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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회개해주세요!-46화 (46/925)

46회. 공작님과 엘프 (4)

'세르펜스도 그녀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겠지···.'

알았더라면 자료 같은 건 넘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평소처럼 천사인 양 행동하는 중이 아니었다. 게다가 사람을 홀리는 얼굴까지 가린 상태.

누군가가 자신에게 호감을 느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상상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그 증거로 세르펜스가 슬쩍 내 곁으로 다가와, 그녀에게 무슨 바람을 불어넣은 거냐고 따지고 있었다.

"전 아무 말도 안 하고 닥치고 있었습니다. 뭐, 도련님이 마음에 드나 보죠."

"···헛소리."

'방금 그 말, 설정 오류인데 괜찮은 건가요?'라고 묻고 싶을 정도로, 정말 내가 상관이었다면 훌륭한 하극상이 될 뻔했다.

'나조차도 세르펜스에게 헛소리하지 말라고는 안 했는데!'

어쨌거나 세르펜스가 자처해서 이중생활을 즐기고 있는 거라면 모를까, 착한 아이 콤플렉스 같은 게 원인이라면.

이 또한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언제까지 그가 자신을 숨기면서 살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 더더욱.

"마, 마음에 들어 한다니···!"

유지스가 부끄러운 기색을 보이며, 얼굴을 붉히고 몸을 배배 꼬았다.

마치 무언가 시동이 걸린 듯한 그 모습에, 불길한 기운이 올라왔다.

"누, 누가 저런 거칠고 무자비한 인간을···!"

"으악! 악! 와악-!"

급하게 양손을 휘적이며 그녀의 말을 막고자 소리를 질렀으나, 이미 늦은 것 같다.

갑작스러운 내 발작에 유지스가 화들짝 놀라 눈을 깜박였고, 세르펜스는 정신 사납게 휘적거리는 내 팔을 붙들었다.

'아, 망했어요···.'

세르펜스에게 그런 말은 금지어다.

그녀의 말이 진심인가 판단하기도 전에, 속으로 자기 비하에 들어갔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 아쉬운 사람이 누군데!'

상황 파악 못 하고 철벽을 치고 앉았다.

팔이 붙잡힌 상태만 아니라면, 이마라도 짚으며 한탄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지스의 연애 사업이 시작하기도 전에, 부도의 기미가 보이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얘 괜찮은 건가?'

내 팔을 잡은 세르펜스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개인적으로 명명한 '세르펜스 도주 전 증후군'의 증상 중 하나.

이대로 나를 두고 도망가지는 않겠지만, 언제 도주를 시도할지 모른다. 억지로라도 빨리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냥 저희는 암흑가에서, 위리디아씨는 밝은 곳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대륙을 지킵시다! 그럼 이만!"

"네?! 아, 아니 그게···!"

내 말이 끝나는 것을 신호로 유지스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마치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세르펜스가 나를 들고 뛰었다.

혹시 유지스가 우리를 쫓아오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가족과 연락도 끊겼고 해야 할 일도 생겼으니, 무리해서 따라붙어 반발을 사는 대신 나중을 기약하는 쪽을 택한 듯했다.

암흑가로 이어지는 동굴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세르펜스는 나를 바닥에 내려놓고 마법 스크롤을 찢어 빛의 구체를 공중에 띄웠다.

"···괜찮으신 겁니까?"

"······."

묵묵히 앞장서 걷는 세르펜스의 등을 바라보며, 슬그머니 물었으나 대답이 없다.

"죄, 죄송합니다."

"···어째서 당신이 사과하시는 겁니까."

"그녀도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을 겁니다. 아마도 그저 부끄러워서···."

내 말에 그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신뿐일 겁니다. 제가 당신을 떼어놓고 무슨 짓을 하고 왔는지 대충 짐작하고 계시잖습니까?"

"그야 알고는 있지만.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그 엘프의 말대로, 부모님의 말씀대로···. 제 본성은 결국 거칠고 무자비한 인간인 겁니다."

"잠깐, 도련님! 일단 좀 진정하시고···."

