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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회개해주세요!-68화 (68/925)

68회. 공작님과 여행의 시작 (1)

내 정식 작위가 나오는 데 걸린 시간은 한 달이었으나, 위조 신분증이 발급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2주가 채 걸리지 않았다.

공작령에 내려갔다 오니,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위조는 아니다."

"···그렇겠죠. 제국 황실에서 정식으로 발급한 물건이니."

당연히 그 과정은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됐다.

덕분에 쓸데없는 서류 뺑뺑이가 없어서, 아이러니하게 더 빠른 결과물을 받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제국, 과연 이대로 괜찮은가?'

휴마누스가 황제가 되고 나면, 고쳐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 같다.

어쨌거나 한동안 세르펜스가 황실의 명을 받고 무언가를 조사 중이라고만 알려졌을 뿐, 그가 해외로 나가는 것은 기밀 사항이었다.

표면적으로 유지스는 잠깐 아르케 왕국에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 잠깐 돌아간다고 알려졌고.

세르펜스가 건넨 신분증을 받아 펼쳐보니, '시온 프리베론'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본명이랑 너무 비슷한 거 아닙니까?"

"아예 새로 지으면 당신이 못 외우거나, 실수할 것 같아서 그런 거다."

"···저를 너무 잘 아시는 것 아닙니까?"

그보다 저렇게 말했다는 것은, 위장 신분의 이름은 그가 직접 지었다는 얘긴가.

이렇게 되면 세르펜스의 가명도 궁금해졌다. 그가 스스로 지은 자신의 가명은 무엇일까?

"공작님 것은 어딨습니까? 보여주세요!"

혹시 내가 지어준 애칭을 쓰지 않았을까 기대하며 손을 내밀자, 그가 올려주지는 않고 그냥 슬쩍 꺼내 보여줬다.

"페르센트 라시더스? 기껏 애칭을 열 개도 넘게 지어드렸는데, 안 쓰시는 겁니까? 페르라던가, 센이라던가···. 어라?"

"전혀 관계없습니다. 그저 본래 이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범위 내에서 조정한 것뿐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당신이 말실수할까 봐."

"확실히, 어감이 비슷하긴 하네요. 세르펜스, 페르센트···. 세르펜스···."

언뜻 비슷한 듯하면서도, 직접 입에 담아보니 묘하게 악센트가 달랐다.

기존의 이름 발음이 둥글고 부드럽다면, 가명 쪽은 약간 거친 느낌?

그러면서도 '세르펜스'라 불러 놓고, 옆에서 '페르센트 아니었어?' 하고 물으면 네 귀가 잘못된 거라 우길 수 있을 정도로 흡사했다.

"제 이름을 너무 편하게 막 부르시는 것 아닙니까?"

"에이, 원래 이름은 남이 부르라고 있는 겁니다. 자기소개할 때 말고는 스스로 입에 담는 게 더 이상하죠."

"···혹시 혼자 있을 때, 내 이름도 막 부르고 그러나?"

한참 세르펜스의 이름을 중얼거리고 있으니, 그가 불만스러운 듯한 말투로 질문했다.

순간 '-도'라는 조사에 의문이 들었으나, 이내 그것이 유지스의 이름을 그대로 입 밖에 냈던 것을 말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속으로 지칭할 때는···? 뭐, 생각이야 제 마음이잖습니까."

할 말을 잃은 듯한 눈으로 세르펜스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 솔직했나?

"그렇다고 속으로도 일일이 프라시더스 공작님이라 부를 수야 없잖습니까? 그게 억울하시면 공작님도 저를 시온이라 부르시던가요."

"···어째서 당신이 그토록 예의가 없었는지 알 것 같군. 애초에 애칭 따위를 지어오는 녀석에게 존경심 같은 게 있을 리가."

"저희 관계는 존경보다는 우정과 의리 아닙니까?"

나의 뻔뻔하기까지 한 태도에, 오늘도 세르펜스가 혀를 내두르며 탄식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그걸 직접 말로 할 줄은 몰랐다.'라는 반응이었다.

원래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이러면서 차츰 익숙해지는 거다.

'오히려 지금 정도면 진도가 느린 편 아닌가?'

