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공작님과 검은 투사 (5)
윈스톤의 얼굴에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자신을 구해내는 것 하나만을 목적으로, 세르펜스가 여기까지 몸소 행차한 것처럼 느껴질 테니.
'···그게 맞나?'
미래의 악마 진영 간부를 미리 처리하기 위함이 가장 컸지만, 살인 청부 대신 직접 스카우트 하러 납셨으니.
이렇게 따지고 보면, 그를 구해내는 것 하나만 보고 온 게 맞긴 했다.
하지만 그런 얘기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당신이 이 투기장에서 싸워온 상대들을 보면서 의문점 같은 건 느끼지 못했습니까? 아니, 분명 느끼셨을 겁니다. 노골적으로 이상한 점 투성이잖습니까."
"···있었소. 힘과 반응 속도는 숙련자의 그것인데, 정작 움직임 자체만 본다면 일반인과 다름없는···."
"일반인이니까요."
"···지금 뭐라고 하셨소?"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눈이 조금 확장되었다.
"악마 숭배 세력···. 그들이 엮여있었노라 말한다면. 모든 게 설명이 되려나요?"
"음···."
"그들이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를 위해 수작을 부리고 있었노라 말씀드린다면. 이해하실 수 있으시겠죠."
"···전혀."
"네?"
"모르겠소."
잠시 할 말을 잃고 눈만 끔벅거렸다.
'왜 모르지?'
세르펜스라면 하나를 미처 다 말하기도 전에, 그와 관련된 모든 연쇄 고리를 타고 올라가 해결 방안까지 내놓을 테다.
유지스라면 그냥 운만 띄워줘도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찰떡같이 알아듣겠지.
그런 둘과 함께 다니다 보니, 당연히 이 정도만 말해도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그래, 모를 수도 있지.'
천재들과 일반인을 동일 선상에 놓는 것부터가 어불성설.
모르는 건 죄가 아니고, 모르는 것은 배우면 그만이다.
"그러니까···."
나는 윈스톤에게 악마 숭배자가 그를 타락시켜, 이용하려 했음을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도.
하나씩 설명을 이어나갈 때마다, 그는 분노하고, 허탈해하며, 울분을 터트렸다.
"나는···. 이곳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나를 조롱하고 비웃은 인간들과 나를 배신한 자들에게 복수할 수만 있다면···! 악마의 힘이라도 빌려 그것을 이룰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리라 다짐했었소."
"······."
"하나, 그조차도 다른 누군가가 심어놓은 것이라니···. 이 신체뿐 아니라, 마음과 정신까지도! 내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었던 거요···."
"레드포드 경···."
모든 걸 알게 된 그는 혼란스러워하며 비통에 잠겼다.
그렇게 하면 가슴에 풀어지지 않고 응어리진 감정들이 으깨지고, 잘게 부수어져, 바람결에 날려 보내 가벼워질 수 있을 거라 믿는 것처럼.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가슴을 쿵쿵 두드려댔다.
'저러다 멍들겠네···.'
이제 그만하라는 뜻에서 그의 투박하고 거친 주먹을 감싸 쥐었다.
힘으로 그것을 제지할 수는 없었지만, 그 뜻은 전해졌는지 그는 자신을 학대하는 것을 멈췄다.
그러나 갑갑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인지라, 자신의 앞섶을 움켜쥐었다.
"이젠 괜찮습니다. 더는 당신이 그들의 뜻에 놀아나는 일은 없을 거고, 다른 누군가에게 억압당하지도 않을 겁니다."
"크···으윽···!"
단단하게 응어리졌던 무언가가 조금은 녹아내리기를 바라면서,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진정시켰다.
"···그래서. 당신이 말한 옳은 길이라는 것은 무엇이오?"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힌 윈스톤이 힘없이 물어왔다.
"옳은 길이라기보다는, 수많은 길의 갈래 중 하나라고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중에서 제가 제시할 수 있고. 저희와 레드포드 경.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길···. 그렇게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어렵군. 그래서 내가 뭘 해야 하는 겐가?"
이해가 잘 안 되는지, 윈스톤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가 아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왔다.
'그가 도와준다면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필수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파급효과는 조금 떨어지겠지만,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짜낼 수 있다.
기왕이면 그가 끝까지 듣고 난 뒤, 선택해 주었으면 한다.
"강요나 명령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한다는 건···."
"리벨론 경."
"네?"
내게 모든 것을 떠넘기고 침묵을 지키던 세르펜스가 불쑥 말을 끊었다.
"레드포드 경을 세심히 신경 써 주시는 것도 좋지만, 밖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계시는 분도 신경 써주시길 바랍니다."
아. 맞다, 유지스!
