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회
9. 공작님과 사건 진술 (4)
"아뇨, 괜찮습니다! 공작님은 제가 옆에서 이래저래 챙겨드려야 해서···. 전하는 혼자서도 잘하시잖습니까?"
내가 손사래 치며 답하자, 휴마누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뿐일 거라며 킬킬댔다.
"저는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시온 경이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나중에라도 마음이 바뀐다면 얼마든지 환영이니, 그때가 되면 말만 해."
말로는 아쉽다고 하지만, 내 이유가 마음에 들었는지 표정은 싱글벙글했다.
- 똑, 똑, 똑.
그때 타이밍 좋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밖에 서 있던 시종이 세르펜스의 도착을 알렸다.
"아버지랑 대화는 잘 나눴어?"
"예. 그동안 제 보좌관을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경은 무슨, 그냥 같이 대화나 나눈 거지."
휴마누스가 씩 웃으며, 방에 들어온 세르펜스에게 앉으라는 듯 손짓을 했다.
"제의는 감사합니다. 하지만 급하게 돌아온 직후인지라, 아무래도 피곤하여···. 죄송스럽게도,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의범절의 표본과도 같은 완벽한 모습으로 세르펜스가 정중하게 거절했다.
"아차, 내가 그걸 깜박했네. 그래, 어서 들어가 봐. 시온 경도 나중에 또 보자."
"네, 오늘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한가하실 때, 공작저로 놀러와 주세요!"
"푸하핫! 그걸 자네가 말하나?"
"공작님도 껴서 셋이 놀면 되는 거 아닙니까?"
슬쩍 세르펜스를 보니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헛소리 말고 빨리 오라는 듯 나에게 손짓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배웅이라도 해줄까?"
"그러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우리는 휴마누스의 잘 가라는 인사를 뒤로하며, 황궁을 빠져나왔다.
"돌아가자마자 또 일하시려는 건 아니죠?"
방금 세르펜스가 쉰다고 말은 했지만, 말로만 그런 게 아닌가 의심이 들어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그에게 질문했다.
"아무래도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도 그러고 싶다는 뜻이다.
'그놈의 일 중독···.'
그가 덧붙여 말하길, 수면 부족과 그것을 보완해 줄 신성력 또한 많이 소모한 상태라나?
관자놀이를 짚는 모습이, 어지럼증까지 느끼는 듯했다.
"그렇게 힘드시면 공작저에 도착하실 때까지 눈 좀 붙이실래요? 제가 깨워드릴 테니."
"···아닙니다. 이런 상태에서 어중간하게 잠들면 그 후가 더 힘듭니다."
자다 깨서 비몽사몽 한 세르펜스라니···. 상상이 잘 안 간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세르펜스가 스스로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보통 사람은 이미 기절하고도 남았겠지.
'역시, 제아무리 세르펜스라도 마물이 득실거리는 결계 안을 들쑤시고 다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의 신성력이 강대하다 할지라도, 결국 정해진 총량은 존재할 거다.
"마물들이 많긴 했나 봅니다? 공작님의 신성력이 바닥 날 정도면···."
"그렇기도 했지만, 그게 직접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볼타 산맥 근처에는 기차역이 없다고 한다.
한참을 이동해야 나오는 역조차 수도로 직행하지 않고, 빙 둘러서 오느라 시간이 꽤 걸린다나?
차라리 말을 타고, 직선으로 이동하는 것이 가장 빠르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리고 시간 단축을 위해, 달리는 말에게 신성력을 쏟아부어 온갖 버프로 도배했다는 식의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얘 진짜 피곤하긴 하구나···.'
내게 설명을 해주기 위함이라기보다, 자신이 잠들지 않으려고 떠든다는 느낌이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쉴 새 없이 말을 몰았기에, 본래라면 내일 오후쯤에나 도착해야 했던 그가 나보다도 일찍 세미타 거리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째 나보다 말이랑 세르펜스가 더 고생한 거 아냐?'
오늘 새벽 그에게 화를 냈던 게, 괜히 미안해졌다.
"업무는 본래 예정대로 내일부터 재개할 테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쉬셔도 좋습니다."
세르펜스는 공작저에 도착하자마자 그 말만을 남기고, 저택 안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다음날.
집무실에 출근하자마자, 세르펜스는 내게 어제 사용한 스크롤 가격을 경비로 처리했다는 말과 함께 해당 금액인 120만 아스를 건넸다.
'안 그래도 얘기하려 했는데, 알아서 처리해주니 잘됐네.'
