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회. 공작님에 관한 비화들 (2)
출발 직전, 잭은 시종장에게 붙들려서 다시 공작저 안으로 되돌아갔다.
당장 해야 할 일이라 누구에게 바꿔달라 부탁할 시간조차 구하지 못했다.
'대신 나중에 이틀의 휴가를 준다니···. 잘 된 거겠지.'
비번일을 하루 반납한 대신 이틀간의 휴가를 얻었으니, 나름대로 보상이 됐으리라 생각한다.
같이 가지 못하게 되어 미안하다며 잭이 위치를 대략 설명해 주었지만, 사실 필요 없었다.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미리 약도를 준비해 놓았다.
"어떻게 하실래요?"
잭의 본가에 도착하여, 세르펜스에게 질문했다.
"어떻게 하다니?"
"같이 들어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먼저 상황을 보는 게···."
내 말에, 세르펜스가 슬쩍 후드를 들어 '그럴 거면 나를 왜 데리고 온 거냐?' 라는 표정을 내보였다.
"뜻은 이해했지만, 이왕이면 말로 해주지 않겠습니까?"
- 똑똑똑.
후드를 다시 덮어쓴 세르펜스가, 나를 무시하고 문을 두드렸다.
우리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바로 문이 열렸다.
"어서···. 뉘쇼?"
잭의 아버지, 웨인이 우리를 맞이하려다 흠칫 놀라며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
함께 올 줄 알았던 아들은 안 보이고, 후드를 눌러 쓴 정체불명의 사람과 처음 본 내가 서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제가 오늘 만나 뵙기로 한 시온 리벨론입니다. 잭은 오늘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오게 되었습니다."
"······."
문고리를 잡은 그의 손에 조금 힘이 풀렸다.
하지만 들어오라는 말 대신 세르펜스 쪽에 시선을 던지는 것으로 보아, 그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듯했다.
"일단 들어가죠. 저쪽은 신경 쓰지 마시고···."
내가 공작가 소속이라는 증표를 보여주며 그리 말하자, 비로소 웨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우리를 집 안으로 들였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웨인 말고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가족들은 미리 밖으로 내보낸 모양이다.
"그···. 저를 뵙고자 하셨다고요."
"네. 예전에 공작저에서 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있었던 일들에 대해 좀 묻고 싶습니다."
"······."
"정확히는 당시 사용인들의 반응이라든가, 전반적인 분위기. 아니면 현 공작님을 어찌 생각하시는지···. 뭐 그런 걸 알고 싶습니다. 혹시 집사님이 입막음하셨던 게 있다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 온 것도 협조를 받고 온 겁니다."
비록 자발적인 협조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협조는 협조였다.
"현 공작님의 보좌관이라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이런 걸 물으시는 이유는···?"
"언제까지고 과거에 매여있을 수는 없잖습니까."
"후우─. 그렇지요. 저도 그렇고···."
웨인이 잠시 말을 끊고 세르펜스 쪽을 흘끗 바라본다.
아무래도 눈치챈 것 같은데?
"자, 저쪽은 신경 쓰지 마시고···! 어서 말씀해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채근하자, 웨인이 한참 주저하는 듯 하더니 결국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그저 대륙을 짊어지게 될 분이시니, 조금 강하게 키우시려나 보다 했습니다."
"조오금~?!"
"···과하긴 했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도련님께서 워낙에 뛰어나시다 보니, 기대감이 커지게 되고. 결국 광기에 이르게 된 겁니다."
내 비꼬는 말투에 웨인이 말을 정정했다. 쓰게 웃는 그의 표정에서 죄책감이 느껴졌다.
그래,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도련님께서 도움을 갈구하는 표정을 보였을 때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돕겠거니 생각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만약 제가 나섰다가 당시의 공작님 눈 밖에 나게 된다면···. 그땐 잭도 아직 어렸고···."
"···공작님도 어리셨습니다."
"예, 맞습니다. 하지만···. 네.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잭이 21살이라 했었으니, 세르펜스와 고작 세 살 차이였다.
