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공작님과 검은 투사 (3)
어느새 검은 투사의 바로 앞까지 다가간 세르펜스가 한쪽 무릎을 꿇어앉으며,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먼저 재갈을 풀겠습니다."
세르펜스가 조심스럽게 그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내었다.
입에 물려있던 이물감이 사라지자, 그가 '으, 아으···.' 소리를 흘리며 어색하게 입을 움직여 보았다.
갈라질 대로 갈라진. 아주 건조하고 메마른 소리였다.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까?"
"으, 으윽···. 저, 정말로···, 당신···이?"
그의 손을 억압하던 수갑을 세르펜스가 신성력으로 깔끔하게 잘라냈고, 미리 챙겨왔던 물병을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심각한 갈증을 느끼고 있을 텐데도, 검은 투사는 그것을 바로 열어 마시지 않았다.
그저 멍한 눈으로 빤히 내려다보았다.
'마치,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 하는 사람처럼···.'
긴 시간 동안, 그의 손에 들렸던 것이라고는 사람을 죽이는 무기뿐이었기 때문일까?
다른 무언가가 손에 쥐어졌다는 것이, 몹시 낯설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아···."
절로 탄식이 흘러나온다.
세르펜스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내가 소리를 내어 쳐다보았다기보다는, 무언가 의견을 묻는 듯한 표정.
검은 투사는 여전히 물병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내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여주니, 세르펜스가 작은 눈짓으로 화답했다.
다시 그의 시선이 검은 투사에게로 향한다. 세르펜스의 섬세하고 새하얀 손끝에 신성력이 맺혔고, 검은 투사의 투박한 구릿빛 이마에 맞닿았다.
전반적으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신성력은 그의 이마에만 머무르지 않고, 전신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십니까?"
빛이 사그라들었다.
그의 미간에서 손을 뗀 세르펜스가 손수 물병을 열어, 다시 그의 손에 쥐여주며 질문했다.
초점 없이 멍했던 눈동자가 제빛을 되찾았다.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물병과 세르펜스를 번갈아 보다가, 그것을 한 모금 힘겹게 마시고 입을 여는 모습이 보였다.
"저는···윈스톤 레드포드··· 바스툴 왕국의, 말룸 백작가의 기사···였, 으득."
신성력에 의해 일시적으로 진정할 수 있었지만, 되짚은 기억으로 인해 다시금 분노가 치솟은 듯하다.
두 눈에서 다시금 열화가 치밀어 올랐다.
- 쾅-!
검은 투사···였던 윈스톤이 '젠장-!!'이라는 외마디 욕설을 내지르며, 격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커다란 굉음이 울리며, 바닥의 타일이 깨지며 돌조각이 비산했다. 개중에는 붉은 피가 묻어난 것도 있었다.
'아무리 단련이 됐다 한들, 사람 손이니···.'
그의 손은 단단했지만, 오러도 두르지 않은 맨손으로 돌바닥을 내리쳤는데 멀쩡할 리 없었다.
찢기고, 깨지고.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괜찮습니다, 레드포드 경. 말씀하시기 힘드시면 더는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말과 반응으로, 그의 과거와 내가 알려주었던 흑기사의 과거가 일치한다고 판단한 세르펜스가 그의 말을 끊어냈다.
짧게 주저하는 듯하더니, 윈스톤의 주먹에 자신의 손을 올리고 또다시 신성력을 불어넣어 그를 치료했다.
내가 그에게 그러했듯, 세르펜스가 윈스톤의 손을 토닥거렸다.
'정말 공감하고 동정해서 저러는 거야, 아니면 그냥 날 따라 하는 거야?'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내가 그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사실 그냥 추론에 가깝다.
그의 표정에서 나타나는 미세한 변화를 보면서, 이런 상황에 그의 성격이라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하고 유추하는 것뿐.
'이마저도 세르펜스가 느끼는 감정들이 한정되어있고, 단순해서 가능한 짓이지만···.'
그러니 지금처럼 등을 돌리고 있거나, 조금 복잡하게 감정이 얽힐만한 상황이면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세르펜스가 진심인지 아닌지. 윈스톤이 그것을 알아챌 수는 없겠지.
