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공작님과 검은 투사 (1)
"아니, 생각해봐요. 인간들에게 그런 갖은 고초를 겪었는데, 어디 같은 인간인 제가 떠들어봐야 귀를 기울이기나 하겠습니까?"
"일리는 있으나, 엘프가 버젓이 있는데 어째서 제게···."
"아니, 끊지 말고 들어봐요? 몸도 마음도 지쳐서, 차라리 어둠에 의탁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통받고 있을 때! 천사가 빛을 뿌리며 나타나,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다고 생각해 보시죠!"
"그 무슨 개···, 아니. 계속하십시오."
순간, 세르펜스의 곱고 순한 말만 하는 고운 입에서 멍멍이 소리가 나온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요즘 몸이 허해서 헛것이 들리는 모양이다.
"아무튼 천사가 나타나 자애로운 얼굴로,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다며 이해해 준다면. 천상의 목소리로 이제는 괜찮다며 위로해 준다면! 와···, 없던 신앙심까지 생기겠네! 영혼까지 정화되는 기분일 겁니다. 안 그래요?"
"···으음. 뭐, 세세한 내용 넘어가겠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차원 궤도상, 아무리 저라도 천사를 소환해내는 건 무립니다."
"대신 천사처럼 생겼잖아요?"
이건 내 개인적인 감상평이 아니었다.
[성검의 주인] 작가 피셜 공식 설정이다.
공작저 사람들도 그를 '현 대륙에 강림한, 단 한 명의 천사'라 묘사했으니, 세르펜스 본인도 잘 알고 있을 거다.
내 말이 어디 틀렸느냐는 표정으로 당당히 그를 바라보니, 세르펜스는 '무슨 헛소리 인가했는데, 그냥 개소리였어.'라고 말하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는다.
"어찌 됐건, 저는 못 합니다."
"왜죠!"
"하아···. 제가 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기만입니다."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쉰 그가, 씁쓸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읊조렸다.
느닷없는 세르펜스의 자기비하에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니,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이전이었다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그런 식으로 행동했을 겁니다. 많이 아팠냐, 이해한다, 괜찮아질 거다. 그런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입에 발린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눈속임이고 기만일 뿐. 와닿지 않을 거다. 누군가의 마음을 열고,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은···."
그의 맑은 녹색의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나보다는 당신이 더 적임입니다. 그편이 나을 겁니다."
"하지만···."
"애당초, 저는 그대가 무슨 생각으로 그자를 구하고자 하는지 그 이유조차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어쩌면, 대륙의 크나큰 적이 될지도 모르는 자를. 당신은 어째서 끌어안으려 하십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왜인지 모를 간절함이 서려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결의 너머. 무언가를 향한 바람이 언뜻 스친다.
"그렇다 해서 계속 고통 속에 둘 수는 없잖아요. 아직 행복해질 수 있는데, 그걸 알지 못하여 절망의 구렁텅이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꼴을 어떻게 그냥 지켜봅니까?"
"···그것뿐?"
"그거뿐이면 안됩니까?"
"안될 리가."
기대하던 답을 얻은 듯. 마치 자신을 향한 위로의 말이라도 얻은 양, 안도 어린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느낀 건 내 착각에 불과하겠지···.'
흑기사를 지칭한 것임이 분명한 그의 질문이, 세르펜스의 입장과 너무나도 맞아떨어져. 그 대답 또한 둘 모두를 지칭하는 것이 되어 버린 탓에.
그냥 나 혼자 그렇게 느낀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착각하고 계시는 듯한데. 그는 뼛속까지 기사인 잡니다."
소설 [성검의 주인]에서도 그러했다.
악마와 계약을 맺어 그 힘을 받아들이고서도. 그 힘을 사사로이 쓴 적은, 복수할 때뿐이었다.
분노로 미쳐 날뛰며, 투기장의 관객들과 관련자들을 학살하고.
한때 충성을 바치며 지켰던 영주의 일가와 기사들을 살해한 것이 전부였다.
그 이후로도 악마는 끊임없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오직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악마 숭배자들.'
그들이 숭배하는 것은 악마인데, 악마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오직 그들의 말만 따랐다.
왜냐하면···.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충의를 바칠 수 있는 주군입니다."
그를 투기장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악마와 계약을 맺는 것을 도와 그에게 복수할 힘을 주었으니.
