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9화 (69/925)

69회. 공작님과 여행의 시작 (2)

긴 청록색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은, 소설 [성검의 주인]에 언급되었던 묘사 그대로였다.

'아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네.'

유지스는 민첩하게 움직이며 활을 쏠 수 있도록 활동성이 좋아 보이는 옷 위에, 최소한의 부분 갑옷을 덧대 입고 있었다. 등 뒤에는 기다란 활과 화살집도 걸려 있다.

거기다 허리춤에는 여차하면 근접전도 불사할 수 있도록 단검도 하나 매어져 있으니.

사실상 완전 무장상태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과하다는 건 아니고, 이 세계에서는 저게 보통이겠지. 이상적인 기동성 중시의 궁수 클래스의 복장이다.

'그에 비해 이쪽은 너무 빈약한가?'

빈약한 정도가 아니다. 평범한 여행용 의상에 검 하나만 덜렁 차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상당히 무력해 보였다.

나야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고, 세르펜스는 통이 큰 회색 로브로 체형이 가려진 상태.

'그러고 보면 평소에도 옷을 여러 겹 껴입어서 정확히 가늠하기가 힘들단 말이지···.'

공작령을 오가는 기차 안에서는 그나마 가볍게 입어서 다부진 체격일 거라 예상은 하지만, 가진바 무력을 생각하면 또 미묘하다.

옷 입으면 실제보다 말라 보이는 사람이 있다더니. 세르펜스도 그쪽일까?

'거기다 곱상한 얼굴에 안경까지.'

이쯤 되면 노린 거다.

안경을 왜 썼나 했더니, 방심하라고 쓴 거구나. 얼굴만 보면 검 같은 건 휘두르지도 못할 것처럼 생겼다.

겉보기가 이런데 무장까지 별거 없으니. 허리에 걸린 검조차 단순히 구색을 갖추는 용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 가지 특이사항이라면···.'

내 검술은 너무 형편이 없어서 말 그대로 검이 쓸모가 없었고, 세르펜스의 검은 안 써도 상관이 없다는 점에서 쓸모가 없었다.

"저기, 그···.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옆에 서 있는 나를 보고 다가오긴 했으나, 인상이 상당히 달라진 세르펜스를 보고 긴가민가한 모양이다.

아직 가명을 전달하지 않았기에 유지스가 에둘러 질문했고, 세르펜스가 그를 확인해주었다.

부드러운 눈웃음을 흘리며 대답하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봤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가서 나누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그녀가 우리 앞에 도달할 즈음. 마침 우리가 타야 할 기차 또한 도착했기에, 일단 들어가서 대화를 이어가기로 했다.

미리 끊어놓은 열차표의 좌석 번호를 확인하며, 기차에 올랐다.

"···저희 칸 잘못 탄 것 아닙니까?"

중앙에 오갈 수 있는 공용 통로를 두고, 좌우에 작은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문의 간격으로 보아 그 안이 넓을 것 같지 않았다.

'분명 1등급 좌석이라 들었는데?'

그것도 나와 세르펜스는 2인실을 선택했는데, 왜 이리 좁아 보일까.

덧붙여 유지스의 좌석은 개인용 1등급 좌석이라 다른 칸에 있었다. 열차가 출발하고 표를 확인받으면, 낮 동안은 우리가 있는 칸으로 넘어올 예정이다.

'특실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넉넉한 공간은 확보될 줄 알았는데.'

칸 하나를 통째로 쓰는 것과 여럿이 나눠 쓰는 것의 차이는 컸다.

겉모습은 이래도, 안은 넓지 않을까 싶어 열어보니 더 가관이다.

장기 여행인지라 편안한 수면을 위해 침대도 있었으나, 문제는 그게 2층 침대처럼 좌석 위에 있었다.

일어나다 실수하면 머리를 박기 딱 좋아 보인다.

'아, 이래서 솔레르티아가 안면 몰수하고 특실까지 따라 왔구나!'

그녀는 현명했다. 그래, 역시 마법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

원래 판타지 세계의 마법사라 하면 똑똑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지성인들 집단이다.

양판소의 틀을 가진 [성검의 주인]에서 또한 다를 바 없었다.

1평이 조금 넘을까 말까 한 넓이에 마주 보는 좌석과 테이블. 머리 위에 침대까지.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한 벽이 오히려 갑갑함을 유발했다.

