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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회개해주세요!-80화 (80/925)

80. 공작님과 검은 투사 (2)

붉은 스튜를 한 수저 떠올린 세르펜스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아차 싶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리디아님. 혹시 잠입하셨을 때, 커다란 소각로나 소각장 같은 것을 보신 적 있습니까?"

"네? 아뇨, 그런 건 못 봤어요."

"그렇다면···. 죽은 이들의 시체가 어떻게 처리되는지에 관한 자료는 있었습니까?"

갑자기 밥 먹다 말고 이 무슨 살벌한 얘기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녀석은 대체 뭘 보고 뭘 떠올린 거야?

밥맛이 뚝 떨어진다.

그의 질문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유지스가 고개를 가로젓다가, 번뜩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화들짝 놀란다.

'아니, 뭔데 늬들만 아는 거야?'

추리 만화를 봤을 때나 느꼈던 감정을 여기서 재회하게 될 줄이야.

그녀의 반응으로 자료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세르펜스가 이번에는 방구석 삼인방에게 시선을 보냈다.

셋 다 나란히 고개를 내젓는다.

나에게도 말해달라는 시선을 팍팍 날리니, 세르펜스가 얼굴을 굳히며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악마 소환을 위한 제물. 혹은, 흑마법 관련 매개체로 쓰기 위해 악마 숭배 세력에서 시체들을 빼돌렸을 가능성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그날 본 장면이 너무 충격적이라, 차분하게 그런 걸 떠올릴 정신이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영문도 모른 채 납치되어, 뭔지 모를 약물을 강제로 투여 당하여,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수많은 사람들의 유희 거리가 되어 농락 속에 죽어갔다.

원한을 가득 안고 죽은 자의 시체는, 악마 숭배자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재료다.

"제가 잠입했었을 때는 이미 시체 같은 건 없었어요."

"분명 경기 직후 옮겨졌을 겁니다."

세르펜스가 긴 한숨을 내쉬며 수저를 내려놓았다.

확고한 증거는 없으나, 심증이 너무나도 확연하여 의심할 여지도 없다.

"···모두 제 탓입니다. 흑마력의 기운을 느꼈을 때, 바로 뒤를 쫓았어야 했는데···. 거기까지 제 생각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본래대로 라면···."

진심으로 분한 듯,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의 실수에 번민했다.

'본래대로는 또 뭔데···.'

이전이라면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걸 보고 '저 시체는 누가, 어디로 가져가는 걸까?' 따위의 고찰을 했을 텐데, 그걸 못하게 되었다 이건가?

그 정도로 감정이 메말라야만 얻을 수 있는 완벽 따윈 필요 없다.

하지만 실수가 익숙하지 않은 그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녹색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아니, 실수 한 번 했다고 버릴 리 없잖아···?'

나도 유지스도 눈치채지 못한 일이다.

방금 세르펜스가 언급하고 나서야, 겨우 떠올린 것을.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를 나무란단 말인가.

괜찮으니, 안심하라는 시선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그게 왜 당신 혼자만의 탓입니까? 그리고 실수 좀 하면 어때요? 세상에 실수 한번 안 하고 사는 인간이 어디 있다고."

"······."

정말 그래도 되는 거냐고. 실망하지 않았냐고 되묻는 듯한 눈빛을 하는 그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불안정하게 요동치던 감정이 조금 가라앉는 게 보인다.

"맞아요! 저도 이제야 눈치챘는걸요. 페르센트님이 아니었다면 영영 떠올리지 못했을 거예요."

"···아."

유지스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제야 주위가 보이기 시작한 세르펜스가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표정을 가다듬었다.

하나, 그 속에 내비치는 우울함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그것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유지스가 보기에도 그러할 테다.

"그런 얘길 듣고자 한 말은 아니었지만···, 감사합니다. 그보다,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가 민망한 듯, 서둘러 말을 돌렸다. 저 모습을 보니,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긴 한 모양이다.

식사를 다시 이어가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 * *

본래대로라면 투기장을 무너뜨리고, 검은 투사만 쏙 빼 와서 바스툴 왕국을 뜰 생각이었다.

'하지만 악마 숭배 세력이 이렇게 나왔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우리는 계획을 대폭 수정해야 했다. 공론화할 필요성이 있었다.

