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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회개해주세요!-72화 (72/925)

72. 공작님과 여행의 시작 (5)

야시장이 열리는 거리에 접어드니, 수많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길가에는 다양한 간이점포들이 죽 늘어서 있다. 먹거리나 기념품 같은 것부터 기타 생활용품까지. 없는 게 없다.

"이런 곳에 나왔으니, 일단 먹고 시작하죠!"

"또 먹는 건가?"

"지금 시각은 밤 열시. 인간이 가장 야식이 땡긴다는 시간이죠."

"···그런 얘기는 처음 듣습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드립을 날리자, 정말 있는 얘기라고 생각한 것일까. 세르펜스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까운 꼬치구이 점포로 그를 이끌었다. 매운 것과 달달한 것을 하나씩 구매했다.

"기차에 간식까지 가져와 챙겨 드셨으면서···. 그러다 살찔지도 모릅니다."

"어디 저만 먹었습니까? 셋이 공평하게 나눠 먹었잖습니까?"

그냥 펼쳐두고 먹게 되면 세르펜스가 눈치 보느라 못 먹을까 봐, 정확히 삼등분해서 각자의 앞에 두었다.

"게다가 누구 덕분에, 기차에서 제가 제일 많이 움직였거든요?"

"운동이 되었다니 다행이군."

짐짓 장난스레 웃으며 말하는 그의 모습이 무척이나 얄궂다. 복수를 위해 꼬치구이로 건배하는 척, 매운 양념을 옮기려는 것을 저지당했다.

그 대신 음료수를 한 병씩 사서, 그것으로 건배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리디아님 말입니다. 일부러 그러신 거죠?"

"···티 많이 났나?"

"조금? 평소 설정대로라면 양측의 얘기를 듣는 것이 먼저잖습니까. 그녀가 많이 거북하십니까?"

조금 머뭇거리던 세르펜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에게도 싫어하는 사람 같은 것이 있습니까?"

그렇게 묻는 그의 얼굴에서 죄책감이 살짝 묻어 나왔다.

세상의 모든 이들을 사랑과 애정으로만 대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죄스러울 것도 많지.

저러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와 할 기세다.

"당연히 있죠. 아니, 이미 한 명 아시잖아요?"

"···음?"

"한스말입니다. 옥신각신하는 걸 뻔히 보셨으면서. 무슨 그런 걸 질문이라고 하십니까?"

"아···. 그렇군. 알고 있음에도, 어쩐지 당신이 누군가를 꺼리고 미워하는 건 상상이 잘 안 갑니다."

"그게 가능하면 어디 사람입니까?"

되도 않는 소리 하지 말고, 마시기나 하라는 의미로 병을 다시 한 번 부딪혔다. '쨍-'하고 맑은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거 맛은 별론데 병은 되게 예쁘네?'

양도 얼마 안 되는 주제에 더럽게 비싸다 했더니, 병을 팔면서 새지 않는다는 증명을 위해 음료를 담아놓은 격이다.

기념품으로 소장해야지.

"또 한 가지, 질문할 것이 있다."

오늘따라 질문이 많다.

평소에는 내가 모르는 것이 많다 보니 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그가 알려주는 식이었는데.

"맘껏 물어보시죠. 대답할 수 없는 것 빼고는 다 대답해 드릴 테니."

"며칠 전 기차에서 어째서 그러셨던 겁니까?"

기차에서 있었던 일 중, 세르펜스가 구태여 물어 올 일이라면. 그때의 일인가.

간혹 내가 그를 연민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아도 그러려니 했으면서. 이렇게 질문해 오는 것을 보니, 이번만은 정말 짚이는 구석이 없는 모양이다.

"그것도 '당장 말할 수 없는 정보'와 관련된 것인가?"

"아닙니다. 그냥 '원하지 않는 싸움을 강요당한다'라는 말이···."

"제가 그래보이십···. 하, 그렇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으려던 그가, 멈칫하더니 자조를 흘린다.

"스스로 말을 뱉어놓고, 그것이 내 얘기인 줄도 몰랐다니. 정말 미련하기 짝이 없군."

"제 상관을 욕하지 말아 주실래요? 까도 제가 깝니다."

"···당신은 까면 안 되지."

"원래 부하 직원이란, 직장 상사를 까기 위해 존재하는 법입니다."

한 번 우울해지기 시작하면 한없이 땅굴을 파 내려갈 녀석이라, '세르펜스 도주 전 증후군'이 발병하기 전에 일단 끄집어내고 시작해야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자기 자신을 정의한다는 건 누구나 어려운 일입니다. 억지로 말하라 시킨다면 끄집어낼 수야 있겠지만, 왜곡되거나 빠진 부분투성이일걸요? 그렇기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관조하려 하고, 반성하고. 때때로 타인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는 겁니다."

