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회. 공작님과 취미 활동 (2)
이미 마차에 올라타 있던 세르펜스는 내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하아···."
"웬 한숨이십니까? 가셨던 일이 잘 안 풀리기라도 하신 겁니까?"
내 말에 세르펜스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며,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늘따라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죄다 해괴했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리벨론 경은 혹시 언쟁이 취미인 건가?"
"아뇨! 전 정말 모두와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 꿈인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나 봅니다."
"으음···."
방금까지 황제 궁에서 대화하고 있던 것 아니었나?
아무리 세르펜스라도 그곳에서 연회장 내부의 소리까지는 듣지 못했을 텐데···.
그러고 보니 귀족들이 한층 밝아진 얼굴로 쑥덕거리고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악마 숭배자 일로 불안한 마음을 덮기에 딱 좋은 가십거리였으니, 다들 여기저기서 떠들고 다닌 모양이다.
그리고 그것을 세르펜스가 주워들었겠지.
"저와 공작님의 명예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다 치고, 이번까지는 그냥 넘어가 주도록 하지."
내심 한소리 듣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은근히 무른 녀석이다.
"길 가다 칼에 찔리고 싶은 게 아니시라면, 이제부터는 진짜 조심하십시오."
"하지만 지켜주실 거죠?"
"···마음 같아서는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의 걱정스러운 말에 농담으로 받아치자, 세르펜스가 얄미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그 친근한 표현에 기뻐해야 할지, 과격한 내용에 걱정해야 할지 모르겠다.
"공작님에게 맞으면 저같이 연약한 사람은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적당히 힘 조절해서 때린 후, 신성력으로 바로 회복시킨다면 괜찮지 않을까?"
"절대 안 괜찮습니다!"
내 필사적 외침에 세르펜스가 유쾌하다는 듯, 작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농담이셨구나?"
"부디 제가 농담으로 끝낼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다음에 누군가와 승강이를 벌이게 된다면, 세르펜스에게 한 대 쥐어박힐 각오로 싸워야 할 것 같다.
'이전의 세르펜스라면 저런 내용의 농담은 하지도 않았겠지.'
오히려 그런 생각을 떠올린 자신을 혐오하며, 내게 미안해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가볍게, 아주 살살 한 대 맞는 것까지는 친구끼리 장난이라 생각하고 넘어가 줄 수 있다.
'알아서 힘 조절 해주겠···지?'
어쨌거나 암흑가에 다녀온 이후, 녀석은 이전보다 나에게.
그리고 그 이상으로 자기 자신을 향한 경계심을 조금씩 허물고 있는 듯 보인다.
이전보다 밝아진 모습으로 내게 가끔 농담을 건네기도 하고, 말투도 상당히 편해졌다.
'아마 마지막에 나눈 대화 덕분이겠지···.'
유지스의 삽질 때문에 한때는 어쩌나 했는데,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듯싶다.
* * *
연회에서 떠올렸던 이유를 들어, 행정과 회계 업무를 도울 사람을 더 뽑는 게 좋지 않겠냐는 내 제안을 세르펜스가 받아들였다.
"그러고 보니, 리벨론 경은 사람 보는 눈이···."
"모두 거짓말이었다고, 이미 탄로 난 거 아녔습니까?"
"······."
세상 뻔뻔한 내 태도에, 세르펜스가 '어째서 사람들이 당신과 싸우게 되는지 알 것 같습니다···.'라고 중얼거리며 구직 희망자들의 서류를 뒤적였다.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전부 제 탓 같잖습니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세르펜스가 매정하게 답했다. 농담이 참··· 늘었다.
'농담 맞겠지?'
마침 귀족 가문 몇 개가 증발해버린 터라, 인재 시장에는 실력 있는 경력자들이 다수 풀려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악마 숭배자와 연루된 귀족 가에서 일했던 자라는 낙인이 찍혔으니.
누구도 그들을 채용하려 하지 않았다.
'사실상, 거기서 경력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겠지.'
하지만 세르펜스는 그들 중에서 적당한 인물을 선별했다.
해당 귀족 가에서 일했던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졌기에 오히려 더 믿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세르펜스의 선량함과 자애로움을 칭송하였다.