느려도 보통 느린 게 아니다. 그냥 평범하게 친구 사이가 되는 것뿐인데, 몇 달이나 걸릴 건 또 뭐란 말인가!

아무리 직장 상사와 부하 관계라 해도 그렇지.

나이도 비슷하고, 몇 달 동안이나 주 6일. 그것도 하루의 절반 가까이 붙어 다녔다.

어디 그뿐인가?

'나만큼 그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어딨다고!'

같이 맛있는 것도 먹고, 장난도 치고, 취미생활도 함께 즐겼다.

게다가 허심탄회하게 속에 있는 말도 털어놓을 수 있게 도와주고! 위로도 해주고!

"생각하다 보니 거 엄청 서운하네! 이 정도 했으면 공작이 아니라, 황제랑도 절친을 먹고도 남았을 겁니다!"

"저, 절친···?"

"절친한 친구요! 우리 정도 사이면, 어? 사석에서 이름도 좀 부르고! 그래도 되는 거 아닙니까?"

"···리벨론 경?"

"이거 봐요! 황태자 전하도 절 이름으로 부르시는데, 직속 상사라는 사람이! 예?"

돌연 내가 노발대발하며 그에게 몰아치자, 세르펜스가 눈에 띄게 당황해한다.

"제가 공작님께 들인 정성이 얼만데, 그깟 이름이 뭐라고···! 정말 섭섭합니다!"

"그게···, 으음."

"자, 어서 불러보시죠! 그리 길지도 않습니다. 고작 두 글자잖습니까?"

계속해서 머뭇거리는 그의 태도를 보아하니, 조금만 더 하면 넘어올 것 같았다.

한동안 시온 프리베론이란 가명을 써야 할 텐데 계속 리벨론 경이라 부를 거냐. 거리감이 느껴진다, 내가 공작님께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냐 등등···.

내가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으며 독촉하자, 그가 작은 목소리로 '시, 시온경···?'하고 얼떨떨해하며 답했다.

"경 빼고, 큰 목소리로 다시 한번!"

"시···, 시온?!"

"네, 아주 잘하셨습니다!"

비록 시온이 내 본명은 아니었지만, 몹시 뿌듯했다.

손에 간식이라도 들고 있었으면 그에게 상으로 주었을 텐데, 그게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쉬울 따름이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밝게 웃고 있으니, 반대급부적으로 세르펜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 자괴와 회한을 느끼는 표정이다.

"대체 이 무슨···."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 안 그렇습니까, 세르펜스? 이제야 좀 본격적으로 친해진 느낌입니다! 그렇죠, 세르펜스?"

"후우─. 그냥 공과 사만 구분해 주십시오."

"저는 공사 구분 없이, 이름으로 부르셔도 상관없습니다."

"···구분할 거다."

세르펜스가 드디어 포기하면 편하다는 인생의 진리를 깨달은 듯했다.

인생무상을 느끼는 듯 어딘가 멍한 표정으로 한숨을 토해냈다.

"이제 겨우 신분증만 건넸을 뿐인데, 벌써 지치는군···."

"맞다, 그 얘기 중이었죠?"

깜박 잊고 있었다는 내 반응에, 기도 안차다는 듯 세르펜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출발은 삼일 뒤. 그리고···."

"그리고?"

"리벨···, 시온?"

"넵!"

"···나가."

혼이 완전히 빠져나간 듯한 세르펜스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결국, 자세한 사항은 내일 설명하겠다며 나를 쫓아냈다.

처음으로 그에게 이름이 불리며 들은 소리가 축객령이 될 줄은 몰랐다.

* * *

신성 루멘 제국에서 바스툴 왕국으로 가는 방법은 멀리 빙 둘러가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엘프들의 나라이자 나무들이 우거진 숲으로 이루어진 아르케 왕국을 지나가거나.

드워프들의 나라이자 험준한 산맥이 대부분인 테라룸 왕국을 통과하거나.

그냥 인간들의 나라 중 하나인 펠로 왕국을 경유하거나.

'어디로 가야 할지는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지 않나?'

아르케 왕국을 선택한다면 여러 협조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숲을 사랑하는 엘프들이 나무를 베어내고 철도를 깔았을 리 만무하다.