괜히 여러 소설 속에서 자신의 무의식이나 트라우마를 마주하게 되는 시련을 겪고, 그것을 통해 각성하는 클리셰가 난무하는 게 아니다.

[성검의 주인]에서 휴마누스 또한 겪은 일이었으니, 말 다했다.

"그대는 이따금···. 평소에는 왜 그따위로 행동하는 것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종종 총기 어린 말을 할 때가 있다."

"원래 안 그러던 사람이 가끔 의외의 모습을 보이면, 훨씬 긍정적 평가를 받는 법이 라 하잖습니까? 모두 다 계획 대롭니다!"

"···거짓말."

정답이다. 그냥 그때그때 충동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답을 맞혔으니 무언가 상이라도···.

"아, 맞다! 제가 우쭈쭈 해드리기로 약속해놓고, 깜박해버렸네요!"

"그딴 약속 받은 기억 따윈 없습니다!"

그가 멸시에 찬 눈초리로 나를 내려다본다. 역시 우쭈쭈는 전달이 안 됐나 보다.

하지만 이왕 해주기로 한 거, 사탕이라도 한 통 사서 건네줄까?

"마지막으로.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것이 있는데, 물어봐도 됩니까?"

"이미 실컷 물어 놓으시고. 맘대로 하시죠."

"···왜 내 머리카락을 잡고 있는 거지?"

참 일찍도 물어본다. 다른 질문의 우선순위에서 밀린 건가?

그가 죄책감 서린 표정으로 내게 싫어하는 사람을 물어왔을 때부터, 쭉 잡고 있었다.

"도망 방지용 목줄···? 그립감이 아주 좋네요. 이런 건 어디서 팔아요?"

"드디어 미친 건가?"

아니, 대체 누가 우리 아이에게 저런 과격한 언어 표현을 가르친 거지?!

자꾸 암흑가 따위를 얼쩡거리니, 못된 언어 습관이 생겨난 모양이다.

세르펜스는 묻고 싶던 것은 다 물었는지, 내 손에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빼내었다.

"더 구경하실 겁니까?"

"간식으로 먹을 만한 군것질거리만 좀 사고 들어가죠? 먹는 입이 셋이다 보니, 금방금방 줄어드네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좀처럼 마음대로 할 수 없더라.

결국 '이것까지만'을 입에 달고 구경하며, 실컷 놀았다. 점포가 하나둘 닫힐 즈음에야,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여관으로 돌아왔다.

* * *

잠은 새벽 늦게 들었지만, 그렇다고 출발 시각은 늦춰지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비몽사몽 간에 조식을 먹고, 길거리 마차를 잡아탔다.

"어제는 재밌으셨나요?"

"당연하죠! 여기저기 떠들썩하게 들뜬 분위기다 보니, 저까지 덩달아 신나서···. 맛있는 것도 먹고, 구경도 하고. 엄청나게 재밌었습니다!"

"그러셨군요. ···저도 같이 갈 것을 그랬나 봐요."

"나중에 또 기회가 있을 겁니다."

···아마도?

살짝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이는 유지스에게는 미안하지만, 확답은 못 해주겠다.

그녀가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면 언젠가는 가능할 거라 믿는다.

휴마누스는 10년이 지났어도 아직이지만, 유지스는 호위 도련님 쪽을 알고 있으니···. 약간 더 유리하지 않을까?

"그보다 도시를 벗어나게 되면, 마차 대신 말을 타고 달리게 될 텐데. 두 분 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저는 괜찮아요."

"어느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뭐 그딴 대답이 다 있느냐는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하지만 정말 괜찮은지 모르겠는데 어쩌라고!'

사실 세르펜스의 질문은 그저 예의상 한 것이나 다름없다. 바로 다음에 할 일정이 이거니까, 상기해 두라는 언질이다.

유지스야 살아온 세월이 우리의 몇 곱절은 되고, 동식물의 친구인 엘프였으니 물어볼 필요도 없고.

귀족가의 차남인 시온 역시, 기본적인 소양으로 승마를 익혔으리라 판단했을 거다.

'그래, 배웠지. 나 말고 시온이.'

평범한 현대인이 말 같은 것을 타고 다닐 리 없잖은가. 그렇다고 아예 탈 줄 모른다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의심을 받고 말고의 문제는 이제 와 더는 의미가 없으니, 젖혀두고.

'말하는 건 아무 문제 없으니, 말 타는 것도 별문제 없지 않을까?'

물론 이 말이 그 말은 아니긴 했지만.