"···'경'이 아닙니다. 저를 이곳에 팔아치운 자는 주군···의 아들입니다. 당연히 주군도 그 사실을 눈치챘을 터인데. 그런데도 저는 아직 이곳에 있습니다···! 주군에게 버려진 기사를 어찌 경이라 칭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외치며 윈스톤이 이를 악물었다.
자신을 팔아치우고, 그를 방관한 자를 향한 분노와 혐오로.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적개심을 불태웠다.
몇 걸음 떨어져 있는 내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기사는 기사도를 지키는 자입니다. 주군을 모셔야만 기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의 기사도는 다른 누군가의 인정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겁니까?"
이건 내가 써준 대사가 아니다.
흑기사가 스스로 기사임을 부정할 줄은 몰랐고, 그 전에 기사도 같은 걸 내가 자세히 알 리도 없으니.
세르펜스의 즉흥 연기다.
"그···건···!"
"레드포드 경의 기사도는. 그런 허울뿐인 겉치레에 불과한 겁니까?"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지만···. 크흑."
말문이 막힌 듯. 계속해서 '하지만'을 중얼거리며, 분루(憤淚)를 흘렸다.
자신의 기사도를 관철한 결과. 지금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여, 우직하기만 했던 자신을 후회하고 있는 것인지.
자신은 충성을 바쳤지만, 그 결과 이렇게 돌아왔다는 것이 억울하고 원통했던 탓인지.
그것을 확실히 정의하기는 어려웠다.
"아니라면 상관없지 않습니까. 모시는 주군이 없더라도, 경은 여전히 기사입니다. 자격을 잃은 것은 레드포드 경이 아닙니다. 그들이 누군가의 주군이 될 그릇이 못 되었던 것뿐."
자애롭고 따사로운 세르펜스의 목소리가 음습하고 차가운 격리실 안에 퍼져나갔다.
'처음부터 대본 같은 건 필요 없었던 거 아냐?'
자신은 입에 발린 소리밖에 못 한다고 징징대던 주제에···.
세르펜스가 말했던 대로, 그가 하는 말들은 판에 박히고 뻔한. 진부한 이야기가 맞았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
'하지만 당연한 거니까. 더 받아들이기 쉬운 거겠지.'
누가 들어도 당연한 건 당연한 거다.
먼저 배신한 놈들이 잘못한 거지, 배신당한 사람이 잘못한 게 아니질 않은가. 정말 당연한 얘기다.
이를테면···.
'눈앞에 상처받은 아이가 있으면, 구해주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원래 이런 정석적인 이야기가 사람의 마음을 더욱 파고들기 쉬운 법이다.
'나는 그런 계산 없이, 그냥 진심을 담아 말했던 것뿐인데···.'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부터 열까지의 모든 과정을 분석하고 앉았다.
'그런데 뭔가 좀 싸한데?'
왠지 모를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키며, 윈스톤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나는 그것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세르펜스가 서스펜스 했다···!'
안 그래도 윈스톤은 그들을 향해 짙은 살의와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 '너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그 나쁜 놈들이 널 배신했어! 그 새끼들 완전 나쁜 놈들이야!' 같은 소리를 해댔으니.
윈스톤의 눈빛이 그들을 향한 증오와 복수심으로 활활 타올랐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도 아니고···.'
'자격을 잃은 것은···' 의 뒷부분은 입 밖에 내지 말았어야 했다.
천사의 위로가 악마의 속삭임이 되어버렸다.
주군이 될 자격이 아니라, 살아갈 자격이 없는 자들이라 번역해도 오역이라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매끄러운 흐름.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나야 알지만···.'
과연 윈스톤도 그렇게 받아들일까?
당장이라도 그들의 목을 베어내어, 정의를 구현하라며 충동질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누가 원작의 최종 보스 아니랄까 봐···!'
타락하기 전에 건져내랬더니, 꾹꾹 눌러 더욱더 깊은 나락 속으로 빠뜨리고 있다.
'제발, 쫌···! 회개하고 광명(光明) 찾자!!'