왕복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테라룸 왕국은 터널을 통과하는 기차가 있기야 했지만, 필연적으로 등반이 필요한 구간이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몇 날 며칠을 답답한 터널 속에서 보내고 싶지 않다.

'누가 원작이 양판소 아니랄까 봐, 종족 특성도 전형적이네!'

선택의 여지 없이, 펠로 왕국을 거쳐 가는 것으로 정해졌다.

그것은 반길만한 일이었다.

대자연에 대한 경외도 어디 하루 이틀이지, 기본적으로 인간은 유희를 탐하는 동물이다.

정적인 삶을 사는 엘프나 온 국민이 철을 두드려대는 드워프의 나라보다야, 역시 인간들의 국가가 구경거리도 먹거리도 많을 거다.

커다란 여행용 가방 안에, 옷가지들과 함께 관광 안내서를 잔뜩 챙겼다.

그리고 간단하게 메고 다닐 수 있는 슬링백 안에는 솔레르티아표 스크롤로 가득했다.

'혹시 모르니, 보호 스크롤 한 장 정도는 품속에 넣어둘까?'

무척이나 든든했다.

어차피 세르펜스에게 착 달라붙어 다닐 예정이니, 쓸모가 없을 것 같지만. 혹시 모르지 않는가?

전투라도 벌어진다면 세르펜스와 유지스가 싸우는 동안, 보호막 안에서 안전하게 기다려야지.

'얍삽한 감이 있긴 했지만, 세르펜스도 아직 실전은 이르다 말했고···.'

흘끗 옆을 바라보니 평소의 얇은 은테 안경 대신, 두꺼운 검정 뿔테 안경을 쓴 세르펜스의 모습이 보인다.

안경테 모양도 둥근 형태에서 사각으로 바뀌니 인상이 상당히 달라졌으나,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보다 거슬리는 건···.

"왜 하필 그 색이죠?"

"그렇게 안 어울립니까?"

기차를 기다리느라 플랫폼에 나와 있었기 때문에, 세르펜스가 순진한 척 연기하며 짙은 잿빛으로 물든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얼굴이 곧 개연성인데, 그 얼굴에 뭔들 안 어울리겠어?'

그런데도 내가 이렇게 불편해하는 이유는 하나다.

소설 [성검의 주인]에서 마왕의 마기에 물들었던 세르펜스의 머리카락이 딱 저 색이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이라면, 눈동자까지 검게 물들었던 원작의 세르펜스와 달리 현재의 세르펜스는···.

'아, 이거 헷갈리네! 편의상 원작에서의 세르펜스는 타락펜스라 불러야지.'

눈동자가 검게 물들었던 타락펜스와 달리, 현재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맑은 녹색을 띠고 있었다.

머리카락 색에 관해서는 장기간 정체를 숨겨야 하므로, 반영구 염색약을 사용했다나?

색을 빼는 전용 마법 시약이 따로 있어, 그것을 사용하거나 고위의 무효화 주문으로 해제 가능하다는 모양이다.

물론 세르펜스가 자체적으로 신성력을 이용해, 마력을 밀어내어 해제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편한 것을 놔두고, 그동안 세르펜스가 시간제를 사용한 이유는 역시 매물과 가격 문제겠지.

'비싼 반영구 염색약을 대량으로 매입하면 수상하잖아?'

몰래 구매한다 해도, 그것도 한두 번이지.

그에 비해 시간제는 가끔 기분 전환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많아, 매물도 많고 거래도 활발하고. 가격까지 저렴한 삼박자를 고루 갖춘 것이다.

'차라리 평소처럼 갈색 염색약을 사용했으면 좀 나았을 텐데.'

아무래도 유지스가 동행할 예정이다 보니, 호위 도련님 버전과 겹치는 것만은 피하고 싶은 모양이다.

사정은 잘 알겠지만, 괜히 뒤숭숭한 기분이 들었다.

무심코 잿빛의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세르펜스가 가볍게 고개를 털어 머리카락을 회수해갔다.

"치사하게···."

반사적으로 나온 말에, 세르펜스가 애써 웃으며 어딘가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 시선의 끝에는 긴 청록색 머리를 휘날리며 이쪽으로 걸어오는 엘프가 있었다.

두말할 것 없이 유지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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