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회
9. 공작님과 사건 진술 (2)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어째서 무력이라고는 전무한 제가 그 상황에서 괜찮을 거라 생각하실 수 있는 겁니까?"
검 하나 제대로 못 드는 일반인이 흑마법사 둘을 상대한다고?
그런 방법이 있다면, 내가 다 알고 싶다.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처럼 모두 강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하, 하지만···, 실제로도 잘 대응하셨···."
"지금 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씀이 나오십니까?"
바닥에 질질 끌려다닌 탓에 생긴 상처들은 신성력에 의해 치료되었으나, 여기저기 찢기고 해진 옷은 완전 넝마가 되어버렸다.
직접 거울을 봐서 확인한 것은 아니나, 안 봐도 뻔했다.
거지꼴이 따로 없겠지.
"···그들이 흑마법으로 리벨론 경을 현혹하려던 때, 바로 나서려 했었습니다."
"그런데 왜···!"
"리벨론 경이 금세 태연해지시기에···."
"그게 가짜인 것을 알아차렸기에 망정이지! 제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아십니까?"
"···보통은 불가능합니다."
화가 치밀어올라, 쏘아붙이는 듯한 내 말투에 세르펜스는 기죽은 목소리로 나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경탄이 담긴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믿었다는 그 말. 진심이었어?'
아니, 현혹되지 말자.
저런 눈빛에 내가 속아 넘어가서는···.
"리벨론 경은 저와 달리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계시잖습니까."
그런 식으로 나를 치켜세워준들···.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기이한 통찰력도 가지고 계시고, 충격을 받아도 스스로 극복해내시는 모습들 때문에. 그래서 괜찮으실 거라 믿었습니다."
나에게 그런 통찰력 따위는 없었다.
세르펜스에 관한 것은 소설을 읽었기에 알 수 있었던 것뿐.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침착하게 정신을 되찾고, 그것이 허상임을 눈치채셨잖습니까. 한 발짝 더 나아가 악마 숭배자들의 목적을 파헤치고, 그 계획을 무산시켰으니···."
이번 마법을 간파해 낸 것은 내가 시온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오해할 만도 했나···?
"그들의 목적 정도야, 공작님께서도 얼마든지 파악하실 수 있잖습니까?"
"만약 제가 먼저 나섰더라면, 어디까지나 추측의 선에서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리벨론 경처럼 직접적인 반응을 통해, 확신을 얻어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어쩐지, 이제껏 그에게 보냈던 선의에 보답을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단순히 추켜세워주는 얘기를 해서가 아니라···.
"말을 할수록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분명···. 당신에게 기대했던 겁니다."
그가 나에게 기대어 오기 시작한 것 같아서다.
"당신이라면, 제가 나서는 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가 하는 말의 진의를 파악하고자, 그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세르펜스가 처량한 얼굴로 나를 마주 본다.
조금 전까지 모두 포기하고, 그냥 훌쩍 도망가버리자고 생각했던 탓일까?
그 눈빛이 마치 버려진 새끼 고양이 같아 보여서, 슬쩍 고개를 돌려 피해버렸다.
"제가 보아온 리벨론 경은 강한 사람이라···. 아니, 이조차 핑계로 들리겠죠. 당신은 제 무력이 강한 걸 알아도 절 걱정해 주셨는데, 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역시 저 같은 건···."
"자, 잠깐!"
또다시 세르펜스가 자기비하 모드에 들어갈 기세여서, 그의 말을 급격히 끊어냈다.
이래서야 제대로 화도 내지 못하겠다.
"하아─. 정말 위험한 순간이 오면 구해주려고 계속 지켜보신 것은 맞으시죠? 저를 의심했던 게 아니라, 반대로 믿으셔서 그런 거고요?"
긴 한숨을 토해내며 그에게 물었다.
세르펜스는 각 질문이 끝날 때마다, 울상이 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 어디에도 [성검의 주인]에서 읽었던, 최종 보스의 포스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잘 된 건가?'
눈매를 좁히며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니, 그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죄송···합니다.'라며 재차 사과했다.
"알겠습니다.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 드리죠."
이 이상 몰아붙이면 정말로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이라 어쩔 수 없었다.
시온의 몸에 빙의 된 지 아직 두 달도 채 안 됐다.
그런데 벌써부터 솔레르티아와 한스에 이어, 세르펜스까지 울려버림으로써 3관왕을 이뤄내고 싶진 않다.
'어차피 세르펜스의 신용을 얻어, 그가 악마 숭배 세력에 넘어가는 것을 막는 게 최우선 목표였으니···.'
잘 된 거겠지?
복잡한 심경으로 세르펜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 대답에 기뻐했다가, 멈칫하더니, 곧 시무룩해졌다.
'또 왜 저러지?'
오늘따라 그의 얼굴 근육들이 열일 하는 게, 그럴 리는 없지만 저러다 경련이라도 오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다.
