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23화 (23/925)

23회

6. 공작님과 황궁 연회 (4)

그 뒤로 우리는 자신이 모시는 상관을 금칠하거나, 그에 호응하여 추켜세워주며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러는 동안 투르토스는 대화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버렸다.

"얼마 전 저희 백ㅈ···"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페라리우스 백작령에서 철광산이 하나 발견됐다고 들었습니다."

"소식이 벌써 그렇게 퍼졌습니까? 하하하, 덕분에 일거리가 부쩍 늘었지 뭡니까?"

일이 늘었다는 사람의 얼굴치고 무척이나 밝았다.

오히려 말이 끊긴 투르토스의 얼굴이, 프라시더스 령에서 서류의 산에 파묻혀 허덕이던 내 몰골과 엇비슷해 보였다.

"최근 프라시더스 공작님께서 스크롤 제작 사업에 뛰어드셨다던데···."

"그냥 투자입니다, 투자! 개업도 아직이고."

"하지만 아무래도 그쪽은 대부분 수입이거나, 마탑에 의존하는 게 대부분이니. 특히나 제대로 된 마법 스크롤은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렵다지 않습니까?"

마탑의 경우 안정적인 수익 창출을 위해 마법 시약이나 스크롤 등을 생산하고 있으나, 항상 한정된 수량만 판매된다.

물가 조절 목적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이는 대다수의 마법사가 지닌 특성의 문제다.

마법 자체를 학문적으로 파고들어 그 이치를 깨닫고, 본신의 능력을 키워나가거나.

이전에 없던 새로운 마법 물품을 만들어내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여 발전시키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에 비해 스크롤이나 마법 시약 제작의 경우는 초반에는 연구 과정이 동반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냥 단순 노가다란 말이지.'

그나마 시약 쪽은 재료만 정제해두면, 배합은 제자들에게 떠넘길 수라도 있었으나 스크롤은 얄짤없다.

그런 탓에 스크롤 제작 쪽으로 빠지는 경우는 괴짜거나, 마나 감응도가 떨어지거나, 급전이 필요할 때 정도다.

'후자의 두 가지는 프라이드가 없기 때문에 날림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아, 가끔 불발이 터지는 경우도 있다나?'

솔레르티아는 앞의 두 가지에 해당하였다. 괴짜이고, 마나 감응도가 떨어지는 경우.

선천적인 마나 감응도는 그리 좋지 못했지만, 다행히도 기존의 마법을 학문적으로 분석하고, 그것을 응용해서 스크롤에 마법을 부여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재능이야 세르펜스도 인정했으니 말할 것도 없다.

"저야 식견이 부족해 모르겠지만, 공작님의 말씀에 따르자면 상당히 유능하다는 것 같습니다."

"호오, 프라시더스 공작님께서 그렇게 말씀 하셨다면야···."

"저희 후작님께도 미리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주문은 언제부터 받는 겁니까?"

"일단 가게에 비치해놓을 여유 분량을 확보하고, 가게 위치도 물색해 봐야···."

본의 아니게 솔레르티아의 가게 터를 잡기도 전에 홍보해버린 꼴이 됐다.

이대로라면 가게가 열리기도 전에 수도 전체에 입소문이 퍼질 기세.

'인기 많은 품목은 하루 만에 동나는 거 아냐?'

혹시 모르니 미리 언질 줘야겠다.

숙소가 같은 건물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밤늦게 찾아가는 건 예의가 아닐 테고.

'내일 근무가 끝나고 저녁 식사 후, 찾아가는 게 좋으려나.'

핑거푸드 같은 간단한 것들을 집어먹으며 한참을 떠들다 보니, 한두 명씩 상관의 부름을 받고 자리를 떴다.

나 또한 세르펜스의 호출을 받고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특히, 투르토스에게 한 번 웃어주는 건 잊지 않았다.

"공작님께선 뭐라도 좀 드셨습니까?"

"···저는 저쪽 테라스에서 쉬고 있겠습니다."

내가 이 구역의 세르펜스어 마스터다.

