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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회개해주세요!-70화 (70/925)

70회. 공작님과 여행의 시작 (3)

"제가 생각을 잘못했던 것 같습니다. 존댓말을 통해, 서로를 존중해주는 친구 사이라니! 엄청나게 멋지고, 의리도 넘치고···. 하여간 무진장 좋습니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주 있는 일이다 보니, 빠르게 안정을 되찾은 세르펜스가 다정한 목소리를 꾸며내어 대답했다.

그러나 내가 세르펜스에게 기어오르는 모습을 처음 보는 유지스는 그러하지 못했다. 여전히 아연한 표정으로 입을 떡하니 벌렸다.

"리벨론 경은 일을 참···. 잘하시나 봐요. 역시 그런 거겠죠? 일당백?"

누가 들어도 '그렇지 않고서야, 쟤를 계속 쓸 리 없잖아?'라는 의미였다. 그녀의 질문에 그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나와 세르펜스의 관계 설정 중 작은 의견 충돌이 있었지만, 유지스를 부르는 호칭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평소 부르던 '위리디아님'에서 위를 뺀, '리디아님'으로.

보나 마나 세르펜스야 본명의 이름과 흡사한 호칭으로 부르기 싫어서겠고, 나는···.

'유자만 아니었다면, 당연히 유지스라 불렀겠지만···.'

머릿속에서 자꾸 노란 유자 열매가 굴러다녀서 안 되겠더라.

"그럼 페르센트님과 시온님? 이렇게 부르면 될까요?"

"예, 그거면 될 것 같습니다."

실수를 줄이기 위해, 출장 기간 동안에는 우리끼리만 있을 때도 가명을 사용하기로 했다.

기껏 세르펜스라 부를 수 있게 되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아쉬운 감이 있긴 했지만.

나야 언제든 그를 이름으로 부를 준비가 되어있으니, 당장은 그가 날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보다, 이제 슬슬 앞으로의 일정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여행 책자들을 한쪽으로 밀어내며, 세르펜스가 한 장의 지도를 꺼내어 펼쳤다.

한눈에 봐도 알기 쉽게 이동 경로와 그 과정에 걸리는 예상 기간 등이 표시되어 있었다.

"이거 너무 빠듯한 거 아닙니까?"

"반드시 지켜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니, 참고삼아 보시면 됩니다. 어떤 돌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잖습니까. 이 경로를 기준으로 잡고, 그때그때 약간씩 조정하며 고쳐나갈 예정입니다."

그럴 만도 한 게, 세르펜스는 일정을 시간 단위로 정해놓고 조금 늦었다고 채찍질하는 사람은 못 된다는 설정이다.

아마 유지스만 없었다면, 나를 들고 뛰는 한이 있더라도 저 계획대로 이동했을 것이다.

'확정된 것도 아니고, 일정에 여유가 있는 거라면···.'

한쪽에 밀어놓았던 안내 책자를 슬그머니 가져와, 보란 듯이 지도 옆에 펼쳤다.

"바스툴 왕국의 불법 투기장에 악마 숭배자가 연관되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내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 세르펜스는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에서 시선을 떼고 유지스에게 질문한다.

"네, 대륙을 향한 원념과 동시에 무력을 갖춘 인물을 찾는다는 소문···이죠."

"그쪽 일은 도착한 뒤, 자세한 정보를 구해야겠습니다. 지금으로선 무턱대고 일을 계획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저도 정보는 들었지만 직접 가 본 적은 없어서···. 명확한 증거는 없는데도, 기꺼이 함께 해주실 줄은 몰랐어요."

"아무리 작은 불씨라도 놓쳐선 안 되는 법입니다. 만약 정말 악마 숭배자들이 나타난다면, 그들을 상대하기에 저만한 적임자는 없잖습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불법 투기장이라니···. 원치 않는 싸움을 강요당하며, 고통받고 있을 이들을 떠올리면.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처연한 표정으로 세르펜스가 애처로이 말했다.

이 순간만큼은 잿빛의 머리칼이 무색해졌다. 신성함과 경건함이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유지스도 그것을 느꼈는지, 이러한 성자를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표정으로 탄식을 흘렸다.

하지만 나는 그의 표정과 대사가 모두 연기라는 걸 알고 있다.

저렇게 완벽한 성인군자의 모습을 꾸며내는데, 그 어디에 진심이 있겠는가.

