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회
8. 공작님 없는 공작저 (3)
지난 2년간 여기저기 면접을 보러 다녔던 시온의 기억을 기반으로, 애매한 부분은 드문드문 보이는 행인들에게 물어보았다.
그 덕분에 크게 헤매지 않고, 세미타 거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세미타 거리의 위치를 묻는 나를 몹시 수상하게 바라봤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나는 당당했다. 몰래 만나고 싶은 건 저쪽이지, 내가 아니다.
'오늘 만나서 하게 될 이야기 또한 세르펜스가 돌아오는 대로 자진 납세할 예정이고···.'
어차피 늦은 밤에 외출한 것을 한스가 보고하지 않을 리 없다.
괜히 어설프게 둘러대 봐야 의심만 산다.
'게다가 쪽지 그 어디에도 들키지 말고 몰래 나오라는 글은 없었잖아?'
상식적으로 너무 당연한 일이라 쓰지 않은 듯했지만, 그래도 안 쓴 놈이 잘못이다.
세미타 거리는 말이 거리지, 그냥 골목처럼 좁은 길을 따라 판자촌처럼 작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저 중 태반이 무허가 건물이고, 제대로 '번지수'가 붙은 것은 그사이에 띄엄띄엄 자리 잡고 있었다.
허가된 건물의 주인들만 시민으로 인정되어 수도 외곽으로 이사했고, 나머지는 노동력이 부족한 영지들에 우선하여 강제 이주당했다고 한다.
직접 와서 주욱 늘어진 집들의 수를 보아, 사실 재개발은 핑계고 귀족들의 영지민 늘리기가 주된 목적인 듯싶다.
희미한 랜턴의 불빛에 의지하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 탓인지, 걸을 때마다 '저벅- 저벅-'하는 내 발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처럼 으스스했다.
본래 귀신 따위 믿지 않았지만, 이곳이 판타지 세상임을 생각하면 못 믿을 것도 없다.
실제로도 흑마법사들이 사령을 부리거나, 마물화된 유령들이 난동을 부리는 장면이 [성검의 주인]에 등장하지 않았던가.
"···여긴가?"
골목이 꽤 복잡했지만, 허가된 건물과 아닌 것의 차이는 겉보기로도 뚜렷했기에 6번지 건물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시온의 낡은 회중시계를 꺼내어 시간을 확인해보니 11시 53분.
'딱 적절한 시간대에 도착했네.'
건물의 손잡이를 보니, 누군가 천을 덧대 여닫은 것 같은 흔적이 보였다.
일부러 닦아낸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깨끗했다.
'지난 1주일간 누군가 열심히 드나든 성과겠지?'
그래도 여전히 맨손으로 잡기에는 더러워 보였고, 손수건 따위를 챙길 내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발로 열 수밖에. 돌려서 여는 원형 문고리가 아니라, 누르면 되는 일자형이어서 다행이다.
한쪽 다리로 균형을 잡고, 발뒤꿈치로 손잡이를 누르면서 다리를 접듯 잡아당겼다.
오래 방치된 탓일까.
발을 떼자마자 손잡이가 '탁-!' 소리를 내며 튕겨 올라오며, 그 반동으로 인해 문에서 떨어져 날아가 버렸다.
'···어차피 폐가니까 안 물어내도 되겠지?'
그래도 일단 열리긴 했으니, 살짝 열린 문틈에 발을 밀어 넣어 문을 활짝 열었다.
"방금 그 소리는 뭐지?"
"더러운 문고리를 발로 열다 부숴 먹는 소리?"
"······."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향하니, 가면에 검은 후드까지 뒤집어쓴 채 온몸으로 수상함을 어필하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옆에 있는, 검은 천이 씌워진 네모난 무언가 위에 놓인 랜턴 덕분에 그 수상한 차림새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수상함이 최근 유행하는 패션 트랜드인 줄 알았겠네!'
저번 달 기차에서는 세르펜스가 후드 밑에 복면을 쓰더니, 이번에는 후드 밑 가면이라니.
어떻게든 정체를 숨기고 말겠다는 의지가 굳건해 보였다.
"어쨌든 나왔으니, 약속대로 이제 알려주시죠?"
"일단 문을 닫···. 안쪽으로 들어와라."
문은 내가 망가트렸으므로, 상대가 중간에 말을 바꿨다.
목소리나 체구로 봐서는 남자 같긴 한데, 저 정도로 꽁꽁 싸매고 있으니 본 목소리라는 보장은 없으려나.