"방금도 사람을 해하고 왔는데, 그걸 알면서도 어떻게 평소와 다름없이 저를 대하실 수 있는 겁니까?"

이미 그가 누군가를 살해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그 또한 알고 있었다.

[성검의 주인]에서 그가 다른 누군가를 고문하고, 죽이는 것에 대한 묘사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게 신경 쓰일 리 없잖아···?'

자문회에서 귀족들과 신관들이 흑마법사를 두고, 서로 자기 측에서 고문하겠다며 언쟁하는 모습을 본 이후다.

'그렇다는 건 이 세상에선 그게 보통이라는 거잖아.'

하지만 그들이 세르펜스에게 바라는 모습은 고결하면서도 자애로운. 무결점한 선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자신의 기준으로 삼았다.

사람들이 그에게 바라는 모습을 충족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동시에, 대륙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좀먹는 자들을 '필요악'이라는 이름 아래 배제해야 한다는 사상을 뇌리에 주입 당했다.

'하지만 필요악이라는 건, 어쨌든 그게 '악'이라는 거잖아?'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을 '필요악'이라 규정하고 있는 만큼, 타인의 생명을 끊어내는 것이 '악'이라는 것을.

세르펜스는 그 누구보다 확실히 이해하고 있을 거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들의 생명을 거두면서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버린 자신을. 그조차 자신이 무자비한 인간이기 때문이라 여기는 게 아닐까.

그래서 유지스의 말에 덜컥 겁을 먹은 것 같다.

'하지만 그게 세르펜스만의 문제는 아니잖아?'

모두가 그를 대륙을 구원하고 이 땅의 존재들을 구제해야 할 구세주로. 그것이 아닌 다른 삶은 생각조차 할 수 없도록 내몰았다.

그는 혼자서 선과 악을 모두 감당하며, 그 모순 속에서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모순된 행동을 취하는 자신을 혐오하고 있다.

"당신은··· 제가 무섭지도 않습니까? 어째서 그렇게 태연하실 수 있는 겁니까? 직접 그 장면을 보지 못해, 상상조차 못 하시는 겁니까? 당신이 저에 대해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저는···!"

암흑가에 도착한 이후부터 누가 듣든 말든 계속 목소리를 바꿔내고 있던 세르펜스가, 그조차 잊고 본래의 목소리로 질문을 쏟아냈다.

"공작님, 정신 차리세요!"

익숙한 호칭으로 부르자 정신을 차렸는지, 그제야 질문이 멈췄다.

"공작님 말씀대로 실제로 그러한 장면을 본다면···. 네, 분명 겁먹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건 잔인한 장면을 봤기 때문이지, 공작님이 두려워서는 절대 아닙니다."

"······."

"혹시 그런 상황이 와서, 제가 당신을 피하게 된다면 그건 익숙하지 않아서 조금 놀란 것뿐일 테니. 상처받지 마시고 제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머지않아 제가 다시 다가가 드릴 테니."

"···거짓말."

"참말입니다. 이렇게 소심하고 겁 많은 사람인 걸 알고 있는데···. 제가 어찌 공작님을 무서워하겠습니까?"

"······."

"저, 믿으시죠?"

그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내 후드를 살짝 젖혀 나의 표정을 살폈다.

"···호칭, 조심해 주십시오."

세르펜스가 괜스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그리 말하며, 후드를 다시 덮어씌웠다.

여전히 그의 얼굴은 파악할 수 없었지만, 쪽팔려 하는 게 분명했다.

내가 확신하는 이유는 내가 세르펜스에게 날 시험했느냐고 화낸 이후, 딱 저 상태였으니 알 수 있었다.

"도련님 때문이었잖아요?"

"···어서 돌아갑시다."

"왜요? 민망하고, 쑥스럽고, 쪽팔려서 그러십니까?"

내 깐족거림에 세르펜스가 홱 고개를 돌려 나를 슬쩍 노려보고, 다시 시선을 앞으로 옮겼다.