거기에 더해, 이제는 넝마가 되어버린 옷에 대한 보상도 해주겠다며 재단사를 불러 내 체형을 받아가게 하였다.
이번에 공작령에 내려갔다 올라오면, 옷도 도착해 있을 거라 했다.
'이야, 역시 공작가라 그런지 업무상 발생한 피해 보상은 확실히 해주는구나!'
복지가 매우 훌륭했다.
괜히 프라시더스 공작가가 꿈의 직장이라 불리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그래도 이게 끝인 줄 알았지.'
퇴근 후, 솔레르티아가 찾아와 웬 마법 스크롤 두 장을 쑥 내밀기 전에는.
"이게 뭡니까?"
"최상급 방어마법이 새겨진 스크롤이에요. 공작님께서 전해달라 하셨어요."
아무래도 세르펜스는 어제 그렇게 사과하고도, 아직 내게 미안함이 남았던 모양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엄청 위험한 일이 있었다면서요? 괜찮아요?"
자세한 이야기는 민간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미타 거리의 화재도 있었기에 큰 사건이었음을 짐작한 모양이다.
"아, 네. 공작님께서 제때 구하러 와주셔서···."
"이럴 줄 알았으면 저급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챙겨주는 거였는데···."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래도요···. 앞으로 이런 일이 있으시다면 외상도 괜찮으니, 얼마든지 얘기해 주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 두 손을 꼬옥 맞잡고 눈을 촉촉하게 빛냈다.
그 친절하고 상냥한 마음에 나는 깊이 감동했다.
그리고 훗날.
서류를 통해 그녀가 최상급 스크롤 비용은 물론, 내게 깎아주었던 40만 아스까지 공작가로부터 추가로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그것은 나중의 이야기다.
* * *
또다시 자문회다.
오래 자리를 비웠던 세르펜스가 돌아왔지만, 또다시 공작령에 다녀오기 위해 자리를 비울 예정이었다.
어제 하루는 공작령에서 그랬던 것처럼, 일이 쏟아져서 눈코 뜰 새 없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오늘의 자문회는 세미타 거리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화재는 세미타 거리 대부분을 집어삼킨 이후, 출동한 황실 마법사들에 의해 진화되었다는 이야기를 이제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늦장을 부렸다기보다는 애초에 사람이 살지 않는 거리였고, 이른 새벽이었기에 제보가 늦어진 탓이다.
폐허 정도가 아니라 잿더미밖에 남지 않게 된 이 거리는, 만장일치로 얼마가 들어가던 당장 재개발에 착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왔다.
예산 문제로 10년 가까이 질질 끌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불행 중 다행으로 철거 비용은 줄였으니 다행인가?'
···라고 생각했으나, 생각지도 못한 다른 곳에서 비용이 발생했다.
세미타 거리가 불탄 것은 흑마법으로 생겨난 불길이 원인이었다. 거기에 더해 흑마법사 하나가 그 불길에 의해 죽어버렸으니.
'저주 같은 거 들리기 딱 좋을 정도의 찝찝함인데?'
실제로도 흑마력에 의한 침식이 있었기 때문에,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해당 구역 전체를 정화해야 했다.
"교단에서는 주교급 한 명과 일반 신관 다섯 명을 파견하여, 거리의 정화 작업을 진행하겠습니다."
딜루체스코 추기경이 룩스메아 교단의 입장을 대표하여 말했다.
이는 결코 무료 봉사를 하겠다는 아름다운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되었으니 황실은 돈을 내놓으란 소리다.
'그리고 비용은 신 룩스메아의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내는 기부금으로 포장되어 청구되겠지···.'
그 이후로 거리의 조성은 어떻게 할지, 누가 맡아서 일을 진행할지 등에 대해 토의가 빠르게 진행됐다.
손발이 아주 척척 맞는 게, 어째서 이걸 아직 방치하고 있었나 의문이 들 정도였다.
'여기 정말 그 자문회가 맞는 거지? 다른 나라 의회에 잘못 들어온 거 아니지? 응?'
결국 오늘 회의는 아무런 다툼 없이 서류 한 장 날아다니지 않고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정각이 돼서야 끝나던 평소와 달리 15분이나 일찍 종료되었다.
평소 때와 그 간극이 어찌나 큰지, 공작저에 돌아와 점심을 먹을 때까지도 얼떨떨할 정도다.
식사를 얼른 끝내고, 방만했던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내 몫의 서류도 착실히 챙겼다.