'저 말은 필시 아직 먹지 않았으니, 알아서 가져오란 소리렷다?'

가만 보니, 먼저 불려 나간 보좌관들도 자신의 상관 취향에 맞게 음식을 부지런히 담아 옮기고 있었다.

다들 실컷 떠들었으니 연회장 가장자리에 준비된 테이블에 앉아,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하려는 모양이다.

'아직 세르펜스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으니, 대충 골고루 담아가 볼까···.'

세르펜스가 식사로 먹을 만한 것들 한 접시와 슬슬 배가 부른 내가 먹을 간식거리를 담은 접시를 양손에 챙겨 들었다.

아까 그가 가리켰던 테라스의 문 앞에 서서 그를 부르니,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누가 따라 들어올까 봐, 아예 걸어 잠갔나 보다.

문이 곧 열리고, 세르펜스가 접시를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음료'라 속삭이고는 바로 닫아버렸다.

'···이거 왠지 기시감이 드는데?'

이젠 음료까지 알아서 챙기는 세르펜스의 성장이 뿌듯하면서도, 심부름을 밥 먹듯 시켰던 누나의 모습이 떠올라 묘하게 찝찝했다.

'그래도 세르펜스는 월급이라도 주면서 시키는 거잖아?'

그런 식으로 자신을 안위했다.

와인과 위스키를 양손에 한 잔씩 들고 다시 문 앞에 선 뒤에야, 비로소 테라스에 들어설 수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테라스야?'

양쪽이 벽으로 막혀있고, 지붕까지 덮여 있다.

오직 정면만 난간 처리가 되어있어, 이름만 테라스지 그냥 하나의 작은 방과 다름없다.

땅에 붙어있다는 것 말고는 테라스의 요소를 하나도 갖추지 못했으니, 이곳은 테라스도, 발코니도, 베란다도 뭣도 아니었다.

'이야, 비밀 얘기나 뇌물 수수하기 딱 좋네!'

바깥을 경계하며 목소리만 낮추면 안에서 무슨 얘기 하는지 죽어도 모를 것 같다.

지금 세르펜스만 해도 바깥이 아니라, 연회장 쪽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약간의 분쟁이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무슨 일입니까?"

어느새 그의 몫으로 담아 준 접시를 다 비웠는지, 세르펜스가 내 접시 위의 쿠키를 집어가며 무심하게 말을 툭 던졌다.

"공작님 것도 갖다 드릴까요?"

"아뇨,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나는 그냥 입이 심심해서 집어먹는 것에 불과했다.

그냥 편하게 먹으라고 아예 세르펜스 쪽으로 접시를 밀어주니, 필요 없다던 사람은 이미 집에 갔나 보다.

내 앞에는 포크를 집어 들고, 조각 케이크를 잘라 입에 넣는 사람만 남아있다.

그래, 단 거 많이 먹고 세로토닌이나 많이 분비해라.

"이전에 무슨 백작가의 보좌관 면접을 같이 봤던 사람이 있었는데. 뭐, 별거 아니었습니다. 그냥 질투?"

"리벨론 경을 보고 있자면 친한 이들도 많지만, 적도 잘 만드는 것 같군."

"그 친한 사람엔 공작님도 끼어있겠죠?"

"···싫은 사람과 억지로 친하게 지내지는 않더라도, 너무 적대시하는 건 조심하는 게 좋습니다."

내 질문은 가볍게 씹혔지만, 굳이 대답을 안 한 건 긍정의 의미인가?

대답 대신에 한 말도 날 걱정해서 조언해주는 느낌이고···.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데, 걱정하는 게 아니라 괜히 쓸데없는 일로 제가 신경 쓰게 만들지 말라는 얘깁니다."

"걱정하는 거나, 신경 쓰이는 거나 그게 그거 아닙니까?"

"다릅니다. 주변 이목도 있으니, 입장 상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잖습니까."

세르펜스가 딱 잘라 부정했다.

확실히 보좌관인 내가 사고를 치면, 상관인 그의 입장도 곤란해질 테니.