그의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그래, 네가 언제 쪽을 팔아는 봤겠냐? 이해한다.'

일 년이라도 더 산 내가 이해해 줘야지, 어쩌겠는가.

* * *

공작저로 돌아와 짐가방을 시종에게 맡긴 뒤, 밥부터 먹고 방으로 돌아왔다.

"···이게 다 뭐야?"

어째서인지 방 안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선물 상자 같은 것이 여럿 쌓여 있었다.

열어보니 옷과 구두 등이 들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돌아오면 도착해 있을 거라고 했던가."

망가진 옷은 한 벌인데 그 보상으로 온 것은 평상 근무 시 입을 만한 것으로 다섯 벌, 연회 때 입을 만한 연미복이 세 벌, 구두 세 켤레다.

아무래도 업무 중 손실 보상이라기보다, 평소의 감사 인사를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게 아닌가 싶다.

'잘 키운 세르펜스 하나, 열 휴마누스 안 부럽네!'

비싼 옷들이니만큼 먼저 잘 모셔 두고, 공작령에 다녀오느라 챙겼던 짐을 풀고 있으려니 솔레르티아가 찾아왔다.

"피곤하시겠지만, 잠깐 괜찮을까요?"

"피곤은요, 무슨! 괜찮습니다, 들어오세요."

아직 정리가 안 된 짐들을 가방째 침대에 올려 이불로 급히 덮어버리고, 그녀를 방 안으로 들였다.

"저 빈 상자들은 뭔가요?"

방에 들어오자마자 눈에 띄는 고급 상자들에, 솔레르티아가 자신의 목적도 잃고 의문을 표했다.

"저번에 옷이 망가져 버려서, 공작님께서 몇 벌 맞춰주셨거든요. 그 상자들입니다."

"그렇군요! 프라시더스 공작가의 복지가 좋다고는 들었지만, 정말 신경을 많이 써주시나 봐요."

"그게 다 제가 평소에 공작님께 잘해서 아니겠습니까?"

"시온씨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그런 거겠죠?"

내가 짐짓 너스레를 떨며 말하자, 솔레르티아가 깔깔 웃으며 농담조로 답했다.

"그나저나 오늘은 어쩐 일이십니까?"

"이제 슬슬 가게를 오픈해야 할 것 같아서 인사드리려고 왔어요."

"벌써요?!"

"벌써라뇨, 내부 공사가 끝난 지가 며칠 전인걸요? 하지만 가기 전에 말씀은 드리고 가야 할 것 같아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린 거랍니다!"

솔레르티아가 언제나처럼 쾌활하게 답했다.

같은 건물을 쓰고 있다고는 하나, 그녀가 스크롤 제작에 바빴기 때문에 좀처럼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간다니 괜히 아쉬워졌다.

"어머, 그 표정은 뭐예요? 가게에 안 오실 건가요?"

"네? 그야 필요한 스크롤이 있으면 사러 가기야 하겠지만···."

이번에 세르펜스가 사준 스크롤도 아직 쓰지 않은 상태다.

'웬만하면 쓸 일이 없을 것 같은데···.'

저번처럼 세르펜스가 장시간 자리를 비우는 게 아닌 이상, 위험도 없고 생기더라도 그가 알아서 처리해 주겠지.

'굳이 스크롤이 필요할 때가 온다면···.'

대륙에 악마들의 영향력이 강해질 즈음일 테니, 향후 1년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우리 나름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사무적 관계에 불과했나요?"

"···네?"

"저 수도에 친구라고는 시온씨뿐인 걸요. 정말 저 만나러 안 오실 거예요?"

솔레르티아가 서운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하고 내밀었다.

"···됐어요."

"네?"

"그렇게 평생 공작님만 챙기면서, 둘이서 오손도손 행복하게 사시던가요! 흥!"

완전히 토라진 듯, 그녀는 볼멘소리로 악담인지 덕담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고 방문을 '쾅-!'하고 닫으며 나가버렸다.

"아니, 이게 대체 뭔 상황이야···?"

개업식날 화분이라도 하나 사들고 가서 사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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