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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회개해주세요!-76화 (76/925)

76. 공작님과 투기장 (4)

놈들을 깨우기에 앞서, 그들의 품속을 뒤져 날붙이들을 회수하고 밧줄로 단단히 묶었다.

밧줄은 나나 세르펜스가 챙겨온 건 당연히 아니고,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것이다.

가장 먼저 '그것'을 운운한 녀석의 입이 가장 가볍지 않을까 싶어, 그···.

편의상 등장 순서에 따라 '범죄자 3'이니까, 범삼이라 부르자.

범삼이의 앞에 쭈그려 앉아, 그의 뺨을 철썩철썩 쳐서 깨웠다.

"으, 으으···."

"잘 잤어?"

"···어, 어떻게?!"

"어떻게는 무슨. 이미 눈치챘잖아? 미끼 작전이었던 거. 매복해있던 내 동료가 신호를 보고 와서, 너희를 때려잡은 거지."

눈을 마주치고 씩 웃으며 말하니, 그가 얼굴을 굳혔다.

"이미 우리는 다 알고 있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직접 죄를 고할 기회를 주도록 하지. 너 다음에는 옆에 쓰러진 놈들 깨워서 똑같이 물어볼 건데, 얘기가 엇갈리거나. 혹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른 소릴 지껄이면, 아주 곤란한 일이 벌어질 거야."

···라, 말하라고 세르펜스가 시켰다.

그리고 정작 그는 한 걸음 물러서서 고상 떠는 중이다.

이 녀석 때문에 본의 아니게 연기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다. 맡는 배역이 언제나 '능청스러운 놈'으로 한정되어 있긴 했지만.

웃는 낯을 유지하며 시킨 대로 말하자, 범삼이가 침을 크게 삼켰다.

"조심해야겠다, 그치?"

이것은 나의 애드립. 그것이 잘 먹혀들었는지, 범삼이의 얼굴에 약간의 식은땀이 맺혔다.

"저, 저희는 말단이라 그런 건···."

"아까 '그것'이 어쩌고 말했잖아? 사람을 납치하는 놈이 어디서 순진한 척이야?"

나라고 지금 재미로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제 세르펜스에게 흑기사의 상대로 나온 녀석들에게서 흑마력이 느껴진다는 말을 들었을 때.

단순히 악마 숭배 세력의 나부랭이인 줄 알았다.

소설 [성검의 주인]에서 악마를 숭배하는 이들 중, 일반인들도 있었으니까.

대륙이 완전히 악마들의 손아귀에 들어와, 지옥으로 변했을 때.

악마들이 자신들을 위해 희생한 이들의 영혼을 되살려, 영원한 삶과 자유, 욕망을 선사해줄 거라나?

'그냥 다 개소리지.'

이미 맛있게 냠냠 쩝쩝 먹어 치운 영혼을 대체 무슨 수로 되살리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어리석게도 그딴 개소리를 믿었다.

자신들의 영혼이 악마의 뱃속에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자신을 제물로 내던지며 자결했다.

'이번에도 그들을 이용했을 줄 알았는데.'

노예 문제가 대륙 전역에 큰 이슈가 된 지금, 더 이상의 공급은 힘들었다. 그런 와중에 한 도시에서 사흘에 다섯 명씩 실종된다면, 금세 들통이 날 테다.

'그래서 그들로부터 자원을 받았을 줄 알았는데···.'

하지만 이제 확실히 알았다. 내가 너무 순진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투기장 측은 검투사들의 머릿수를 외지인들로 채웠다.

'갑자기 사라진다 한들, 신고조차 성립되지 않도록···.'

혼자 여행 온. 아니, 어쩌면 두셋 정도 되는 일행들을 한꺼번에 납치했을지도 모른다.

여행지에서 실종된 것인지, 오가는 도중 강도나 도적이라도 만난 것인지.

이 세계에서는 그것의 확인이 무척이나 어려웠으니 가능한 짓이었다.

"저, 저희는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끄나풀 같은 겁니다! 고용된 지도··· 이제 한 5개월쯤 되었나? '그것'에 대해서 알게 된 것도, 아무것도 아니던 놈들이 갑자기 강해져서 투기장에서 날뛰는 것을 보고! 그래서 안 것뿐입니다!"

"다들 투구로 얼굴을 가렸던데, 그놈이 그놈인 걸 어떻게 알아?"