기차역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 타고나니, 새삼 시간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벌써 세르펜스와 터놓고 이야기하기로 한 지 한 달이나 지났나?'
비록 그중 2주는 세르펜스가 자리를 비웠기에 실질적으로는 2주 정도였지만···.
잠시 회상에 잠겨 그날을 떠올리니, 수상한 차림새로 창문을 넘어 들어오던 세르펜스의 모습도 함께 떠올랐다.
"공작님, 오늘 밤도 또 어디 나가실 겁니까?"
"으, 으음···."
오늘은 책을 읽는 대신 무릎 위에 올려놓고, 그것에 대고 서류에 서명하던 그의 손이 멈췄다.
"···오늘은 안 갑니다."
"그럼 내일?"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던 그가 평소보다도 조심스럽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뇨. 이번에는 시찰 대신···, 조금 다녀와야 할 곳이 있습니다."
"다녀올 곳이라면···. 혹시 그···? 거기 말씀이십니까?"
몸을 살짝 앞으로 숙이고, 목소리를 잔뜩 낮춰 '암흑가?'라고 덧붙이며 찔러보았다.
세르펜스가 움찔하더니 새치름한 눈빛으로 나를 흘겨본다.
'반응을 보니 역시 맞나 보네?'
암흑가에 대해서는 [성검의 주인]의 초반부에 언급됐던 터라, 기억이 조금 희미했지만 분명 수도 근방의 백작령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도로부터 기차로 50시간이나 걸리는 프라시더스 공작령에서 가기에는 너무 힘들지 않나?'
거리상으로 볼타 산맥보다 더 멀기 때문에, 말을 혹사해도 불가능할 것 같다.
그 때문에 수도에 있는 동안 밤에 몰래 다녀오고 있다고 예상했는데···.
'굳이 이런 시기에?'
무언가 이벤트의 향기가 났다.
아니라면 굳이 바쁜 공작령의 일정 중에 다녀오겠다 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시찰 대신이라면 더더욱.
'저번에는 함께 시찰을 돌았는데 이번은 패스한다?'
그렇다고 업무를 보는 것도 아니다.
티 나게 혼자 어디론가 사라지는 수상한 행동을 세르펜스가 일부러 할 리는 없었다.
이것은 필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혹시···. 같이 가고 싶으신 겁니까?"
"···네?"
"표정이 무척이나 호기심에 가득 차 보이시길래."
역시 본인 감정은 몰라도, 남의 눈치만은 기가 막히게 잘 알아채는 세르펜스답다.
그런데 말하는 것이 꼭···.
"만약 그렇다고 하면 데려가실 겁니까?"
"···레세라투스씨에게 받은 스크롤은 챙기셨습니까?"
"네, 일단 가져오긴 했는데···."
나로서는 그냥 해본 질문이었음에도, 세르펜스는 진지하게 받아들인 듯했다.
생각에 잠긴다 해도, 미미하게 미간을 좁히는 듯 마는 듯한 반응이 전부였던 그가 이번만은 드물게도 고민하는 티를 확연하게 드러냈다.
- 톡, 톡-.
펜을 든 손을 까딱거리니, 서류의 빈 여백에 점이 하나, 둘 생겨났다.
저렇게까지 고민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이제라도 그냥 됐다고 말할까?
"···그럼 그렇게 하죠. 그 대신, 가셔서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셔야 합니다."
마치, 내가 떼를 써서 부모님과 놀이공원에 놀러 온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말이다.
"그래도 됩니까? 당연히 거절하실 줄 알았는데?"
"···숨기지 않기로 했잖습니까."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세르펜스는 입을 열어 말했다.
곤란해지면 입을 꾹 다물고 딴짓하던 예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하지만 숨기는 게 많은 나로서는 무척이나 양심이 찔려왔다.
'···나도 언젠가는 그에게 털어놔야 하는 걸까?'
복잡한 심경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자, 그것을 오해했는지 세르펜스가 찔끔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번에 하다 만 대화는···. 기차에 오르면 이어 하겠습니다."
저번 하던 얘기라면 한스 때문에 끊겼던 그것이자, 세르펜스가 내 방 창문 너머로 도망친 이유이기도 한 그의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겠지.
그대로 모르는 척 입을 다물 줄 알았는데, 정말 각오를 단단히 했나 보다.
"듣고 나서도 저를 계속 따르실지, 아니면···."
세르펜스가 말끝을 흐렸지만, 왠지 저 뒤의 생략된 말을 알 것 같았다.
'뭐야···? 얘 설마 나랑 휴마누스가 한 얘길 들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