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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회개해주세요!-74화 (74/925)

74. 공작님과 투기장 (2)

투기장은 3일 간격으로 열리는데, 마침 도착 당일 경기가 잡혀있었다.

세르펜스가 표를 받아 여관에 도착했을 땐, 이미 경기 시작까지 2시간 남짓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오늘을 놓치면 꼼짝없이 3일을 버리는 격이기에, 우리는 허겁지겁 투기장으로 향했다.

'휴~. 다행히 늦진 않았네···.'

입장 가능 시간을 5분 남기고 아슬아슬하게 투기장에 들어섰다.

우리는 흑색 가면을 얼굴에 쓰고, 관람석에 자리를 잡았다. 이 가면은 투기장 측에서 제공한 것으로, 선택이 아닌 필수 착용이다.

주위 어디를 둘러보아도 똑같은 흑색의 가면을 쓴 사람들이 우글거렸다.

'제국의 암흑가도 이렇게까지 익명을 추구하지 않았는데. 거, 무진장 철저하네.'

아무런 특징 없이 매끈한 가면은 얼굴을 전부 가려버렸다.

덕분에 세르펜스와 유지스의 튀는 얼굴 또한 자연스럽게 가릴 수 있었으니, 우리에게는 좋은 일인가?

"이곳 투기장의 간판은 '검은 투사'라는 자에요. 인상착의는 근 2m에 달하는 거구에 검정으로 도색 된 철제 투구를 쓰고 있으며, 주 무기는 검날이 톱날처럼 생긴 기형 검을 사용하고···."

스크롤의 힘으로 귀를 숨기고, 세르펜스에게 받은 염색약으로 머리까지 물들인 유지스가 내 쪽을 힐긋거리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은근슬쩍 우리의 목표가 '검은 투사'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리라.

'검은'이라는 수식어도 그렇고 구체적인 수치까지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흑기사의 키가 상당하다는 묘사가 있었으니.

'이 정도면 거의 맞게 찾은 것 같은데?'

한 가지 걸리는 점이라면, 그런 이상한 무기가 아니라 평범한 대검을 사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말 미친 생각이지만. 관객들을 흥분시키려고 일부러 저런 무기를 쥐여준 걸지도.'

그 미친 장면을 보기 위해 온 자들이다.

이제 막 사회자가 등장한 참이나, 벌써부터 관객들은 야유를 보내며 어서 싸우고 죽이라며 아우성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검투사에게 손에 익은 무기를 고르게 해주는 배려 같은 게 있을 리가.

"생각보다 훨씬 잔인한 장면이 연출될 것 같습니다. 정 힘드시다면, 이곳은 제게 맡기시고···. 당신과 리디아님은 다른 곳을 조사하셔도 됩니다."

세르펜스가 바로 옆에 서 있는 나조차 희미하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이 조사지, 실제 하는 일은 잠입이 될 것이다.

"전 여기에 남겠습니다. 가봐야 방해만 될 것 같고···."

그냥 이 자리에 남는 편이 돕는 거겠지. 아니다, 아예 여관에서 기다리는 편이 더 나았나?

내가 그의 외양이나 싸우는 모습을 본다 한들, 흑기사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급하게 나오느라, 무심코 따라나서 버렸다.

"페르센트님은 괜찮으신가요?"

"···괜찮을 겁니다."

유지스의 질문에 세르펜스가 일부러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가면이 없었다면, 부서질 듯 희미하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아련함을 극대화 시켰으리라.

그의 말에 잠깐 고민한 유지스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켰다.

─ 첫 경기는 가볍게···시작한다면 많은 분이 실망하시겠죠? 하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 투기장은 수준급의 실력자들을 다수 보유한, 수준 높은 투기장이니까요! 전 경기가 관객 여러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을 거라 자신합니다!

마법을 이용한 증폭 효과인가?

투기장을 넓게 보기 위하여 가장 뒤편의 벽에 기대어 서 있었음에도, 사회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검은 투사를 연호해댔다. 아무리 그래도 연전연승의 간판스타인데. 처음부터 등장시킬 리가···.

─ 아이고, 다들 이렇게 원하시는데! 어찌 그에 호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행···인 건가?

우리가 체크해야 할 자는 '검은 투사' 한 명뿐이다.

기이한 열망과 뒤틀린 광기가 범람하는 이런 장소에 오래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그의 전투만 끝나고 나면 돌아갈까···.'

사회자가 호명했다.

검은 투사로 보이는 거구의 사내와 그에 비하면 한없이 왜소해 보이는 사내가 경기장에 올랐다.

"싸워라!!"

"죽여라!!"

투기장이 떠나가라, 커다란 함성이 울렸다.