'감정이 크게 동요될 때, 저 녀석이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 내가 뻔히 아는데.'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내뱉는 꼴을 보면 기도 안 찰 노릇이나, 그 때문에 더 안타깝다.

남의 염병이 제 고뿔만 못하다는데, 세르펜스의 인생은 고작 감기 따위와 비견될 것이 아니니.

소설 [성검의 주인]에서 세르펜스가 남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그들이 괴로워할 때마다 되려 기뻐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그런 탓이겠지.

원치 않는 싸움을 강요당하며 고통받다니.

완전 세르펜스의 인생 그 자체를 표현하는 말 아닌가?

'처음에는 얘를 회개시키고, 회유해서 휴마누스를 돕게 할 생각이었는데···.'

그 스스로 대륙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없다면, 그냥 데리고 같이 은거라도 할까?

최종 보스와 덤으로 간부도 한 명 치울 예정이니. 내 분량의 몫은 충분히 해낸 거다.

"···시온?"

"아, 네! 세르펜스, 아니, 페르···뭐였죠?"

"페르센트입니다."

세르펜스가 상냥한 목소리로 호칭을 정정해주었다. '이럴까 봐 기억하기 쉽게 지어 놨건만···.'이라 말하는 듯한 질타의 시선도 함께.

"그랬죠, 페르센트! 음, 그래서 왜 부르셨습니까?"

"당신이 갑자기 멍해지셨길래, 어디 불편해지신 건가 싶어···."

"아닙니다, 괜찮아요. 방금의 이야기를 들으니 좀 안타깝고. 그래서 그냥 생각이 많아져서 그런 것뿐입니다."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넘기려 들자, 더 의심스럽게 보인 모양이다.

세르펜스가 몸을 옆으로 틀고, 테이블에 반쯤 기대어 상체를 내 앞으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 행동은 마치 내 안색을 자세히 살피려는 듯 보였으나, 실제로는 맞은 편의 유지스에게 표정이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일 거다.

'퍽이나 그런 이유겠다. 이번엔 또 뭔데? 내 말에 어디 이상한 점이라도 있었나?'

···라고 말하는 듯한, 저 표정을 보면 확실했다.

내가 유지스처럼 그의 말에 감명을 받고,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가여워하는 것이 아님을 눈치챈 거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그 연민의 대상이 세르펜스라는 것은, 이쯤 되면 그냥 당연한 일이다.

'유지스가 앞에 있는데, 자세한 얘기를 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러니 내가 지금 직접 묻는 대신에 이러고 있는 게 아닌가.'

'알면 좀 비켜요, 나중에 우쭈쭈 해줄 테니.'

주고받는 시선 속에서 대충 이런 느낌의 대화가 오갔다.

직접 말로 한 게 아닌지라, '우쭈쭈' 같은 건 필시 전해지지 않았겠지. 하지만 대략적인 의미 전달에는 성공한 것 같다.

세르펜스가 탐탁지 않은 표정을 내보였다가 이내 지우고, 몸을 바로 세웠다.

"···방금 두 분 뭐 하신 거예요?"

유지스가 기이하다는 표정으로 질문했다.

옆에 나란히 앉아 저런 자세로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으니, 맞은 편에서 본 그녀라면 대체 저게 뭐 하는 짓거리인가 싶을 거다.

"잠시 안색을 살폈을 뿐입니다. 그게···. 하아─. 앞으로 함께 행동해야 하니, 언제까지고 숨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시온?"

"네? 저요?"

"···리디아님께도 대략의 사정을 말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말하다니 무엇을?

세르펜스가 조금 무거운 표정으로 나에게 질문해왔다.

'이 자식, 설마 자신의 얘기를 꺼낼 생각인 건가?'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얘기를 꺼낼만한 타이밍도 아니지 않나?

그가 왜 갑자기 이런 마음을 먹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째서 내 허락을 구하는 것인지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의 다짐을 존중한다.

속으로 그를 응원하며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는 살짝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시온은 겉보기에 밝고 쾌활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는 좁은 공간에 오래 갇혀있으면 무척 갑갑해 하고, 불안함을 느낍니다."

···네? 제가요? 금시초문의 이야기다.

물론 좁은 공간에 오래 머무르면 답답하긴 하지만, 그냥 보통 사람이 느끼는 정도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불안함은 조금도 느끼지 않는다.

'왜 저런 밑도 끝도 없는 거짓말을···?'

아뿔싸, 방금 그가 구한 허락은 '너를 좀 팔아먹어도 되겠냐?'라는 의미였구나! 실수했다.