가장으로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가 이해는 갔지만,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는 잘 모르겠다.
"계속해보시죠."
"시간이 지나니, 도련님께서도 점차 달라지셨습니다. 많이··· 의젓해지셨다고 해야 할지."
"그보다는 포기한 거겠죠."
"네, 맞습니다. 그러셨을 겁니다. 그 누구도 그분을 도와드리지 않았으니···. 어쩌면 배신감을 느끼고 계셨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륙을 위해 노력하시는 모습을 보면. 역시, 성검의 주인이 되기 위해 태어나신 분은 다르구나···."
갑자기 논점이 어긋났다. 어째서 말이 저렇게 흘러간 걸까?
분명 고해성사로 시작했는데, 끝맺음이 이상했다.
"···공작님께서 성검의 주인이 될 조건에 가장 적합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한스도 그렇고, 어째서 당신까지 공작님이 그것만을 위해 태어났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말 그것만을 위해 태어난 셈이니···.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잠잠히 듣고 있는 듯 했던 세르펜스가 후드를 젖히며, 그렇게 말했다.
웨인은 놀라거나 허둥지둥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세르펜스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역시 눈치채고 있었나 보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아니. 저라도 그래서는 안됐던 거였는데···, 크흑!"
"···으음."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하는 웨인을 내려다보던 세르펜스가, 이젠 어떻게 해야 하냐는 듯 내 쪽을 바라봤다.
"잠시만요! 사과를 주고받는 와중에 끼어들어서 죄송하지만···. 저는 아까 그 이야기부터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과거 저택에서 일했던 이들이 세르펜스 앞에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 오늘의 목적이긴 했다.
그렇게 해서 세르펜스가 그것을 받아주든, 화를 내고 원망하든.
쌓아두었던 감정들을 표출하고, 털어내길 바랐을 뿐이다.
'하지만 저런 소리를 들었는데, 그냥 넘어갈 수 있을 리 없잖아!'
그가 자신이 성검의 선택을 받으리라 확신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그 정도가 아니지 않은가.
그것'만'을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공작님께서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강요당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작님에게는 공작님만의 삶이 있습니다. 대륙을 구하는 것은 그 삶을 지켜내기 위함인 것이지, 삶 그 자체의 목적이 그것일 수는 없습니다!"
"···리벨론 경?"
"그렇게 해서, 대륙을 구해낸 이후는요? 아니, 그 이전에 성검이 다른 사람을 선택한다면? 그땐 어쩌실 겁니까!"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세르펜스를 향해 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저 생각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지 않는 이상, 그가 더이상 나아가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악역을 자처하지는 않더라도, 결국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채 허탈감에 빠져버린다면···.
"리벨론 경, 진정하십시오."
"허, 허업─!"
세르펜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나를 달래려 했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웨인은 헛바람을 들이키며···.
세르펜스의 멱살을 잡고 있던 나를 떼어내었다.
그제야 내가 그의 멱살을 틀어쥐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으음···. 당신이 저에 관한 것이라면 모두 알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셨나 봅니다."
방금 멱살이 잡힌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차분함이다. 그렇게 말한 세르펜스는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지나가는 투로 입을 열었다.
"본래 저의··· 어머니께서는 신관이 되고 싶어 하셨다고 합니다."
"···네?"
"세간에는 신분 차를 극복한 사랑이라 알려져 있었지만, 공작저의 사람들은 그것이 아님을 모두 눈치챘을 겁니다."
"······."
세르펜스의 덤덤한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그의 어머니는 작은 시골 영지 출신의 귀족이었으나, 조상 중에 신성력 보유자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돌연변이 같은 것인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뛰어난 신성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한다.
그게 어느 정도냐 하면, 그 당시의 미혼 여성 중 가장 뛰어났다나?
여기서 그 당시라 함은 '성검이 나타났을 때'를 말했다.
[성검의 주인]에서 성검이 나타나는 날을 이렇게 표현했다.