"왜 모르겠습니까, 다섯 놈 다 저희가 잡아들인 놈들의 체격과 일치하는데. 그것도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어떻게든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시키는 대로 따랐을 뿐이라는 것을 내게 어필하고 싶었나 보다.

다급한 목소리로 열변을 통하는 모습을 보니, 더 혐오스럽다.

"하···. 그렇다는 건 알고 있었다는 거네? 네놈들이 납치한 사람들의 최후를?"

"···그, 그것이!"

"이 쓰레기 새끼가─!!"

벌떡 일어나, 그를 걷어찼다.

투기장에서 한낱 유희 거리로 전락하여 비웃음 속에서 죽어간 이들이, 아무 잘못도 없는 일반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

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그저 잔인하다는 이유만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는 사실이, 안 그래도 미안해서 미칠 것만 같은데···!

"너 따위가 감히 그들을 변명거리로 삼아?!"

"죄,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입니다!"

"개소리하지 마! 결국, 그 일거리를 떠맡은 건 네 선택이잖아?"

언성이 높아지자, 옆에 쓰러진 녀석들도 부스스 눈을 뜨는 모습이 보였다.

"너희도 다 똑같아!!"

그들 역시 마찬가지로 걷어찼다.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이런식으로 일방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이렇게까지 해도, 도무지 해소되지 않았다.

상황 파악이 되기도 전에 걷어차인 녀석들은 억울하기 그지없다는 표정이었으나, 그 표정이 더 화를 돋우는 것 같았다.

"너무 흥분하셨습니다."

내가 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씩씩거리고 있으니, 세르펜스가 당황하며 내 어깨를 붙들었다.

"저도 압니다! 하지만 어제 보셨잖습니까! 투기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괜찮습니다. 이제 당신은 안전하니, 더는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임마?"

이 녀석은 지금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지러울 정도로 치밀어 오르던 열화가 순식간에 꺼지며, 머리가 띵할 정도의 싸늘함을 느꼈다.

어느 정도 인간이 된 줄 알았으나, 아직 갈 길이 멀었다.

"할 말은 많지만, 덕분에 머리가 식었으니···. 당장 급한 일도 있고, 차차 얘기합시다."

제 딴에는 자신의 위안이 먹혀들었다고 생각하는지, 세르펜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턱대고 신성력을 들이미는 대신, 이런 시도를 했다는 것 자체는 그래도 좀 장하네.

"그래서. '그것'이라는 게 뭔데? 또, 어디서 난 거야?"

"그, 그냥. 잠재력 같은 걸 끌어올리는···, 무언가? 어디서 난 것인지는 저도 잘···."

"똑바로 말 안 할래?"

"저, 정말 모릅니다! 하도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그런 게 있으니 알 것 없다고! 더이상 캐물으면 그들 대신 투기장에 세울 거라 윽박질러서, 더는 알려고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세 명 다 모르는 눈치다. 범삼이의 말대로 정말 끄나풀 중의 끄나풀이었구나···.

"흑마력으로 조제한 마력 시약입니다."

"···네?"

"모든 생명력을 단숨에 불태워서, 신체적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드는 겁니다. 몇 시간 전에 1제를 투약하여 흑마력을 침투시켜 생명력을 미리 끓어오르게 한 뒤, 경기 시작 직전에 2제를 투약하여 한 번에 격발시키는 방식입니다."

"···예?"

"번거롭기도 하고, 2제를 투약하기 전까지 고통을 느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흑마력이 침투하고 나서 꽤 시간이 흐른 뒤이기 때문에, 효과가 나타날 때는 그 흔적이 적게 남는다는 장점이···."

어째서인지 '그것'에 대한 정보를 세르펜스가 줄줄이 읊어댔다. 것도 무진장 자세하기 그지없다.

"자, 잠깐만요? 그런 정보는 대체···."

"영지 곳곳에, 이런게 숨겨져 있었습니다."

세르펜스가 코트 형태의 로브 자락을 젖혔다. 그 안쪽에 비켜 멘 가방을 열어, 내가 그 내부를 볼 수 있도록 들었다.

그 안에는 중지 손가락 길이의 시험관 같은 것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얼마나 꽉꽉 채워놨는지, 빈틈이 거의 없어 꺼내기도 쉽지 않다.

자세히 보니 마개에 '1'과 '2'라는 숫자가 적혀 있고···.

"페르···? 이거 빈 병도 있는데요?"