그래도 일 생기면 뒷수습도 해준다는 소리잖아? 세르펜스가 뒷배경이면 세상 무서울 게 없다!

"무슨 일이든 덮어주겠다는 소리는 아니니, 조심 좀 하십시오."

"···혹시 생각도 읽으세요?"

세르펜스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요즘 들어 저 표정을 하루에 한 번 이상은 꼭 보는 것 같은데, 어째서일까.

"리벨론 경은 표정이 너무 잘 드러납니다. 앞으로는 그것도 고치는 게 좋을 겁니다."

"저라고 항상 그러는 건 아닌데요? 공작님 앞이니까 편하게 하는 거지."

"···상관에 대한 예우는 어디 간 겁니까?"

"그딴 건 공작령으로 내려가던 기차에 두고 내렸잖습니까. 벌써 잊으셨어요?"

"말 하나는 유수 같군."

"그러는 공작님도 슬슬 제게 편해지기 시작하신 거 아닙니까?"

그 말에 세르펜스가 주춤하는 듯하더니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조금도 편하지 않습니다."

"예? 왜요?"

"···생각을 솔직히 얘기한다거나, 표정을 만드는 것에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게 굉장히 낯설어서."

자신의 표정을 확인하려는 듯 손으로 입가를 매만지는 모습이 조금 안쓰럽다.

표정을 꾸며내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할 정도라니. 도대체 그는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거짓 속에서 살아온 걸까.

"···감사합니다?"

"당신의 지난 말들에 감화되었다거나, 그쪽을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닙니다."

노력해주는 것이 고마워서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세르펜스가 무슨 헛소리인가 싶은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그런데 노력해서 짓는다는 표정이 왜 다 저따위야?'

이거, 내 탓인가? 방금의 얘기를 들었으니 뭐라 할 수도 없다.

"저번에 말씀하셨던 세상의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책임감 따위가 아니라 진심으로 이 대륙을 구하고 싶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그렇다면 조금쯤은···."

세르펜스가 갑갑하다는 표정으로 크라바트와 셔츠 사이에 손가락을 넣고 잡아당겨, 약간의 틈을 만들어 낸다.

그러고는 힘겹게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다시 천천히 뱉어낸다.

"어디까지나 그것을 위한 협조일 뿐입니다."

그와 대화를 나누고 그에 대해서 알아 갈수록,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저런 생각 또한 어릴 적부터 주입된 사상이 밑받침된 것일지도 모르나. 그렇다 해도 저리도 선연한 초자아를 유지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세상을 원망해도 좋을 정도의 일을 당해놓고도?'

그러한 세상을 사랑하고 싶다고 말하는 듯하여, 그 모습이 무척이나 숭엄해 보인다.

이런 사람이 타인을 살해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얼마나 내몰렸기에 자신의 부모를 죽인 걸까. 그리고 전 보좌관을 죽인 것은 어째서지? 내가 예상했던 이유가 맞긴 한가?

것보다···

'오리지널 시온은 왜 죽인 거지?'

내가 모르는 다른 진실이 있는 것인지, 이 또한 나를 방심시키기 위한 그의 계략인 것인지 모르겠다.

미궁에 갇혀버린 것만 같다.

"공작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은 대충 알겠습니다. 뭔가 하고 싶어지는 말이 많지만, 일단은 접어두죠."

"···더는 할 말이 없다면, 이만 돌아가지."

세르펜스가 빈 접시들을 포개어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따라 일어나 연회장으로 통하는 문 앞에 선 그의 뒤쪽에서 얌전히 기다렸다.

"···안 나가세요?"

"리벨론 경은 이번 달 영지로 내려갈 때, 두고 내리셨던 예우의 절반은 반드시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회의감 어린 시선으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세르펜스가 문의 잠금장치 쪽을 턱짓했다.

"아···!"

내가 열어야 하는구나.

들어올 때는 세르펜스가 열고 잠그고 다 하여서 잠시 망각했다. 무안함에 멋쩍게 웃으며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활짝 열었다.

희미하게 흐르던 음악 소리가 다시 크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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