『과거의 달이 저물고, 미래의 태양이 떠오르는 날.』
작가가 겉멋 들게 표현해놨지만, 쉽게 말해 1월 1일이다. 그리고 세르펜스의 생일은 분명 12월 25일이었으니···.
그 말인즉슨, '성검의 주인'을 목적으로 초스피드로 혼인하여 그를 낳았다는 얘기다.
'이런 거지 같은 시발검이 또?!'
신 룩스메아는 성검 지급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아니, 적어도 사람 나고 검이 나오든가 해야지! 검이 먼저 나오고, 사람이 나니까 이딴 일이 생기는 거잖아!
자기도 양심이 있다면 지금 당장 강림해야 했다.
강림해서 한스와 함께 세르펜스 앞에서 무릎 꿇고 앉아, 손 들고 벌서야 했다.
"표면적으로는 단란한 가정을 꾸며냈지만···."
철저한 비즈니스 부부라는 얘기였다.
"그리고 제게도···. 밖에서는 언제나 '세피'라는 애칭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때가 제게 다정하게 대해주시던 유일한···. 으음···."
"아, 이제 됐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했습니다···."
너무 아연해져서, 그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이게 뭐야···.'
소설 [성검의 주인]의 제목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알아버렸다.
그것은 성검에게 선택받아 성검의 주인이 되어, 시련을 극복해나가며 성장하는 휴마누스의 이야기였다.
동시에 성검의 주인이 되기 위해 태어나, 끊임없이 고통받다가 결국 추락해버린 세르펜스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괜찮으십니까···?"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세르펜스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대체 왜 공작님이 걱정하고 있는 겁니까?! 지금 위로받아야 하는 사람은 당신입니다!"
"아, 저는 괜찮습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그러니까, 그런 걸 당연하게···! 하아─."
크게 한숨을 토해냈다.
어느 때 보면 한없이 교활한데, 이럴 때 보면 이보다 미련할 수가 없다.
어쩐지 공작령에서 시찰 돌 때, '세피'라는 호칭에 극혐하는 표정을 짓더라니.
휴마누스가 불러대서라기보다, 부모가 부른 탓이었나보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해맑은 휴마누스가 그걸 따라부른 것이고···.'
이 세상에 직접 오고 나서야 알게 된 것들이 너무 많았다.
[성검의 주인]은 너무 많은 내용을 생략해버렸다.
오늘 들은 이야기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보좌관들을 세르펜스가 죽이게 된 이유라거나, 유지스의 일, 무기에 관한 이야기 등등···.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비화를 품고 있었다.
이 정도면 룩스메아 옆에, 작가도 불러서 벌 세워야 한다.
"···공작님, 애칭 하나 새로 지을까요?"
"예?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세르펜스가 '얘는 또 무슨 소리를 떠들어 대는 거지?'라고 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지 않았다.
그 대신, 어째서인지 살짝 난감하다는 듯 어색한 미소를 꾸며내었다.
"두, 두 분의 친근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입니다. 네, 다행입니다···."
나와 세르펜스가 워낙 심각한 분위기를 연출한 터라, 나설 자리를 잃은 집주인이 어색하게 말했다.
마음이 놓인다는 말과는 달리, 마치 하루살이를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힐끗거렸다.
'아, 어쩐지 아까부터 세르펜스가 존대만 쓰더라니···.'
잠시 웨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까먹어 버렸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세르펜스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용서를 해준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착잡한 얼굴로 쓰게 웃었고, 웨인 또한 용서까지는 바라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그 당시 한 명이라도, 보좌관님처럼 진심으로 나서는 분이 계셨더라면···. 아니, 아닙니다."
우리가 떠나기 직전, 웨인이 나를 향해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다 그만두었다.
아마 '누군가 먼저 나섰더라면, 다른 이들도 세르펜스를 도우려 했을 거다.' 뭐 그런 얘기겠지.
하지만 그조차 변명이라 생각했는지, 웨인은 조용히 우리를 배웅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