그들이 보기에는 한순간에 실업자가 되어 살길이 막막해진 이들을 위해 손을 내밀어 준 것처럼 보일 테니, 그럴 만도 했다.
심지어 이번에 채용한 행정관 중 한 명은 감수성이 무척이나 뛰어난 자였는지, 첫 출근날 세르펜스를 보자마자 눈물부터 펑펑 쏟아냈다.
"흐어어엉, 공작님은 저와 제 가족의 평생 은인이십니다! 크흡···! 정말, 존경합니다!!"
눈물 콧물 다 흘리며 감읍하는 그의 모습이 그들 사이에선 퍽 감동적이었나 보다.
여기저기서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와중에, 자신의 손자를 인턴 형식으로 끼워 넣는 데 성공한 구베르노 행정관이 나를 보며 슬쩍 엄지를 치켜세웠다.
'당신 좋아하라고 제안한 거 아니거든?!'
하지만 저택 안에서 내 편이 늘어나는 것은 환영할 일이었기에, 나 또한 몰래 엄지를 세워 보였다.
그들의 눈물이 그치고 나서야 겨우 업무가 시작되었다.
예기치 않은 일로 다소 시간을 잡아먹기는 했으나,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경력자들이었다.
그것도 평생을 실업자로 지낼 뻔한 이들 말이다.
당연히 일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한창 타오를 시기인지라, 그들의 업무 수행 능력은 하늘을 뚫고 치솟을 기세였다.
안 그래도 진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일주일도 안 되어 서로 손발이 착착 맞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행정관들을 늘린 것이긴 하지만, 그들은 정말 세르펜스가 확인해야 할 최소한의 서류들만 남기고 몽땅 끝내버렸다.
물론 그들의 보고를 받고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했지만, 군더더기 하나 잡을 것 없이 완벽했다.
'처리해야 할 서류가 줄었다고 해서, 세르펜스의 일 처리 속도가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고···.'
세르펜스는 과장을 조금 보태 눈 깜빡할 사이에 남은 서류들을 처리해버리고, 부탁하지도 않은 내 업무까지 가져가 해결해버렸다.
그렇다. 지금 세르펜스는 유례없이 한가해져 버린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암흑가의 일은 당연히 밤에 몰래 다녀와야 했고.
노예 밀거래에 관한 건도, 어느 정도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기 전까지는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했다.
'애초에 그런 부류의 거래는 날이 어두워진 이후에나 이루어지겠지.'
일이 이렇게 되다 보니, 세르펜스의 낮 시간이 붕 뜬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으음."
세르펜스가 얼떨떨하다는 표정으로 눈앞의 차와 디저트들이 놓인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항상 집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하면서 마시던 차를 응접실에서 한가롭게 마시려니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다.
본래 세르펜스는 가끔 여유 시간이 생기면 기사들의 검술을 지도해 주거나, 병사들의 훈련을 지켜봐 주었다.
하지만 한가해진 세르펜스가 매일같이 기웃거리기 시작하니, 처음에는 감사해 하던 그들이 슬슬 부담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긴, 군대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데 장성급 장교가 허구한 날 지켜보러 온다면···.'
상상만 했는데 소름이 끼치고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몸과 정신이 어디 남아나질 않는다.
절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 이러고 있는 거다.
대외적으로 디저트를 즐기는 건 나 혼자라고 알려졌으니.
하나뿐인 포크를 세르펜스의 손에 쥐여주고, 나는 손으로 파운드케이크 조각을 집어 들며 질문했다.
"공작님은 취미 같은 거 없으십니까?"
"···딱히?"
"아니, 사람이 어떻게 취미도 없이 산답니까? 삶의 만족도를 올리는 데, 가장 좋은 것은 여가 활동입니다."
"으, 으음···."
"아! 마차에서 책을 자주 읽으시던데, 혹시 독서를 좋아하신다거나?"
"그건 취미라기보다는 지식과 소양을 쌓기 위해서일뿐."
어쩐지 어려워 보이는 책만 읽더라니, 좋아서 읽는 게 아닌 모양이다.
"게다가 요즘엔 검술도 벽에 막힌 듯한 느낌이라···."
그럴 만도 했다.
세르펜스가 제아무리 천재라도 혼자 성장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최소한 비슷한 급의 사람이 있어야 검을 맞부딪혀가며 성장을 하든 말든 하지.'