그는 그들을 주인으로 여겼다.
비록 서약은 올리지 않았으나, 그들을 마음속 깊이 따르며. 그들을 지키고, 명을 따르기 위해 몸을 던졌다.
"···결국 천사 어쩌고 하던 것은 정말 그냥 개소리였군."
"개···. 그래도 절반은 진담이었습니다."
세르펜스가 가당찮은 말은 그만두라는 듯, 코웃음을 친다.
아니, 진짜! 어디 개 짖는 소리 좀 안 나게끔 해야지, 안 되겠다.
"그래서 결론은. 나더러 그자의 주군이 되라, 이건가?"
"바로 그겁니다!"
"왜 당신이 아니라?"
"제 말을 어디로 들으신 겁니까? 그에게 필요한 건 친구나 보모 같은 게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는···! 아니, 됐습니다. 대답하지 마십시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무슨 답이 나올지, 나도 알고 세르펜스도 알았다.
"아무튼 저는 누군가의 주군이 될 처지도, 그릇도 못 됩니다."
"그 상상력 뛰어난 엘프의 설정을 따르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나?"
"안 그래도 그 망상, 언제 어떻게 깨부숴야 하나 고민 중이니까 더는 키우지 말아 주실래요?"
결국 세르펜스와 나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리하여 나온 결론은 다음과 같다.
[ 각본 : 시온 / 교정 : 세르펜스 / 주연 : 세르펜스, 검은 투사(흑기사) ]
그 외 기타 돌발 상황은, 주연 배우도 겸한 세르펜스의 애드립으로 커버하는 것으로 결정 났다.
"이거야말로 진짜 기만 아닙니까?"
"당신이 내게 떠넘긴 거면서 그런 소릴 하는 건가?"
"그렇긴 한데···."
최종 보스를 뒤에서 움직이는 흑막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 그런다.
"그렇게 꺼림칙하면, 이런 거 쓰지 말고 당신이 하던가."
"아니 그것도 좀···."
작성된 대본은 세르펜스가 암기 후, 벽난로에 태워 완전하게 재로 화했다.
둘이 머리를 맞대고 대본을 열심히 작성하다 보니, 어느새 아침이 되어 있었다.
드디어 여관 주인이 깨어나 식사 주문이 가능해졌기에, 잠은 조금 더 미루고 음식부터 주문했다.
"어휴, 리디아님이 대신 나가주셔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잘 시간이 없거나, 계획을 못 세우거나 둘 중 하나일 뻔했네요."
"그런가? 나는 당신이 노린 건 줄로만 알았는데."
노리다니, 그건 대체 무슨 말이지?
나와 세르펜스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으면, 그 사이에서 유지스가 눈치 보여서라도 떠밀리듯 나가도록 내가 유도하기라도 했다는 말인···.
"······."
"아닌가?"
"···아니었는데, 맞는 것 같아요."
이 자리를 빌려, 그녀에게 사죄해야겠다.
그녀라면 그냥 정중히 부탁해도 들어줬을 텐데, 몹쓸 짓을 한 것 같다.
"그리고 한가지. 이름 틀리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애칭으로 부르려 하는 건 그만두십시오."
"앗!"
젠장, 들켰다.
세르펜스가 식사와 함께 나온 빵을 찢으며 말하는 모습이, 계속 그따위로 굴다간 너도 이렇게 찢어주겠다는 말처럼 들려 괜히 섬뜩했다.
'처음부터 그러려 한 건 아닌데···.'
시작은 실수였다. 하지만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기회 삼아 노려본 것이다.
역시 이런 식으로 빙빙 돌리는 방식은 내겐 맞지 않는가 보다.
"그래서, 직접 들어보니 뭐가 가장 마음에 듭디까?"
"하아···. 뻔뻔하긴."
미간을 찌푸린 세르펜스가 이마를 짚으며, 깊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냥 이름이 좋으니, 이름으로 불러주십시오."
"세르펜스?"
"···네, 그거면 됩니다."
죽어도 나에겐 애칭으로 불리고 싶지 않다거나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정말로 다른 건 필요 없고, '이름'만으로 족하다는 듯한 어투.
'이름하니 떠오른 것인데, 내가 마지막으로 '이름'을 불린 지가 벌써···.'
처음 몇 달간은, 모든 게 낯설어서.