"아시다시피 제가 조심성이 많아서 그런데, 여기서 하면 안 됩니까?"
상대가 혀를 찼다.
하지만 더는 가까이 오라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지난 일주일간 교환 편지를 나눈 보람이 있었다.
"너는 프라시더스 공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으음···."
···여기서 길고양이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대답한다면 미친놈 취급당하겠지?
"굳이 말하자면··· 유리 같은 사람?"
멘탈 내구도가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여린 쿠크다스로 비유하고 싶었지만, 이해를 못 할 것 같아 그냥 유리 같다고 답변했다.
어차피 성질은 같으니, 대강의 뜻은 통하겠지.
"하···. 너는 속고 있군. 그자는 네가 아는 것처럼 그렇게 투명하고 깨끗한 자가 아니다."
전혀 안 통했다.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네 전임자···. 누가 죽였는지 알고 싶지 않나?"
"···알고 있는 겁니까?"
아니, 세르펜스 이 녀석은 일 처리를 어떻게 하고 다녔기에 들킨 거지?
그리고 저 사람은 왜 그걸 알고 있는 걸까.
'혹시 전 보좌관의 유가족이나, 아니면 그들이 고용한 탐정 같은 건가?'
그렇다면 어째서 그 사실을 널리 퍼트리는 대신 나만 따로 불러냈을까?
이렇게 불러낸 것을 보니, 아예 묻어 둘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프라시더스 공작이 죽인 거다."
"혹시 증거도 가지고 있습니까?"
"···반응이 너무 침착한데?"
아차!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 그 이후의 처리를 생각하느라 나도 모르게 너무 냉정하게 굴었나 보다.
"그거야 당신이 보낸 글을 보면, 당신이 누구를 범인으로 지목하려 할지는 뻔하죠. 공작님의 비밀이니 진실이니 하다가, 갑자기 전 보좌관이 어쩌고 했는데. 안 그렇습니까? 그보다 그래서 증거는요?"
"그가 죽였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래, 세르펜스가 쉽게 증거 같은 것을 흘리고 다닐 인물은 아니지.'
가끔 나와 대화할 때 충동적으로 도망치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그 외에는 항상 계산적으로 행동하는 녀석이다.
"대신 정황상의 증거는 있지."
"정황상이라면···!"
좋았어! 어떻게든 잡아뗄 수 있겠다.
세르펜스의 평소 이미지라든가, 성검의 주인의 실질적 내정자나 다름없다는 세간의 인식을 이용한다면.
충분히 막아내고, 오히려 명예훼손죄로 역공을···.
'···완전 나쁜 놈인데, 이거?'
실행은 세르펜스가 하겠지만, 괜히 내 양심이 쑤셔온다.
아무튼 그렇게 된다면, 저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사회적으로 매장당하지 않을까 싶다.
저 사람도 그것을 알기에 증거를 가지고 직접 나서는 대신, 그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세르펜스의 보좌관인 나를 끌어들이기 위해 따로 불러낸 것 같다.
"그래, 많이 궁금하겠지."
나의 탄성을 다른 쪽으로 이해했는지, 그가 품속에서 서류 같은 것을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직접 가까이 다가와서 받아가라는 듯.
"···여기까지 던져주시면 안 됩니까? 제가 문에서 멀어지면 불안함에 과호흡 증세를 보이는 불치병이 있어서."
내 개소리에 상대가 '가지가지 하네···.'라고 중얼거리며, 서류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렇다고 내가 받을 수 있게 던진 것은 아니고, 서류는 내가 서 있는 위치보다 그에게 더 가까운 곳에 떨어졌다.
"어떻게든 제가 안쪽으로 들어가길 바라시나 봅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는 법이지."
"···먼저 날 불러낸 게 누군데, 뻔뻔하게."
내 도발에도 상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가면을 쓰고 입까지 다물고 있으니, 무슨 생각인지 도통 모르겠다. 이러면 괜히 청개구리 심보가 생겨나는데···.
"어차피 내용은 안 봐도 뻔한데, 지병을 감수하면서까지 들어가고 싶진 않은데요?"
"허세는 안 통한···"
"···암흑가. 맞죠?"
허를 찔렸는지, 상대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역시 이게 맞았나 보다.
[성검의 주인]이 연재 중일 때, 보좌관들이 죽은 원인을 놓고,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암흑가에 관련된 서류를 발견해버렸다'라고 추측했었다.
작가도 그에 대해 별다른 코멘트가 없었으니, 분명 이게 맞을 것이다.