그를 기점으로, 사회자가 경기의 시작을 알릴 것도 없이 검은 기사가 튀어나갔다.

몇 달이고 투기장에서 굴렀다는 게 거짓은 아닌지, 상대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목을 베어버릴 듯한 기세다.

하지만 상대는 옆으로 훌쩍 몸을 날려 그를 피해낸다.

수준급의 실력자를 운운한 사회자의 멘트가 허언이 아니었는지, 내가 봐도 양측 모두 그 역량이 상당해 보인다.

'검은 투사가 너무 커서,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였을 뿐인가?'

겉으로 보이는 체격과는 정반대의 양상이 펼쳐졌다. 검은 투사가 기량으로 승부하고, 상대 검투사는 힘으로 그를 밀어붙였다.

힘이 어찌나 강한지, 그와 무기를 맞부딪힐 때마다 검은 투사의 상체가 휘청거릴 정도다.

"우우우─!! 비겁하다!!"

패도 적이고, 본능에 의존한 검술을 사용한다는 묘사가 있었던 흑기사와 달리, 소극적이고 철저히 계산된 듯. 최소한의 움직임을 보이는 검은 투사.

그런 그의 행동에 야유가 쏟아졌다.

"제가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니라면, 지금 저자는 체력을 안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맞아요. 이 투기장은 기본적으로 다섯 판의 경기가 진행되는데, 연승제 방식인지라. 아마도 남은 전투를 대비한 것일 테지요."

어쩐지 첫판부터 내보낸다 했더니, 마지막 단물까지 우려먹을 작정인가 보다.

둘의 대화를 듣느라, 잠깐 시선을 돌린 사이 '와!'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경기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승패가 갈렸다.

검은 투사의 검이 상대의 목을, 그야말로 찢어발겼다.

지금 순간만큼은 시온이 아무 능력도 없는 평범한 인간임에 감사한다.

망원경 따위의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 이상, 육안으로 저 멀리 경기장의 광경을 뚜렷하게 볼 수 없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는 보고 있기 힘들어서, 옆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대략적인 상황 판단만 가능한 나와 달리, 옆에 있는 둘은 그 잔인한 장면을 날것 그대로 목격했으리라.

'세르펜스는 담담한 것 같고, 유지스···는 가면 때문에 잘 모르겠네.'

얼추 파악이 가능해진 세르펜스와 달리, 유지스는 좀 더 지켜봐야 알 것 같다.

'그래도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 아닐 테니, 큰 충격은 받지 않았겠지···?'

경기는 계속 진행되었다.

전투가 거듭될수록 검은 투사의 몸에는 상처가 늘었고, 점차 지쳐갔다.

그럴수록 그의 검에는 처절함이 서려갔다. 결국, 악만 남아 본능에 의지하며 가까스로 버텨낸다.

최후에는 괴성을 내지르며 울부짖는 그 모습은, 한 마리의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관중들은 그 모습을 보고 열광하며, 어서 죽이라던가. 혹은, 죽으라던가.

흉흉한 언사를 쏟아낸다.

'설마 '투사'라는 게···. '싸우는 자(鬪士)'가 아니라, '싸우다 죽는 것(鬪死)'을 말하는 거였어?'

검은 투사가 힘겹게 마지막 상대의 숨을 끊어 내고, 마치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오늘도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라도 느끼고 있는 것인지, 광소를 터트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자들의 얼굴에는 살의로 가득 찬 아우성과 모순되는, 무감정한 흑색의 가면이 표정을 대신하여 자리했다.

'이래서 가면을 준 거였구나.'

가면의 의의는 익명성 보장이 아니었다.

광기로 일그러진 타인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관객들이 그것에 자신을 투영함으로써,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자각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이 서서히 광기에 중독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 * *

유지스도 나도, 상태가 썩 좋지 못하여 바로 여관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세르펜스는 참담하다는 낯을 꾸며내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다른 생각에 빠져든 것처럼 보였다.

'아까 세르펜스표 신경안정제를 거절해서 그런가?'

그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유지스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상상 이상의 잔인함에 놀랐을 뿐이라며, 이 정도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이게 정상이지.'

당장에 세르펜스를 붙잡고 훈계라도 늘어놓고 싶은 마음이지만, 지금은 그럴 힘도 없다.

'나중에 여유가 되는대로, 얘기해 둬야겠네.'

투기장을 벗어나자마자 몇 차례 토악질을 하고 난 뒤였다.

그마저도, 경기장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 덕분에 겨우 버틸 수 있었던 거다.

살의와 광기가 넘치는 그 공간에서, 피와 살점이 튀기는 장면이 또렷하게 눈에 담겼다면.

분명 그 자리에서 속을 게워냈겠지.

'여긴 정말, 내가 살던 곳이 아니구나.'