아까 세르펜스가 얘기했던 대로, 시체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점 때문. 그걸 추격하자고 경기를 한 번 더 열어 피해자를 늘릴 수는 없다.

투기장 관계자 중 시체를 빼돌리는 데 도움을 준 인물이야 있겠지만, 그것이 본의든 아니든 자칫하다간 악마 숭배자로 몰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곱게 죽지는 못하겠지···.'

곧 죽어도 아니라고 잡아뗄 거다.

그걸 한명 한명 탈탈 털어 뒷조사할 시간은 없었다.

'어쩌면 다른 투기장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이 사실을 공론화하여 전 대륙이 경계해야 한다.

공공연하게 일을 처리하는 만큼 그들을 잡아낼 가능성은 적어지겠지만, 괜히 비밀리에 처리한다고 했다가 쉬쉬하고 덮일지도 모른다.

'수면으로 끌어올려, 최소 그들이 제물을 모으는 것이라도 방해해야지.'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곳은 제국이 아니라는 점.

남의 나라인 것은 둘째 치고, 우리는 현재 신분을 숨기고 밀입국한 상태.

'도움받기는커녕, 들키면 곤란해지겠지?'

악마 숭배자와 관련된 증거물도 찾아서 명분은 얻었지만, 비밀로 했다는 것 자체가 대놓고 너희 왕실을 못 믿겠다고 광고하는 꼴.

'못 믿어서 몰래 온 건 맞나···?'

아무튼, 수틀리면 가장 먼저 배반할 게 분명한 바스툴 왕국을 상대로 밑지는 일은 만들지 말아야 한다.

이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작전의 순서와 그 주체를 조금 변경하기로 했다.

'표면적으로 대신 나서 줄 사람. 이 문제에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사람.'

검은 투사를 만나, 그에게 협조를 구하는 것을 첫 번째 목표로 잡았다.

모든 일을 끝낸 후 찾아가 느긋하게 설득하려 했던 애초의 계획과는 완전히 틀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와 세르펜스는 검은 투사를 설득하기 위해 투기장에 잠입했고, 유지스는 도주로 차단을 위한 사전 준비를 위해 밖에서 작업 중이다.

이는 그녀를 따돌리는 게 아니라, 적재적소를 고려한 배치였다.

"내가 생각한 잠입 액션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왜, 있잖은가.

모퉁이를 돌 때마다 벽에 슬쩍 붙어 눈만 빼꼼 내밀며 경계한다거나.

천장 모서리 같은 곳에 붙어있다가 경비병이 지나칠 때, 떨어지며 목덜미를 후려 기절시킨다거나. 기타 등등.

'차 한 대 없이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는 느낌이네.'

내비게이션이 정체 없는 구간을 안내하고, 전방의 과속 방지턱을 미리 알려주듯.

주위의 기척을 파악한 세르펜스가 알아서 다른 길로 돌아가거나, 반드시 지나야 할 길에 있는 자들은 먼저 튀어 나가 정리하는 식.

'오늘도 세르버스의 운행은 탄탄대로구나.'

나는 그저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느긋이 걷기만 했는데, 어느새 지하의 검투사 수용소에 도착해있었다.

검은 투사는 그곳에서도 심부에 위치한 격리실에 갇혀있다.

"여깁니까?"

차갑고 두꺼운 철문 앞에 서, 세르펜스에게 물었다.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성력을 뽑아내, 커터칼처럼 얇은 두께로 응축시켰다.

그것을 문틈에 밀어 넣고 아래로 내리그으니, 아무 저항도 없이 잠금장치가 잘려나갔다.

- 끼기기긱─. 쾅-.

듣기 싫은 쇳소리를 울리며 묵직한 철문이 열렸고, 우리가 안에 들어서기 무섭게 육중한 소리를 내며 도로 닫혔다.

'갇히는 건 아니겠지?'

슬쩍 밀어보니 잘 열렸다.

격리실 안은 빛이라곤 한 줌도 찾아볼 수 없었기에, 세르펜스가 빛나는 신성력의 구체를 공중에 띄웠다.

그러고 나서야, 사지를 결박당한 채 벽에 기대듯 앉아있는 검은 투사의 모습이 드러났다.

"크···흐···."