"저희 쭉 기차만 타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니죠?"

"네, 국경 지역 같은 경우는 기차가 연결되지 않아서. 그게 아니더라도 중간중간 내려 휴식을 취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행이네요. 이런 곳에 갇혀서 바스툴 왕국까지 가야 한다면, 저는 답답해서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으음."

맞은편 자리는 유지스를 위해 남겨둬야 했기에, 세르펜스는 기꺼이 내게 창가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게 좋은 거다.

나란히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표를 확인해주는 직원이 왔다 가고, 얼마 안 있어 유지스가 들어 왔다.

"이제 슬슬 얘기해 볼까요?"

유지스가 이제는 습관처럼 정령으로 소리를 차단했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참 편리해 보였다.

물론 정령을 보며 편리 운운하면 비난 세례를 맞을 것 같아,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저는 '리디아 유자스'라고 해요."

또 유자인가.

그녀의 노란 눈동자를 살짝 덮은 청록색 속눈썹이, 노란 유자 열매와 그 꼭지에 달린 이파리로 보이기 시작할 지경이다.

'세르펜스야, 나 때문에 쉽게 지은 거라지만···. 유지스는 작명 센스가 참.'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유지스는 세르펜스가 내민 두 장의 신분증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제국 수도 외에는 얼굴이 알려지지 않아서 미처 변장할 생각은 못 했네요. 저 역시 뭐라도 하는 편이 나을까요?"

"예비용 염색약을 챙겨오긴 했으나, 대부분 낮은 채도의 어두운 계통이라···. 어차피 엘프의 대다수는 녹색 계통의 머리카락을 가진다 들었으니, 그대로도 괜찮을 듯합니다."

칙칙한 머리색의 엘프는 되려 눈에 띈다. 그냥 피부색 밝은 다크 엘프가 되어버린다.

보편적으로 엘프의 머리색은 세르펜스의 말 대로 밝은 녹색 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예외라 해도 파란색이나 노란색 정도? 그조차 드물었다.

"공작님이야 머리카락의 색도 워낙 눈에 띄고, 얼굴도 많이 알려져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겁니다. 저만 봐도 평소 모습 그대로잖습니까?"

"그렇군요···."

변장한 세르펜스의 모습을 본 이후, 그게 계속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내 말을 듣고 나서야, 유지스가 안도했다.

소설 [성검의 주인]작가 피셜에 의하면, 유지스는 엘프 중에서도 눈에 띄는 미인이라는 설정이 있다.

'하지만 그 정도는 되어야, 하향된 상태인 세르펜스가 나름 인간처럼 보이겠지.'

태생부터 아름답기로 소문난 엘프답게 겁나 예쁜 엘프. 그리고 그런 엘프와 견줄 정도로 탈인간 수준의 예쁜 인간.

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은 그 수준이 다르다.

전형적인 양판소가 원작인 세계답게, 모든 엘프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엘프 뺨치게 아름다운 인간 남성에 대한 언급은 [성검의 주인]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세르펜스처럼 천사에 비유되는 외모의 소유자 또한 없었다.

'즉, 세르펜스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봐도 그냥 세르펜스다···!'

물론 머리카락 색과 안경으로 인상을 바꿔 놓았으니, 인간들 사이에서야 독보적으로 잘생겨도 괜찮았다.

하지만 엘프와 함께 다니는데, 그 엘프와 비등할 정도로 미친 미모가 빛을 발하면 그때부터 문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차라리 유지스는 있는 그대로 유지하고, 세르펜스의 신성함을 줄이고 두꺼운 안경으로 얼굴을 가려 놓은 지금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딱 밸런스 좋게, 평범한 엘프와 잘생긴 인간으로 보여! 그리고 나는···.'

···뭘까. 대체 뭐로 보이는 거지? 왜 나는 이곳에 존재해야 하는가.

나 스스로 존재 의의를 고민하는 동안에도,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혹시 몰라서 일시적으로 귀를 숨길 수 있는 환영 마법 스크롤을 몇 장 사두긴 했는데···."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것은 바스툴 왕국에서 작전을 수행할 때 사용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세르펜스가 너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다독이는 듯한 목소리로 다정히 말했다.

저 모습을 보고, 무뚝뚝한 말투로 철벽을 세우던 인물과 누가 동일인으로 여길까?