새삼 깨달았다.

평범한 현대인이, 이다지도 많은 악의에 노출될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지칠 대로 지쳐서 테이블 위에 축 늘어졌다.

'그동안 성선설을 맹신했던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의 선한 마음은 가지고 태어난다고 믿었다.

하지만 오늘 본 광경을 떠올리면, 성악설에 무게가 더 실릴 정도였으니.

검은 투사가 흑기사와 동일 인물이라면, 대륙의 인간들로부터 등을 돌릴 만도 하다.

인간이나 악마나, 똑같이 '악'이라 느껴졌다면. 복수라도 할 수 있는 악마 진형에 붙는 것도 이해가 간다.

"···사람이 죽는 것을 보자마자, 바로 구하러 뛰어가실 줄 알았는데."

유지스가 세르펜스를 힐끔대며 말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에겐 세르펜스가 악과 타협하지 않고, 어쩌고저쩌고 떠들어 놨었지.

설정 오류인가?

"···그들에게서 흑마력의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아주 미량이었으나, 확실합니다."

뭐, 그런 이유라면 그들이 죽는 것을 방관했다 하여도 크게···.

아니, 정말로?

테이블 위에 늘어져 있던 상체를 번쩍 들어, 세르펜스를 똑바로 마주했다.

"벌써 악마 숭배자들이 나타났···!다는 증거를 발견하신 겁니까?"

세르펜스는 흑기사에 관한 이야기까지는 모르고, 악마 숭배자들이 투기장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뜬소문만 접했다는 설정이었다.

거기다 대고, '지금 와있을 시기가 아닌데 벌써?' 같은 질문을 할 수야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잽싸게 말을 고쳤다.

내 말에 대한 긍정이자, 앞으로도 그렇게 말조심을 하라는 이중적인 의미로 세르펜스가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세르펜스가 허투루 저런 얘기를 꺼낼 리는 없고.'

벌써 악마 숭배자들이 검은 투사. 아니, 흑기사에게 접근한 것일까? 아니면 그러기 위해 이제 막 도착한 것일까.

"예. 아무래도 그들은 검은 투사라는 자에게 관심을 가진 듯 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미 악마 숭배 세력에 넘어간 건가요?"

조급한 목소리로 질문하는 유지스에게, 세르펜스는 처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좀 더 가까이서 확인해봐야 정확하겠지만···. 검은 투사라는 자에게서는 흑마력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몇 번이고 입을 뗄까 말까,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던 세르펜스가 긴 고심 끝에 말을 이었다.

"악마 숭배 세력은 고의로 검은 투사라는 자를 한계까지 몰아넣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뒤로 세르펜스는 자신의 의견을 뒷받침할, 몇 가지 심증을 제시했다.

검은 투사와 대적한 인간들의 움직임이 그들의 신체 조건에서 절대 보일 수 없었다거나, 육체적 능력에 비해 기교가 지나치게 떨어진다는 것.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것에 휘둘리는 것처럼 보였다나?

또한, 그들에게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라거나.

"무엇보다도···. 그 정도의 신체 능력이 밑받침된 검투사들을 사흘마다 다섯이나 구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즉, 검은 투사가 상대한 이들은 모두 흑마법에 의해 강제로 강화된 인간들이라는 의미였다.

"그 말씀은, 악마 숭배 세력에서 일부러 그를 성장시키고 있다는 뜻인가요···?"

유지스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세르펜스가 슬픈 표정을 꾸며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는 얘기인즉슨.

'흑기사의 진정한 복수의 대상은 대륙의 인간들이 아니라, 악마 숭배자들이었다는 거야?'

그들은 흑기사가 더욱 절망하고, 악에 받치고, 정신이 무너져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시에, 생사를 오가는 전투를 강제하여 그가 육체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그를 '사육'하고 있었다.

'악마를 숭배한다더니···.'

그들이 곧 악마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말이 간부였지, 결국 그는 악마 숭배자들이 준비한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러한 진실도 모른 채, 대륙의 모든 인류에게 적의를 드러내고.

자신을 기만한 이들을 지키기 위한 기사가 되어, 검을 들었다.

'이런 빌어 처먹을 [성검의 주인]의 작가 같으니!'

물론 모든 악역의 뒷이야기를 소설에 모두 담을 수야 없겠지.

심지어 최종 보스인 타락펜스의 이야기도, 죽어가며 남긴 과거 회상이 전부였으니.

간부 중 하나에 불과한 흑기사에게 그 이상의 페이지를 할당하는 것이 이상한 거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만약 누군가 나에게 단 하루,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엇을 하겠느냐 묻는다면.

나는 기필코 [성검의 주인] 작가를 찾아내어, 명치를 겁나 쎄게 후려칠 것이라 답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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