그녀에겐 무척이나 미안한 말이지만···. 깜박 잊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사전 준비를 다 끝내두고도 남을 시간. 그녀는 투기장 건물 전체를 한눈에 들여다보기 위해 높은 곳에 서 있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이 밤늦은 시간이라는 점과 현재의 계절을 생각하면···.'
추위에 벌벌 떨고 있을 그녀를 봐서라도, 설명 위주로 빨리 마무리 지어야겠다.
"아무튼, 저희는 이 투기장의 일을 공론화하길 바랍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와 우리가 어째서 표면으로 나설 수 없는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 후, 계획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현재 이 투기장에는 내일 있을 경기 때문에 납치된 일반인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들을 당신이 구해내, 무사히 탈출시켜 주시길 바랍니다. 물론 저희도 뒤에서 돕기야 하겠지만···.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표면으로 나설 수는 없기에, 악마 숭배 세력을 적대하는 수수께끼의 단체가 도왔다는 것 정도로 하죠."
"···음."
"그리고 나서, 룩스메아 교단에 이를 알리고 도움을 요청해 주십시오. 악마 숭배 세력과 관계된 일이니, 왕국보다는 교단 측에 알리는 것이 더욱 확실합니다. 룩스메아 교단의 신전은 대륙 어디에나 존재하니 말입니다."
신 룩스메아는 대륙의 유일신이다.
그러니 대륙의 모든 국가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
'특히, 다른 것도 아닌 악마 소환을 위한 제물이 될 수도 있다는 문제가 있으니···.'
까짓거 나라 안팎을 좀 뒤지고, 불법이고 합법이고 투기장 따위 죄다 때려 부술 수도 있지!
그걸 돕지 않거나, 막으려 드는 자는 이단으로 몰아가면 그만이다.
'원작에서처럼 종파라도 나누어져 있다면, 다른 종파를 믿는다고 우겨 볼 수 있겠지만.'
지금은 하나로 똘똘 뭉쳐진 상태고, 앞으로도 그러···해야 하는데. 괜찮겠지?
"그리고. 여기부터는 레드포드 경의 복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 *
세르펜스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부탁해 왔기에, 어쩔 수 없이 그가 해야 할 말들을 대신 고심해서 써 내려가던 도중이다.
"손이 멈추셨습니다."
방금까지 비 맞은 고양이처럼 처량한 표정으로, 하다못해 대본이라도 적어달라 할 땐 언제고···.
어느새 감독질을 하고 있다. 얄미운 마음에 그를 흘겨보았다.
"흠, 흠···! 뭔가 막히는 부분이라도 있습니까?"
그 시선에 세르펜스도 찔리는 게 있는지, 헛기침하며 관심 있는 체했다.
"있으니까 멈췄겠죠."
검은 투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말이 무엇인지. 그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도, 도저히 풀어낼 수 없는 구간이 있었다.
"···그는 복수를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게 무슨 문제냐는 눈빛으로, 세르펜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아니,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그에게 복수를 포기하라 말할 수 있죠? 그 배신으로 인해, 그는 이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그걸 알면서 그 원한을 묻으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를 버린 가문도 심판을 받아 마땅한 악인입니다."
"흐음···."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부나방처럼 복수의 불길에 몸을 내던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도 없잖습니까···. 하아···."
가슴에 돌이 얹힌 듯 갑갑하고 무거워, 긴 한숨을 토해냈건만.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럼 복수 대상을 없애면 그만 아닌가? 약간 우회해서 가야겠지만, 늦지 않게 돌아갈 수 있습니다."
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슬쩍 들려, 쓱삭- 하겠다는 얘기다.
과연 서스펜스다운 발상.
"아뇨, 그건 그것대로 허무해질 겁니다. 복수를 한 게 아니라, 원망할 상대가 사라진 것뿐이잖습니까."
"흐음···. 잠입에 소질이 있어 보이지는 않던데."
그럴 테다.
그게 가능했다면 이렇게까지 걱정도 안 했지.
"제가 들고 숨어든다면···. 2m는 족히 되어 보이던데, 그런 걸 들고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창문이 클 것 같지도 않으니. 비밀 통로라도 찾아봐야 하나···."
"···진심입니까?"
"물론 농담이다. 불가능한 건 아니나, 내가 그자를 위해 그런 우스꽝스러운 짓을 할 리 없잖은가."
무려 2m에 달하는 거인을 세르펜스가 어깨에 얹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
차라리 얼굴을 꽁꽁 싸맨, 새까만 후드의 수상한 2인조가 어부바하는 꼴이 훨씬 보기 좋으리라.
"···그럼 다른 방법도 있습니까?"
"당연히 있습니다. 장기적이긴 하지만···. 나라면 이 방법을 썼을 거다."
그렇게 세르펜스가 강력히 추천한 방법은···.
* * *
본래는 투기장을 정리 후.