내게 만약 텔레파시 능력이 있었다면, '공작님, 각본대로 해주세요!'라는 말을 세르펜스의 뇌리에 간곡히 외쳐댔을 것이다.
"제게···, 힘이 있었더라면. ···힘이, 필요합니다. 복수를 위한 힘이!"
누가 들으면 악마가 나타나 그의 귓가에 '힘을 원하는가···?' 따위의 질문이라도 속살거린 줄 알겠다.
악마가 숭배자들의 의식(儀式) 없이, 그들이 자신의 직접 사념을 보내 계약을 시도할 수 있는 시기는 아직 멀었다.
설령 가능하다 해도, 그랬다면 세르펜스가 곧장 눈치챘을 테지.
"제가 레드포드 경에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써준 대본이 있지 않은가.
여기서 끝내면 그는 자유를 찾자마자, [성검의 주인]에 나왔던 것처럼 말룸 백작령에 쳐들어가 학살을 자행할 것이다.
아니,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악마와 계약도 하지 않았고, 시간대 적으로도 훨씬 앞선 시기. 아직 성장 도중이다.
복수하기도 전에 허무하게 제압당해, 그대로 생을 마감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뭐야, 누가 세르펜스를 타락펜스로 바꿔치기라도 한 거야···?'
이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제발 이러지 말아 달라고, 있는 힘껏 세르펜스의 뒤통수를 노려봐주었다.
나의 이런 정성을 신 룩스메아도 알아준 것인지, 세르펜스가 내 쪽을 돌아봐 주었다. 눈을 마주치니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다.
'···뭐야 그 미소는?'
어쩐지, 그에게 한껏 놀아난 기분이 들었다.
"저보다는. 저기에 서 계신 리벨론 경께서, 레드포드 경에게 해드릴 수 있는 말이 더 많을 겁니다."
갑자기 여기서 내가 왜 언급된단 말인가?!
세르펜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윈스톤의 흉흉한 눈빛이 나에게 향했다.
화들짝 놀라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하니, 마치 하찮은 것이라도 본 듯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세르펜스에게 시선을 옮긴다.
"그는 비록 기사는 아니지만, 마음가짐만은 그에 못지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어떤 부분에서는 그 이상으로 강직한 분이십니다."
다시 한번 윈스톤의 눈빛이 내게 향했다. 그 두 눈에는 불신이 가득 차 있었다.
"아니, 저, 그··· 공작님!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꺼내신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왜 갑자기 각본에서 이탈해서 돌발 행동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적어도 충동적으로 이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왠지 모를 계획성이 느껴진다.
"저보다는 당신이 레드포드 경을 더 이해하고, 위해 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저보다는 공작님께서···."
"돕고 싶다고, 구해내고 싶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세르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로 다가왔다.
"하고 싶은 말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탓에, 감정에 휘둘려 입을 열면 실수가 잦다는 걸 스스로 알고 계시니. 그것을 경계하고 계신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아무 말 대잔치 하지 말고, 생각해서 신중히 말하라는 소리인가?
그게 그렇게 걱정되면 본인이 하면 될 것을. 정말 이대로 나에게 넘길 작정이야?
"밤새 잠 한숨 못 주무시며. 고뇌하고, 또 고민하면서. 당신의 생각을 정리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기에, 저보다 당신이 하는 말이 더 와닿고,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위한 각본이었나···?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나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은.
내가 횡설수설하다가 또다시 수상한 이야기를 줄줄 내뱉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글로 쓰면서 할 말을 가다듬고, 정리해 두라는 의미였다.
"믿고 있습니다."
세르펜스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상급자가 부하 직원을 격려하듯,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슬쩍 등을 떠민다.
'어쩐지···.'
윈스톤의 손목 수갑은 풀어주었으면서, 발목의 족쇄라거나 오러를 억제하는 구속구는 어째서 그냥 두었나 했더니···.
혹시라도 내게 달려들까 봐, 최소한의 안전장치용으로 남겨둔 모양이다.
그런 배려는 고맙지만, 지금 상황은 조금도 고맙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