 황궁에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심지어 그 프라시더스 공작님의 보좌관이라니···."

굉장히 아니꼽다는 말투다. 이 새낀 또 뭘까?

시온과 아는 사이인가 싶어, 기억을 뒤적거려봤지만 떠오르는 것이 전혀 없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눈을 끔벅거리며 바라보자, 방금 입을 열었던 성질 더러워 보이는 보좌관이 인상을 찌푸린다.

"하! 기억 안 나십니까? 디스콜루스 백작님의 보좌관 그룹 면접에서 뵀었잖습니까."

시온이 어디 한두 군데를 떨어졌어야지, 그때마다 같이 면접 본 사람 얼굴을 무슨 수로 일일이 기억하겠는가.

아까 본인을 디스콜루스 백작의 보좌관이라 소개했던 것을 생각하면, 나는 떨어지고 저는 붙었다는 얘긴데.

'지금 내가 공작가 보좌관이 되어 나타나니, 배알이 꼬여서 시비를 건 거라 보면 되나?'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다.

시온의 기억에 따르면 디스콜루스가는 중앙귀족이긴 해도, 크게 두드러진 장점이나 특징이 없는. 그저 그런 백작가였다는 것 같다.

물론 중앙도 진출 못 한 리벨론가문이 비빌 깜냥은 안되지만, 그래 봐야 세르펜스의 위세를 빌리면 내 입김이 더 세다.

'그런데도 남들 앞에서 시비를 걸다니···.'

대체 시온은 어떤 식으로 면접을 봤길래, 저런 놈도 붙은 면접에서 떨어진 것인지 모르겠다.

"죄송합니다. 그땐 그룹 면접 형식은 처음이다 보니, 제가 많이 긴장해서 말입니다. 다음번에는 반드시 기억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멘탈리타스 투스토르입니다."

"아, 죄송합니다. 사람이 많다 보니 모두를 기억하는 게 쉽지 않네요, 투스토르 준 남작."

너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지금 이 순간조차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뉘앙스의 말에 투스토르 경이···.

아니다, '-경' 호칭조차 아깝다. 투스토르가 부들부들 떨면서 억지 미소를 짓는다.

"이해합니다. 기억력이 나쁘면 그럴 수도 있죠, 리벨론 준 남작."

"어이쿠, 아까 낮에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오셔서 자작 위를 내리셨는데. 아직 그 소식은 받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투스토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부럽지? 그래, 부러울 테다. 내가 있는 이 자리가 막 자기 것 같고 그렇겠지.

그도 그럴 것이, 그룹 면접에서 떨어진 놈을 일일이 기억하는 놈이다. 남을 깔보면서 우월감을 느끼는 그런 부류임이 틀림없다.

'그러게 왜 먼저 시비를 걸어서 나까지 유치하게 만드냐?'

자기 보다 못나다고 생각했던 놈이 대단해져서 나타나 치사하게 굴고 있으니, 속이 아주 비비 꼬일 거다.

"작위 수여 축하드립니다, 리벨론 경. 아니지, 이제 자작님이라 불러드리는 게?"

"에이~ 왜 이러세요, 팔숨 자작님. 다 같은 보좌관들끼리···. 그냥 '경'이면 됐습니다."

나와 팔숨 경이 하하 허허 웃으며, 겸양 떠는 척하자 다른 보좌관들도 앞다퉈 내 작위 수여를 축하해주었다.

투스토르가 '먼저 준 남작 운운한 주제에···!'라고 중얼거렸으나 금세 다른 보좌관들의 목소리에 묻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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