그가 적당한 상대를 찾지 못한 것은 꽤 오래되었을 터.
지금의 경지까지 올라간 것도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시작점이 월등히 뒤떨어졌던 휴마누스가 약 1년 만에 세르펜스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성검과 신의 시련을 극복하고 얻은 용사의 무구라는 장비빨도 한몫했지만, 그것이 결정타는 아니었다.
'생사를 오가는 싸움.'
세르펜스에겐 그런 경험이 없다.
자신보다 강한 적들을 상대로 아득바득 기어 올라온 휴마누스와 달리, 세르펜스는 줄곧 자신보다 월등히 떨어지는 이들만 상대해온 것이다.
'굳이 유사한 경험을 찾는다면, 그가 처음으로 검을 들었을 때 정도?'
그의 아버지로부터 대련을 가장한 폭력을 당했었다.
'···불쌍한 녀석.'
가슴 한쪽이 먹먹해져서 세르펜스를 바라보니, 그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화 도중 침묵하고, 갑자기 연민에 찬 시선을 보이니 이상하게 느껴질 만도 하다.
"공작님, 취미는 무언가 성취를 얻기 위해 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물론 취미를 통해 무언가 얻을 수 있다면 좋겠죠. 하지만 그냥···. 때로는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을 해보심이 어떻습니까?"
나의 말에 세르펜스가 어딘지 알듯 모를 얼굴을 했다.
그렇게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혼자서는 답을 찾을 수 없었는지 나에게 다시 질문했다.
"그렇다면 리벨론 경의 취미는 어떻게 되십니까?"
"아, 저는···."
"당신은?"
뭔가 말하려 하다가 말이 뚝 끊기자, 세르펜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컴퓨터로 온라인 게임을 하거나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판타지 소설을 읽는 거였는데, 이젠 저도 없어요.'
···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아마 이 얘기를 했어도 세르펜스는 방금처럼 고개를 갸우뚱했겠지.
"어, 없습니다."
"······."
세르펜스가 미간을 확 구겼다.
그 모습이 마치, '너도 없으면서 나한테 잘난 듯 떠들어댄 거냐?'라고 타박하는 것처럼 보였다.
"없으면 만들면 되죠, 만들면!"
기세 좋게 외치긴 했으나, 이거다 하고 떠오르는 게 없다.
당장 세르펜스가 한가해졌다지만, 자문회 참석이라던가 이것저것 할 일이 있으니 여행은 기각이다.
'뭔가 좋은 거 없으려나?'
기왕이면 세르펜스의 취미 활동까지 한꺼번에 충족시킬 수 있는 무언가가···.
- 똑, 똑, 똑.
들려온 노크 소리에 시계를 보니, 프그누토 백작이 찾아오기로 약속된 시간이었다.
저번 달 세르펜스에게 대련을 부탁했었으나, 바쁘다는 이유로 밀어뒀던 일이 이제야 성사된 것.
얼마 전 새로운 행정 인원을 등용한 덕분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을 거라 예상했는지 며칠 전 기별이 도착했다.
세르펜스가 들고 있던 포크를 내 앞에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근무시간 중이었으니, 취미에 대한 고민은 잠시 뒤로 미뤄두고 그를 따라나섰다.
'그러고 보니, 세르펜스가 검을 쓰는 모습은 처음 보는 건가···?'
개인 훈련은 새벽에 공작 전용의 연무장에서 혼자 했기 때문에 볼 수 없었다.
기사들을 봐줄 때도, 그들끼리 대련을 하거나 허공에 검술을 펼치는 모습을 보고 자세 교정이나 조언을 해주는 정도였다.
세르펜스에게 물으니,
"실력 차가 너무 극명하여, 벽에 가로막힌 게 아니고서는 비슷한 수준의 자를 상대하는 편이 성장에 더 유익합니다."
라는 답변을 들었다.
병사 훈련이야 뭐, 그냥 대열이나 전술에 대한 지도였기에 검을 빼 들 것도 없었다.
하지만 프그누토 백작은 편지에 '검술 대련'이라고 못 박아 놨으니, 드디어 세르펜스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결과는 뻔했지만, 세르펜스의 검술을 보는 것에 의의를 두니 몹시 흥미진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