"이번엔 뭐가 문젭니까?"
"사실···, 그자가 한 이야기 중에는···."
- 똑, 똑-.
누군가 응접실 문에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창가를 바라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세르펜스는 도망치듯,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언가 고해성사라도 하려는 것 같은 표정이었는데, 오늘도 끝은 도망이다.
'그래도 서두를 듣고 예상해보면···.'
부모님과 전 보좌관의 살해에 대해 말하려던 게 아닐까?
출정 나가기 전부터 그것에 관해 얘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기색이더니.
드디어 결단을 내렸나 보다.
"보좌관님은 안 나오십니까?"
"······."
나는 이 역사적인 순간이 될 수 있었던 이 상황에, 훼방을 둔 자를 노려보았다.
"흠, 흠···. 보좌관님도 그러고 있지 마시고, 어서 방으로 돌아가 씻고 옷부터 갈아입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한스가 괜히 헛기침하며 나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고 보니 세르펜스도 내게 거듭 사과했는데, 저 양반은 이대로 입 닦을 생각인가?
"집사님은 제게 뭔가 하실 말씀 없습니까?"
"그동안 오해해서···. 거, 미안했습니다."
'거'라는 한 글자가 들어갔을 뿐인데, 왜 이렇게 삐딱하게 들리지?
그에 대해 따지고 싶었으나, 늙은이의 치욕스럽다는 표정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냥 앞으로는 사람을 판단할 때 신중을 기하라는 일침만 날리고, 그를 지나쳤다.
* * *
머리를 말리느라 시간이 걸려, 결국 아침은 패스했다.
시온이 하필 곱슬머리라, 제대로 관리를 안 하면 머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뻗어버리는 탓이다.
마차에서는 아까 얘기의 연장이 아닌, 자문회에서 해야 할 이야기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전 보좌관 이야기는 기밀 사항인 암흑가와 연관되어 있었으므로, 그에 관한 이야기는 생략해야만 했다.
그래도 황제에게는 알려야 했기에, 회의 전 세르펜스가 서류를 올려보낼 예정이다.
'내가 그 장소에 불려 나간 이유도 꾸며내야 했으니···.'
세르펜스의 악행에 대해 떠벌릴까 봐, 입막음하러 갔다고 할 순 없잖아?
가족이 인질로 잡고 있다는 협박을 받았다는 것 정도로, 세르펜스와 입을 맞춰 놓았다.
그 외에도 자잘한 설정을 변경하였고, 그 과정에서 '약간의' 왜곡이 생겨버렸으나···.
'전반적인 사건의 개요와 결과는 같으니까, 별문제는 없겠지···?'
회의장에 도착했다.
사안이 사안이었던지라, 황제는 물론 휴마누스까지 자리에 참석해 있었다.
좌석들이 거의 메꿔질 즈음, 예의 흑마법사가 구속된 채 기사들에게 끌려 들어왔다.
가면으로 가려졌던 그 얼굴은 고작 내 또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대로도 괜찮은 겁니까? 폐하도 와 계시는데 혹시 마법이라도 쓴다면···."
망설임 없이, 다리를 다친 자신의 동료를 미끼로 삼아 도망가던 자다.
갑자기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덤비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어, 세르펜스에게 넌지시 질문했다.
"그 점이라면, 안심하셔도 됩니다."
마력 억제하는 구속구를 채워뒀으니,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세르펜스의 설명이다.
'여차하더라도 세르펜스가 있으니, 괜찮겠···지?'
또 멀뚱히 구경만 해봐라. 이번에야말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국으로 도망칠 테다.
"사건의 전말은···."
본격적으로 회의가 시작되었고, 세르펜스가 사건의 정황 보고를 시작했다.
이후 황제나 기타 위원들의 질문에 내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자문회에서 내가 발언권을 얻은 건 처음인가?
강의 시간에 PPT 발표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겠지?
발표하는데 좌석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교수님들이라 생각하니, 무진장 긴장된다.
"···그 덕분에, 토벌을 끝내고 결계 밖으로 나오자마자 연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도착해있던 편지의 내용에 따르자면···."
한스가 그에게 연락을 취하게 된 계기는, 첫 협박 편지를 받은 이후 평소와 달라진 내 언동을 한스가 눈치챘기 때문.
그것도 의심이 아닌, 걱정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으로 돌변해있었다.
'그렇다고, 한스가 나를 불신하여 주기적으로 방을 뒤졌다는 얘기는 할 수 없잖아?'
그러한 탓에 나와 그의 사이는 눈빛만으로 뜻이 통하는, 신뢰 깊은 동료지간으로 둔갑되었다.
순 거짓말이다.
원인이야 어찌 됐건, 결계 밖으로 나온 세르펜스는 도착해 있던 편지로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진실.
그리고 가솔들을 아끼는 훌륭한 가주인 세르펜스가 전투로 지친 몸을 이끌고, 바로 수도로 향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이어졌다.