"그, 그걸 어떻···. 아, 알고 있었나!"
"공작님의 보좌관인 제가 그런 일을 모를 리 없잖습니까?"
"···그렇다는 건 전임자가 암흑가에 마약을 유통하려 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겠군."
···아니, 그건 몰랐는데! 뭐지? 전 보좌관이 나쁜 놈이었나.
어쩌면 세르펜스가 그에게 뒤집어씌우고 죽인 걸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째서 그가 강도에게 당해 죽었다고 알려진 걸까.
"뭐지, 그 반응은? 혹시 몰랐던 건···."
"아뇨! 허탈해서입니다, 허탈해서! 이미 빤히 알고 있는 내용 때문에 이런 곳까지 나왔다니···."
"···다 알고 있었다니, 어설프게 조작된 정보는 필요 없겠군."
그가 서류를 주워서, 옆에 있던 상자에 올려져 있던 등불에 태워버렸다.
'방금 조작된 정보를 내민 거였냐?'
아마도 전 보좌관이 한 일을 세르펜스가 했다는 식으로 조작해 두었나 보다.
정보 조작이라니,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진다.
"고작 한 달 조금 넘은 자를 이렇게까지 신뢰할 줄이야···. 하지만 명심해라, 이유야 어찌 되었건 그자는 살인을 하고 그 사실을 숨겼다!"
"에이, 그건 아니죠! 어디까지나 정황 근거고, 그놈이 나쁜 놈이었잖아요? 어디서 원한을 사서 칼침 맞아 죽을 만한 짓을 했으니, 우리 공작님이 죽였다는 증거는 안되고. 그러니까 그쪽도 이렇게 뒤에서 이간질이나 하고 있는 거잖아요?"
"······."
"그리고 죽였으면 또 어떻습니까? 마약 유통이라니! 더 많은 사람이 죽고 고통받을 뻔한 것을 막은 건데 정의구현이죠! 아, 물론 우리 공작님이 죽였다는 증거는 없지만요."
그런데 저 자식은 어째서 조작된 정보를 들고 와서, 나와 세르펜스의 사이를 이간질하려 한 거지?
"정의구현이라···. 그래, 아무것도 모른 채 서류를 믿었으면 적어도 정의를 행한다는 마음으로 기꺼이 죽을 수도 있었을 텐데."
"네? 그건 또 무슨···."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지. 잘 들어라."
편지도 내가 쓴 답장 내용을 다 무시하고 자기 할 말만 쓰더니, 직접 만나도 다른 게 하나 없다.
"전 프라시더스 공작 부부를 살해한 것은 '우리'가 아니다."
"우리···? ···설마 당신은 악마 숭배자입니까?!"
어쩐지 정보 조작이란 말이 익숙하다 했다.
생각해보면 세르펜스를 무작정 적대할 만한 존재란, 악마 숭배 세력뿐이었다.
괜히 세르펜스의 진면목이 어떻고 하며 전 보좌관을 운운하기에, 그쪽으로 정신이 팔려 놓치고 있었다.
'알았으면 안 왔을 텐데!'
이거 저급 방어 스크롤 하나로 괜찮은 건지 모르겠다. 차라리 공격용을 받아올 걸 그랬나?
하지만 그건 실수로 사람이 죽을까 봐 무서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프라시더스 공작은 그 배후로 우리를 지목했지. 어때, 무언가 느껴지지 않아?"
"전혀 안 느껴집니다. 그게 그렇게 억울하셨으면 직접 나서 해명하셨어야죠?"
"그딴 게 가능할 리 없잖아!"
그건 그랬다.
사람들이 믿고 안 믿고는 둘째치고, 이게 웬 굴러들어온 호박이냐 하며 잡아다 족치겠지.
"하지만 이젠 상관없다. 대리자가 생겼으니."
"대리자라니, 그건 누구···?"
그가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아까 아무것도 몰랐다면 정의 구현이 어쩌고 하던 것과 연상 지어 보니,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너는 프라시더스 공작을 보좌하다 그의 위선을 깨닫게 된 거다."
세르펜스의 위선이라면, 보좌관이 되기 전부터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아무도 모르게 저질렀던 수많은 악행을 알아챈 것이다."
그것도 진즉에 알고 있었고.
"목숨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정의를 위해 그것을 폭로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지."
목숨의 위협을 느낀 것은 맞으나, 이제는 묻어두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그 자료는 우리 측에서 모두 준비해왔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자료보다, 저들이 내게 무슨 짓을 해서 그런 걸 강요할 생각인지가 더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