윈스톤을 풀어주며, 그가 복수를 원한다면 그 방법을 알려 줄 예정이었다.
'그런데 계획 순서가 바뀌었고, 스케일도 커졌지···.'
스케일이 커진 만큼, 결과는 더욱 확실해질 테다.
대강의 맥락은 비슷했지만, 커진 스케일에 걸맞게 약간의 대사 교정이 필요했다.
그것은 투기장에 숨어든 후, 이곳까지 오기 전에 모두 끝마친 상태.
'어쩐지 계속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더라니.'
평소라면 혼자 속으로만 생각했을 거면서···.
앞으로 또 저러면 미리 경계해야겠다. 난 그냥 남을 회개시킬 생각에 긴장한 줄 알았지!
"일이 처리되는 동안 교단과 함께 행동한다면, 레드포드 경이 투기장을 탈출했다는 것을 알아도. 당신이 전 주군의 아들에 의해 노예로 팔렸다는 사실을 밝혀도. 그자들은 당신을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흑마법 시약과 투기장 관련 서류도 그를 거쳐 교단으로 넘길 예정이다.
이번 일의 중요한 증인이자 고발자가 되는 것이니,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든든히 지켜줄 것이다.
그리고 탈출 과정에서 납치당한 일반인까지 구해냈다는 미담까지 더해지면 더더욱.
"투기장 일을 공론화하면서, 경께서 투기장에 잡혀 온 경위도 함께 슬쩍 흘리기만 하면 되는 일입니다."
"···그거면 된다고?"
"네, 간단하죠? 레드포드 경. 당신은 믿었던 주군 가문에 의해 배신당했으나, 여전히 기사로서의 명예와 긍지를 가슴에 품고. 인류를 사랑하며, 대륙을 위해 악마 숭배자들의 음모를 밝혀낸 영웅이 되는 겁니다."
"···나는 그런 명예를 바라는 게 아니오."
"압니다. 단지 복수의 과정일 뿐입니다. 전 주군을 살해했다는 멍에보다 이런 명예 쪽이, 부담스러울지는 몰라도 훨씬 낫잖습니까?"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복수다-, 뭐 그딴 개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행복해지는 것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일 뿐.
'세르펜스가 그런 것까지 생각했을 것 같진 않지만.'
그냥 순수하게, 그들 가문을 무너뜨리는 것에 중점을 뒀을 것이다.
"그··· 뭐라고 했죠? 말···, 말 뭐시기 가문."
"···말룸."
"아, 그래요. 말룸. 말룸 백작가는 그런 정의로운 기사의 충의를 저버리는 정도를 넘어, 충성을 다 바친 기사를 노예로 팔아먹은. 아주 더럽고 비열한 귀족 가문이라는 사실이 바스툴 왕국 전역에···, 아니. 대륙 전체에 알려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대사를 할 때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거지?
돌연, 아직 세르펜스와 마음을 터놓기 이전. 기차 안에서 보았던 그의 표정이 떠올랐다.
"기사도를 농락한 가문을, 이 땅의 모든 기사는 적대시할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기사들에게 충성을 받고 신뢰를 얻어야 할 왕가와 여타 귀족 가문들 역시 그들을 버릴 수밖에요. 내부로는 말룸 백작가의 작위를 박탈해야 한다는 귀족들의 상소가 매일같이 쏟아질 테고. 외부에서는 거센 비난이 몰아칠 겁니다."
눈을 반쯤 접어 곱게 휘며, 입가에는 나긋한 미소를 머금었더랬다.
"그럼 왕가는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부의 의견을 따라, 작위를 박탈하고. 외부의 비난으로 인해 국가의 위상이 떨어졌으니, 국외로 추방할 겁니다. 하지만 대륙의 그 어떤 나라도 그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겠죠. 이 대륙 어디에도 그자들이 발붙일 곳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목소리는 나직하고도 은근하게···.
"그렇게 비참하게. 국경 사이를 정처 없이 떠돌다 도적들에게 붙잡혀 최후를 맞이하게 될 수도 있고···. 그렇게 꾸며내어, 레드포드 경께서 직접 처리하실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그들의 죽음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테니."
나 지금 잘 하고 있는 거 맞나?
"이 정도면 당장 영지로 쳐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어? 왜 다들 그런 표정을 짓고 계신 겁니까?"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윈스톤은 완전히 얼이 나가 있고, 세르펜스는 무척 난감하다는 표정이다.
"저는 가끔···. 당신이 대륙의 편이라는 사실에 안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세르펜스는 겉으로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설마 본인 설정 유지하느라, 나한테 죄다 떠넘긴 거였어?!'
이런 계략펜스! 서스펜스!!
나는 자주···. 이 녀석이 아직 대륙의 편이라는 사실에 미칠 듯한 안도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