"효능을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아서 사용해 봤습니다. 하지만 가방에 자리가 남길래···."

저 말이 길 가는 사람을 잡아다 강제로 주입했다는 얘기는 아닐 테고. 그렇다는 건.

"빈 병을 왜 들고 다니느냐는 질문이 아니잖습니까! 이, 이런 뭔지도 모를 것을 왜 마셔요! 길가에 떨어진 거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라는 것도 안 배웠습니까?!"

"어차피 이 정도의 흑마력은 제 몸에 들어오는 즉시 사라져버리니, 상관없습니다."

"그럼 효능은 어떻게 알아내셨는데요?"

"적당히 체내 신성력을 운용해서, 길을 내주면···."

"저한테 뭐라 하기 전에 당신 안전부터 챙겨, 이 사람아!!"

어이가 없어 그에게 소리치자, 그가 불퉁한 낯으로 '당신과 제가 어디 같습니까?'라며 툴툴거렸다.

맞는 말이긴 한데, 일부러 흑마력이 몸 안에서 날뛰도록 내버려 둔 건 처맞을 말이었다.

'셀프 고문도 정도가 있지!'

세르펜스가 너무 강자라 때릴 수 없을 뿐, 그가 일반인이었다면 등짝이라도 후려치며 한탄할 노릇이다.

"그쪽 분께서 저희보다 더 잘 아시는 것 같은데, 저희는 이제 그만 풀어주셔도···."

"닥쳐!"

"······."

그나저나 이 녀석들을 어찌한담?

당장 경비대에 넘기자니, 한통속이라 우리가 뒤를 캐고 있다는 정보가 새어나가 증거를 없애려 들 테다.

그렇다고 풀어주어 도망가게 하자니, 이딴 놈들을 다시 사회에 풀어준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 정말 착하게 살겠습니다!"

"다시는 범죄 같은 것과 연관되지 않고 살아갈 테니···."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깨있었던 범삼이는 물론, 범일이와 범둘이도 사태 파악을 끝내고 사죄해왔다.

이 녀석들을 어찌해야 하나 싶어 세르펜스에게 눈길을 주니, '네가 죽이지 못하겠다면, 나라도 대신 죽여 줄까?'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다.

"아뇨, 일단. 어디 좀 가둬두고···. 나중에 생각해봅시다."

이딴 놈들 때문에 내 손을 더럽히기도 싫고, 그 업보를 세르펜스에게 전가하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나는 어디까지나 미수에서 끝났으니, 이 녀석들의 생사를 판단하는 것은 나보다는···.'

* * *

가둬두자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르펜스가 그들을 도로 기절시켜버렸다.

후두부를 어찌나 세게 내려쳤는지, 나는 세르펜스가 그들에게 기절을 빙자한 죽음을 선사하려는 줄 알았다.

'저 정도면 몇 시간은 그냥 죽은 듯이 뻗겠는데?!'

졸도한 세 명을 들고 여관에 들어가면서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하나 고민했으나, 그것은 부질없는 고민이었다.

내가 먼저 방에 올라가 창문을 열어주니, 세르펜스가 알아서 몰래 들고 옮겼다.

"아직 리디아님은 안 오신 모양입니다."

"···으음."

기절한 세 명을 대충 구석에 구겨놓은 세르펜스가 내 눈치를 보며 힐끗거렸다.

"왜요? 배고파요?"

"그런 게 아니라···."

"이상한 거로 배 채워서 배부른 게 아니라면, 이거라도 좀 드시죠?"

식사 대용이 될 것을 결국 구매하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이 짐가방에서 초콜릿을 꺼내 그에게 던져줬다. 배는 안 차도 당과 열량은 채워주겠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초콜릿을 받아든 세르펜스가 그것을 오독거리며, 또다시 눈치를 봤다.

'저건 '세르펜스 도주 전 증후군'은 아니고, 그냥 할 말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가만두면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유지스가 돌아올 기세다.

"우리 사이에 못 할 말이 어딨습니까? 그냥 편하게 말씀하세요, 편하게!"

"···그래. 오늘 그대가 했던 말들만 생각해 보아도···. 심각할 정도로, 못 할 말이 없는 것 같긴 합니다."

'그럼 내가 그런 말을 안 하게끔, 네가 잘했어야지!'라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지금은 세르펜스의 얘기를 들어야 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당신은 어째서 신성력을 거절하셨던 겁니까? 악몽에 시달리면서까지, 그래야 할 이유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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