'나는 붙잡힌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세미타 거리로 향했다는 설정이고···.'
한스와 세르펜스라면 내 상황을 눈치채서 반드시 구하러 와 줄 것이라 믿고, 행인들에게 길을 묻는 척 자신의 행선지를 알리는 재치를 보였다···고 세르펜스가 말했다.
'실은 한스가 이미 쪽지들을 훔쳐봤으므로, 그딴 재치는 필요 없었지만.'
그런 것까지는 우리 셋만 아는 비밀이었으므로, 영원히 알려지지 않을 예정이다.
어쨌든 세르펜스는 그 덕분에 세미타 거리에 늦지 않고 도착하여, 흑마법사에게 위협당하는 나를 무사히 구해낼 수 있었다는 줄거리였다.
"과연! 프라시더스 가문은 서로 간의 신의 또한 두텁구려!"
"역시 가주의 인품이 훌륭하니···."
서로를 향한 굳건한 믿음이 없었다면 성립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달리 말하면 개연성이 좀 떨어지는 얘긴데, 그걸 세르펜스의 대외 이미지로 메꿨다고 해야 하나?'
회의장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세르펜스의 인격을 깎아내리는 게 본래의 목적이었던 흑마법사는 발광하다가, 아예 기사에게 밟혀서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진행할 거면 저놈은 왜 벌써 데려다 놓은 거야?'
그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사건의 청취는 계속되었다.
"호오, 그것이 환영이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아챈 것이오?"
시온의 가족이 아닌, 나의 누나가 보였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냥 보니까 알겠더라, 따위의 근거 없는 말에도 세르펜스는 별말 없이 넘어가 주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듣기에는 개연성이 부족하다 느껴, 되려 의심을 받을 수 있다며 지적했다.
'흑마법사 둘은 미끼고, 나를 첩자로 심어두는 것이 진짜 목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나?'
이렇게 대놓고 말하며 덮어주려는 걸 봐서는, 정말로 날 믿어줄 생각인가보다.
그런 이유로, 내가 악마 숭배자들에게 되는대로 했던 '네가 우리 가족에 대해 뭘 알아'라는 말을 좀 더 구체화 시켜보는 게 어떠냐는 세르펜스의 제안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여, 함께 준비한 대사를 읊었다.
"그것은 그들의 정보 부족 덕분이었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는 신 룩스메아의 이름 아래, 악의에 굴복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로 존경하는 분을 드높이듯, 열정적으로 웅변하고 싶었다.
하나, 그러기엔 내 연기 실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만약 진짜였다면, 자신을 구해 달라는 시선 따위는 보이지 않으셨을 겁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자식에게 충의를 져 버리는 길을 선택하게 하느니, 차라리···."
대신 얼굴에 철판을 깔고, 뻔뻔함을 내세워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꽤 잘 먹혀들어갔다.
나의 대사가 끝난 시점.
시온의 어머니는 정의에 앞장서며, 불의에 굴하지 않는 훌륭한 여장부가 되어 있었다.
자문회에 참여한 추기경과 주교들이 신 룩스메아를 찾으며, 그녀의 드높은 신앙심에 감동하였다.
황제는 그녀가 이번 사건의 숨은 공로자라며, 충성과 절의를 아는 그녀에게 여성의 명예 칭호인 '데임'을 내리겠노라 선언하였다.
'반응을 보아하니,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나 형 쪽으로 잡았더라면···. 수도로 불러들였을 기센데?'
정말이지 천만다행이다.
리벨론 백작가가 중앙 귀족이 되기라도 했다간, 자주 마주치게 되어 내가 몹시 곤란해진다.
"···이러한 대응을 통해, 리벨론 경은 그들의 계획을 모두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세운 계획은···"
다시 세르펜스의 보고가 이어졌다.
악마 숭배자들의 음모를 들은 모두가 그런 일은 벌어져서도 안 되는 일이라며 통탄했다.
동시에 앞으로는 그 누가 프라시더스 공작을 모함하려 해도, 결코 그 수작에 넘어가지 않을 거라며 입을 모아 주장했다.
'그 마음가짐, 부디 선택의 날 이후에도 잘 간직해주길···!'
세르펜스를 위협하려던 그들 계획 덕분에, 오히려 그의 입지가 탄탄해졌다.
이걸로 한시름 놓았다.
저기 묶여 있는 흑마법사의 재갈을 풀어 심문할 때.
혹여라도 그가 세르펜스의 부모님 일을 언급해도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겠지.
그 정도가 아니리라.
한 번 있었던 일은 두 번 생길 수도 있는 법.
'나중에 일이 잘못되어 암흑가에 대해 들통나더라도, 악마 숭배 세력의 날조로 몰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날 찢어 죽일 듯 노려보는 악마 숭배자 놈이 복덩이처럼 느껴질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