재갈이 물린 잇새로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우리를 보며 숨을 몰아쉬는 그 모습은 지쳐 보인다기보다, 살의에 의한 고양으로 흥분한 것처럼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황금빛 눈동자가 형형하게 타올랐다.

'살벌하네···.'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다. 반사적으로 세르펜스의 등 뒤로 숨고 나서야, 그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진정하십시오. 저희는 그쪽을 구하러 온 겁니다."

쇠사슬이 철그렁거리며 거친 마찰음을 내었다.

세르펜스의 어깨너머로 슬쩍 보니, 검은 투사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려 경계하는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벽에 뿌리를 내린 두꺼운 쇠사슬이 그의 손발을 억제하지 않았더라면, 헛소리하지 말라며 당장이라도 달려들었을지도.

'이 철문이 열릴 때마다 누군가 구하러 와주지 않을까 기대했고, 그 기대는 매번 깨졌을 테니···.'

어디 깨지기만 했으랴?

목숨을 위협당하고, 다른 이의 목숨을 끊어내야만 했으니.

나라면 차라리 이 철문이 영원히 열리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저렇게 경계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를 구하러 온 사람이라는 것만 믿게 하면, 경계가 좀 풀리려나···?

"시···, 리벨론 경?"

내가 뒤에서 세르펜스가 눌러쓴 후드를 잡아 끌어내리니, 그가 나를 돌아보며 지금 뭐 하는 짓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내친김에 그의 콧대에 걸쳐진 안경도 벗겨냈다.

'자, 자~! 어서 자기소개 시작!'

따위의 말을 흑기사 앞에서 외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말 대신 행동으로 의사를 전달해 보았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눈치챘는지, 세르펜스가 들릴락 말락 하게 작은 한숨을 내쉬며 신성력을 일으켰다.

순백에 가까운 은색 휘광이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며, 머리카락에 스며들었던 마법 시약을 강제로 밀어냈다.

빛이 사그라들자, 그곳에는 오랜만에 보는 청은빛 머리칼이 자리하였다.

"신성 루멘 제국의 세르펜스 A. 프라시더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보좌관인 시온 리벨론 경입니다."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우리 공작님이 알아서 다 해결해 주실 겁니다!"

"···리벨론 경. 잠시 잊으신 듯한데, 저희는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세르버스의 주행 능력에 취해, 잠시 망각했다.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것은 검은 투사였고, 세르펜스나 유지스의 존재는 비밀에 부쳐져야 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대륙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비밀 결사 단체 '일루미나티'로서···.

'아, 이거 이름 못 바꾸나?'

계획을 세우면서 유지스가 이왕이면 구체적으로 정해두는 게 좋지 않겠냐며, 비밀 결사 단체명을 고심하길래 반사적으로 내뱉은 게 화근이었다.

"물론 저희의 청을 거절하신다고 하여도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시던, 저희는 이 투기장을 무너뜨리고, 그쪽을 포함···. 아직 살아있는 피해자들을 구해낼 겁니다."

"······."

"우선···, 가까이 다가가도 되겠습니까?"

세르펜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의 등 뒤에 서 있었기에 표정은 보이지 않으나, 분명 온화하고 따뜻한. 안도를 불러일으키는 그런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세르펜스가 한 걸음, 한 걸음. 좁은 보폭으로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만큼. 검은 투사의 살기로부터 지켜주던 세르펜스가 내게서 점차 멀어졌으나, 아까와 같은 압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타락펜스로 돌아선 것도 아닌데, 성스러운 저 모습을 보고도 살의가 들끓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암!'

생긴 것이 곧 신분증이나 다름없는 세르펜스를 보고, 감히 사칭이란 생각은 떠올리지도 못할 것이다.

검은 투사의 얼굴을 살폈다.

우리를 향한 살기만 거뒀을 뿐, 여전히 분노와 원망, 비관과 통한 등. 부정적인 감정으로 똘똘 뭉쳐 일그러진 표정이다.

하지만 그의 눈빛 속에 당혹이라는 새로운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럴 만도 하지···.'

선택의 날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이다. 세르펜스가 먼 타국에 와있을 줄 누가 의심이나 해봤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세르펜스가 자신을 구해주겠다며 나타난 것이.

또,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지친 자신이 만들어 낸 꿈이나 환상 같은 게 아닐까, 의심스럽고 혼란스러워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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