직전의 상황이 그런 분위기라, 당연히 본인에 관한 이야기인 줄 알았다.

어쩐지 너무 뜬금없다 했더니···.

"제가 신성력으로 도와드릴 수도 있지만, 그는 자기 스스로 이겨내고 싶다고 말씀하셔서···. 하지만 그렇다 해도,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잖습니까. 그래서 저도 모르게 조금 과하게 반응했나 봅니다. 이상하게 보였다 해도, 이해는 합니다."

"아니에요! 가까운 사람을 걱정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죠. 저였어도 마찬가지로 행동했을걸요? 시온님, 저도 응원할게요! 중요한 대화도 끝났으니, 창문이라도 열까요? 많이 답답하셨을 텐데···."

어떻게 저런 변명이 즉석에서 바로 나올 수 있는 거지?

나도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임기응변 인생을 살아가는 중이지만, 얘는 정말 못 이기겠구나 싶다.

‘그런데 하필 그런 식으로 풀어 갔어야 했나?’

걱정돼서 안절부절 못하는 유지스의 모습을 봐라, 양심도 안 찔리나?

그녀의 머릿속에서, 나는 악마의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납치 감금을 당한 사람이 되어 있을 거다.

무력이 전무한 내가 혼자 탈출할 수는 없었을 테니, 누군가의 희생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설정 같은 것도 덧붙여지지 않았을까?

'그런 배경 스토리라면 폐소 공포증은 물론, 음지에서 몰래 악마 숭배자들과 싸운다는 기존의 설정까지도 복수라는 미명 아래 커버할 수 있어.'

몹시 그럴듯했다.

그렇게 나 홀로 분투를 하다, 그 과정에서 구한 사람이 바로 그 이름 모를 호위.

생명의 은인인 나에게 구해진 자신의 생명과 충성을 바치고. 내가 품은 그 커다란 뜻에 동참하는 중이라 하면···.

'모든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나.'

별 능력도 없는 내게, 그처럼 유능한 이가 어째서 그렇게까지 충성심을 보였는지. 그리고 내가 어째서 자신의 안전에 그토록 예민하게 굴었던 것인지.

클리셰도 이런 클리셰가 없다. 무척이나 전형적이고 진부한 이야기.

그러나 이런 것이 잘 먹히기에, 클리셰가 되어 존재하고. 몇 번이고 쓰이는 것이다.

"이제···, 이제야 이해가 가네요. 어째서 시온님께서 괴상할 정도로 가벼운 태도를 보이셨는지···. 앞으로는 괜찮을 거예요. 시온님을 걱정하고, 돕고자 하는 사람이 이렇게, 이렇게나 많은···, 흡···!"

이건 내가 울린 것인가, 세르펜스가 울린 것인가. 아니면 우리 둘의 합작으로 봐야 할까.

나도 이젠 모르겠다.

울고 있는 그녀를 어떻게 달래야 하나 안절부절못하고 있으니, 세르펜스가 예상했다는 듯 바로 손수건을 꺼냈다.

그것을 유지스에게 건네며,

'또 그거냐?'

···신성력 스캔을 시도했다.

그 덕분에 유지스는 빠르게 안정을 찾고, 눈물을 훔쳐낼 수 있었지만.

'설마 그걸 확인하려고, 일부러? 에이, 설마. 아닐 거야. 그래, 아니겠지.'

나는 몹시 뒤숭숭한 기분을 느꼈다.

다크 엘프도 아니고, 그냥 엘프인데. 게다가 지금도 우리를 도와 악마 숭배 세력의 계획을 방해하러 가는 중임에도, 계속 의심하고 있었다고?

'그게 어디 정상적인 사람의 사고방식인가?'

정말 그런 사람이 있다면 분명 정신적으로 피폐하고, 병들고, 외로운···, 세르펜스잖아?

세르펜스가 세르펜스한 마음에서 세르펜스 했다는데, 내가 이해해 줘야지 어쩌겠는가.

'하긴, 믿었으면 애초에 1인 2역을 했을 리 없구나.'

짠한 마음에 그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그에 세르펜스는 자신은 괜찮다고 말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냥 비켜달라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길을 터주었다.

아무래도 내가 화장실이 급하다고 착각한 모양이다. 아니면 폐소 공포 설정의 연장이거나.

현재 상황을 생각해보면 역시 후자인가?

어쩔 수 없이, 뻘하게 통로를 왔다 갔다 돌아 다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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