"그보다 오늘···. 아니, 이번 여행의 컨셉은 뭔가요?"

"네? 컨셉이라뇨?"

"아르케 왕국과 연합하여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거잖습니까?"

내 질문에 유지스와 세르펜스. 둘 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유지스는 그렇다 쳐도, 세르펜스 너는 그러면 안 되지, 이 설정충아!'

내숭과 가식이 아주 숨 쉬듯 나왔다.

됐어, 다 필요 없다. 이렇게 된 거, 이 설정은 내가 집도한다!

"뚜렷한 이유 없이 인간 둘과 엘프 하나가 함께 다닌다니. 이상하잖습니까?"

"그도 그렇네요. 역시···!"

역시 뒤에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귀를 쫑긋 세우며 바라보는 유지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대외적 설정에 묶인 세르펜스가, 내가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하다는 듯 관심 있게 들어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엄청나게 불안해하고 있을 게 뻔하다.

"일단 저와 공작님은 친구 관계로, 관광을 목적으로 바스툴 왕국에 가는 걸로 하죠! 자, 이렇게 관광 안내서까지 챙겨왔으니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겁니다!"

"정말 철저하시네요···! 밑줄 친 흔적하며. 군데군데 접히고, 살짝 너덜너덜한 것이. 정말 여행할 생각에 들떠 열심히 알아본 것으로 보여요!"

내가 가방에서 꺼낸 안내서들을 펼쳐보며, 유지스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세르펜스 또한 그것들을 들춰 보고 거짓으로 감탄하는 척했다.

"노, 놀랍습니다···. 언제 이런 것을."

세르펜스의 저 말은 곧,

'언제부터 놀러 다닐 계획을 세운 거지? 설마 처음부터 여행이 목적이었나?'

···의 함축어였다. 이제까지 그가 보인 행동 패턴과 평소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떠올려보면, 이건 100%다.

확신할 수 있다.

거기에 약 47%의 확률로, '혹시 악마 숭배자의 스카웃 어쩌고 한 것부터가 거짓말인 거 아냐?' 하는 의심이 더해졌을 수도 있고.

"그, 그럼 저는···. 우연히 기차에서 친해졌는데, 목적지가 같아 같이 다니는 거로···. 이 정도로는 부족하려나요? 좀 더 명확한 목적과 상세한 경위가 필요할까요?"

"···그렇게까지 세세히 캐물을 사람은 없을 테니, 상관없지 않을까요."

열의를 불태우는 유지스의 모습을 보니, 앞으로의 장래가 유망하다. 머지않아 그녀 또한 훌륭한 설정충으로 거듭나리라.

"저와 공작님은 서로 이름을 부르며, 말을 놓으면 될 것 같고, 위리···."

"예?!"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었다는 듯, 세르펜스가 화들짝 놀랐다. 얼마나 놀랐는지, 본인의 설정조차 잊고 내 말을 끊어먹었다.

"이름까지는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말을 놓는···다는 것은. 서로?"

"그냥 설정이고, 연기잖습니까? 물론 공작님께서 누군가에게 하대한다는 것은 전혀 상상이 가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 아닙니까?"

아주 당연하다는 듯 내가 그에게 반말을 쓴다는 것을 기본 전제로 깔았다.

그 발언에, 유지스와 세르펜스의 표정에서 어처구니가 사라졌다.

특히 세르펜스는 어색하게 웃고 있었지만, 속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보는 눈이 있으니 차마 대놓고 갈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두자니 이름을 허락한 지 며칠 만에 말까지 트게 생겼다.

비록 한시적이라 해도, 절대 한 번으로 끝낼 내가 아니란 것쯤은 그가 더 잘 알 것이다.

"치, 친구··· 사이라 해도 서로를 존중한다면. 존대를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형이라 부르시는 건 어떻습니까? 제가 한 살 위잖습니까? 그럼 존대를 쓰셔도···, 아."

오늘은 한발 뒤로 물러나야겠다.

겉으로야 난감함과 곤란함을 표현하고 있었으나,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있었다.

이 이상 도를 넘으면 아무리 나라도···.

'···잘리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가 나를 자를 수 있었다면, 이름을 부른 시점에서 이미 아웃이다.

대신 무슨 후환이 있을지 모르니, 오늘은 작전상 후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