나라는 인간이 이대로 사라지는 게 아닐까 덜컥 겁이 나, 자기 전 내 이름을 혼자 머릿속으로 되뇌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더라?'
수상하든 말든, 이 녀석 앞에서라면 편하게 나 자신을 드러내고 행동해도 괜찮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부터인가?
'리벨론 경'이라는 육체의 이름이 아니라, '당신'이라 불림으로써. 그냥 나라는 존재로서 그를 마주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간혹 이름을 부를 때면 정신이 확 들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유일한 명칭이 바로 이름이다. 고유 명사라는 단어가 왜 있겠는가?
'···애칭이 부르는 사람이 자신을 특별하다 느끼게 만든다면, 이름은 불리는 사람을 유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다른 누군가의 무언가가 아니라, 그냥 그 자체의. 유일한 존재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어쩌면 그는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중에 그걸 바라왔는지도 모른다.
'성검의 주인이라거나, 세피라거나, 프라시더스 공작이라거나···.'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굴레에 묶인 존재가 아닌. '세르펜스'라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 존재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냥 갑자기 떠오른, 개인적인 의견과 추측일 뿐이지만.'
본인도 원하니, 억지로 변형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역시 애칭 따윈 집어치우죠? 세르펜스라 부르면 되는 거죠, 세르펜스?"
"그래. 하지만 제국에 돌아가기 전까지는, 장난치지 말고 가명으로 불러라."
"네!"
"돌아가서도 남들 앞에서는 부르지 말고."
"······."
제한이 너무 많다. 더러운 신분제 사회.
* * *
다시 일어났을 때는, 오후 6시경이었다.
'완전 푹 잤네···.'
어젯밤 악몽에 시달려 수면 부족 상태에서, 소매치기 쫓는다고 달리고. 거기다 대본 쓴다고 아침까지 뜬눈으로 버텼으니, 10시간 넘게 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에 반해 세르펜스는 한참 전에 일어난 모양이다.
언제든 나갈 수 있도록 옷차림을 모두 갖추고 여유롭게 책까지 읽고 있었다.
구석에 찌그러진 3인도 이미 깨어나 있었다.
눈알을 데록데록 굴리는 것이, 마치 세르펜스의 눈치라도 보는 듯하다.
'아니지, 보는 게 당연한가?'
자신들을 한방에 기절시켜 잡아 온 사람이니, 신경 쓰일 수밖에.
"리디아님은요?"
세르펜스는 대답 대신, 손바닥보다 작은 카드를 건넸다.
[임무 완료]
적혀있는 것은 고작 두 어절에 불과한 짧은 문자.
그 옆에는 동글동글 귀엽게도 생긴 유자가 세 알 그려져 있었다.
"언제 돌아왔는지도 아십니까?"
"약 5시간 전?"
"아직 좀 더 주무셔야겠네요."
"···방에서 느껴지는 기척으로 미루어 봤을 때, 이미 일어난 것 같습니다."
세르펜스가 어딘가에 잠시 집중하는 듯 하더니, 그리 대답해왔다.
[성검의 주인] 공식 미인 1, 2위를 다투는 둘이 이러고 있는 것을 봐서, 미인은 잠꾸러기라는 말은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씻고 나오자, 이미 나갈 준비를 끝마친 듯한 유지스가 방에 와있었다.
"식사 먼저 하고 가죠?"
"당신이 씻으시는 동안 주문해 놓았습니다."
그 말을 할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세르펜스가 바로 대답했다. 유지스는 어째 아리송한 눈치다.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아직인가?
"그런데 정말 저희가 모두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건가요? 저 사람들은···."
유지스가 방구석 3인조를 힐끗거리며 물었다.
"어차피 저는 전력이 안 되니까, 제가 남아서 감시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각본은 이미 세르펜스에게 넘겼다.
그러니 굳이 따라갈 필요성을 못 느껴서 그리 말했으나, 나는 이미 신용을 잃은 듯하다.
이번엔 또 무슨 사고를 칠 줄 알고 두고 가겠냐는 눈빛으로 그가 나를 바라 봤다.
물론, 그 시선과 달리 표정만은 오늘도 자비롭기 그지없지만.
"저자들이라면 괜찮을 겁니다. 자신들의 죄를 깊게 반성하고 있다고. 어떤 심판을 받게 되던 모두 받아들이겠다며, 참회해 왔습니다."
···내가 잠든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