몸에 남은 기억이라고 해야 하나? 무의식 영역에서 알아서 반응해주지 않을까 하고, 시온의 육체에 기대를 걸어본다.

"어느 정도라 하심은···?"

"걷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운동신경에는 문제가 없으시던데 어째서···, 아. 다른 걸 보낼 게 아니라 말을 보냈어야···."

리벨론 가에 말이 없어서, 말 타는 법을 제대로 못 배운 줄 아는 건가? 아무리 내가 별 볼 일 없는 가문이라 항상 말해왔지만, 명색이 제국의 백작가다.

말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된···. 말장난은 이제 그만하자.

"그런 건 아닙니다! 단지 제가 승마에 취미를 못 붙여서."

"으음···. 미리 말씀해 주셨다면, 가르쳐 드렸을 텐데."

나도 그동안 내가 직접 말을 탈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해서, 그냥 내버려 두었던 문제다.

'말을 못 타면 마차를 타면 되고, 마차를 못 탄다면 세르펜스를 타면 되잖아?'

암흑가로 향했던 날처럼, 여차하면 그에게 들려가는 방법이 있었기에 완전히 배울 생각을 접어뒀었다.

하지만 이렇게 된 거, 나중에 돌아가고 나면 세르펜스에게 제대로 배워둬야겠다.

막상 닥쳤을 때 할 수 없는 것 보다, 미리 배워두고 쓸 일 없는 편이 더 낫다는 인생의 진리를 배웠다.

"도시 안에서는 어차피 말을 내달릴 수 없으니, 마차를 타고 있지만. 밖으로 벗어나 말을 타게 되면, 신성력까지 동원할 예정입니다."

어쩐지 지도상의 거리에 비해, 세르펜스가 표기한 소모 예상 시간이 너무 적다 싶었더니.

단순히 축적이 잘못됐거나, 내가 말의 속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이려니 했다.

그런데 말에 버프를 쏟아붓고 달리는 미친 짓을 실제로 경험하게 될 줄이야.

'변장을 하고 있긴 하지만, 지금 세르펜스는 공작 버전이었지?'

당연히 신성력을 마구 남발할 것을 예상해야 했다.

"당신의 승마 실력이 그 정도까지 어설프셨을 줄이야···. 자칫 잘못하면 낙마하실 수도···."

"사, 살려주세요!"

심각하다 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세르펜스는 나름 진지하게 고민을 이어나가던 중이었다.

하지만 나의 살려달라는 말에, 그는 반사적으로 나지막한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제가 당신을 죽게 둘 리가 없잖습니까."

대답이 바뀌었다.

'제가 제 보좌관을 왜 죽입니까?'가 나올 순서였는데. 왠지 모를 전율마저 느껴졌다.

'이런 게 바로 자식을 키우는 보람인가!'

나는 뜻밖에 펼쳐진 감동의 바다에서 마음껏 헤엄쳤다.

'여러분, 보세요! 이 아이가 제 아이입니다!'

허구한 날 떼쓰고 '싫어!', '저리 가!'라며 소리만 지르며 밀어내던, 미운 (스물)네 살 꼬마 아이가!

언제 이렇게 커서, '앞으로는 제가 모시고 살겠습니다.'라며 효도 선언을 해왔다.

"그럼 말은 두 필만 구매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저와 당신이 함께 타고···. 리디아님께서 타실 말에 저희의 짐까지 함께 맡겨도 되겠습니까?"

"네, 맡겨주세요!"

유지스가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짐이 참 거치적거린다. [성검의 주인]에서 휴마누스 일행은 양판소 답게 아공간 주머니 같은 것을 썼었는데···.

문제는 이게 몇백 년 전 기술인데, 마탑 내부의 문제로 소실되었다는 설정이 있었다.

그럼에도, 휴마누스가 아공간 주머니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양판소 답게 기연이지, 뭐.'

정말 우연하게도, 몇백 년 전 홀연히 사라졌던 대도의 비밀 근거지에서 찾은 거다.

아공간 주머니 말고도 온갖 보화가 가득했었는데, 그것들을 팔아 활동 자금으로 썼었던 걸로 기억한다.

덕분에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도, 돈이 부족할 일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제 필요 없는 거 아닌가?'

세르펜스가 훼방만 놓지 않는다면, 제국에서 성검의 주인이자 황태자인 휴마누스에게 금전적 지원을 아낄 리 없다.

옆에 앉아있는 세르펜스에게 시선을 던지니, 그가 더 할 말이 있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 녀석에게 갚아야 할 빚도 있고···.'

심리적인 비유가 아니라, 진짜 빚이다.

함정이 잔뜩 깔린 곳이다 보니 혼자는 못 갈 것 같고, 지분을 나누는 조건으로 나중에 같이 가달라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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