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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회개해주세요!-86화 (86/925)

86. 공작님과 비밀 결사 (3)

"···오늘은 늦었으니, 일단 돌아가서 취침 후 내일 얘기합시다."

무척이나 어색한 표정으로 세르펜스가 말했다.

누가 봐도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겉으로 보이는 게 저 정도라면, 실제로는 그 이상으로 당황하고 있다는 거겠지.

'이런 상황에, 네 성격에, 잠을 자? 퍽이나 얌전히 자겠다.'

아마 유지스가 한 얘기는 귓등으로도 안 듣고 있지 않을까?

죄송하다거나, 잘못이 없다거나, 괜찮다거나.

그런 얘기는 모두 튕겨내고, 그저 자신이 숨겨왔던 일면이 들켰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할 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쩌다가, 왜, 어디까지 들킨 것인지. 나를 붙잡고 캐물을 거다.

그리고 그것에 맞춰, 또다시 설정 놀음이나 하겠지.

'웬만하면 나도 도와 주었겠지만···.'

이번만은 예외다.

들킨 게 유지스라 망정이지,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성검의 주인]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똑같은 전철을 밟게 될지도.'

어쩌면 그 이상의 비난과 경멸에 노출될지도 모른다.

그때는 성검의 선택을 받지 못해 생긴 의심에서 시작되었지만, 이번에는 그가 실수로 내보인 명확한 증거가 있었다.

'들킨 이유를 말해준다면, 앞으로 남들 앞에서 호칭에 신경 쓰겠지만···.'

당장 드러난 게 호칭뿐인 거다.

지금 같은 상태가 지속되면 다른 문제들도 생겨나고, 결국에는 들키겠지.

'어느 정도 자신을 마주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젠 종종 바깥 구경도 시켜줘야 하지 않을까?'

아직은 위태롭긴 하지만, 유지스라면 믿을 수 있었다.

그녀는 세르펜스가 타인을 인격체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채고도, 그를 배척하는 대신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 결과. 약간의 어긋남은 있으나, 정답에 근접했다.

'인간관계가 나 하나뿐이어서야···.'

그가 경험할 수 있는 것도, 극히 일부로 제한되어 버린다.

많은 이들과 부대껴 봐야, 자기도 모르는 자신을 찾을 수 있는 법이다.

이번 기회에 슬슬 교우 관계를 넓히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시온···?"

내가 생각을 정리하느라 묵묵히 서 있자, 세르펜스가 나를 부른다.

잠시 마주친 그의 눈빛 속에서 '도와줄 거지?'라고 말하는 의중이 읽혔다.

'당연히 도와줘야지.'

하지만 그가 바라는 방식은 아닐 거다.

"손!"

손바닥을 위쪽으로 하여, 세르펜스에게 팔을 뻗었다.

과연 그는 지탱해 줄 무언가가 필요하였다.

반사적으로 내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얹고, 그것을 맞잡았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런 건 잡기 전에 물었어야죠."

뒤늦게 정신이 들었는지, 세르펜스가 대체 뭐 하는 짓이냐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슬쩍 눈동자를 굴려 유지스 쪽을 바라보니, 그녀의 표정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뭐 어떠랴.

'언제까지 설정 놀음만 할 순 없잖아?'

따지고 들면, 호위 도련님 쪽도 100% 세르펜스 본연의 모습이라 볼 수 없었다.

설정 따위에 계속 의지하고, 만들어낸 거짓 배역 뒤에 숨어서야.

세르펜스라는 인간은 성장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저 믿죠?"

"···네."

"그럼··· 에, 에취-!"

유지스가 정령의 힘으로 바람을 막아주고 있었지만, 영하를 웃도는 차디찬 밤공기까지는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옷을 단단히 껴입었음에도, 추위가 으슬으슬 올라왔다.

'줄곧 밖에 있었던 유지스는 멀쩡한데!'

심지어 나보다 옷차림도 가볍다.

초인들 사이에 낀 일반인의 신세가 이렇게나 서럽다.

"여긴 너무 추우니, 실내로 들어가서 다 같이 얘기합시다!"

"···알겠습니다."

할 일도 다 끝났는데, 추운 밖에서 죽치고 있을 필요는 없다.

'다 같이'라는 말에 세르펜스가 마뜩잖다는 기색을 보였으나, 제 손을 흘깃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숙소로 잡아 놓은 여관으로 장소를 옮겼다.

나와 세르펜스가 쓰는 방에는 아직 범죄자 3인조가 있었기에, 그냥 유지스의 방에서 대화하기로 했다.

'기절시키는 것도 어디 한두 번이지.'

소리야 유지스가 적당히 범위 조절해서 막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방구석에 낯선 사람들이 처박혀 있는 거다.

당연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어떻게 된 겁니까? 제 실수라는 건···."

세르펜스가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의 면전에 대고 '너, 나 말고는 사람 취급도 안 하더라?'라고 말할 생각은 당연히 없다.

"세르펜스, 당신은 이제껏 저를 어떻게 불렀죠?"

"시온···?"

"그거 말고."

"리벨론 경."

"이름 말고요."

이 문답이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면서, 잘도 대답한다.

잠깐 생각에 잠긴 듯했던 세르펜스가 재차 입을 열었다.

"···수상한 녀석?"

"아니, 그딴 거 말고 이 사람아!"

"당신은 제게 무슨 말을 듣고 싶으신 겁니까?"

"그거!"

"···당신?"

얼결에 답을 맞히긴 했지만, 여전히 눈치채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한다.

유지스가 옆에서 우리 둘을 신기해하는 눈으로 바라본다.

'그래. 오자마자 느닷없이 스피드 퀴즈 놀이를 하고 있으니, 신기할 만도 하지.'

하지만 세르펜스는 워낙 섬세하고 여린 아이라, 한 번에 훅 들어가면 놀라서 도망쳐 버리는 걸 그녀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암흑가에서 있었던 것 같은 실수를 안 하지.

"네, 맞습니다! 참고로 복수 정답으로는 '그대'가 있습니다."

"···혹시 제가 당신만 그렇게 부르고 있던 겁니까?"

"무의식이 무섭긴 하네요."

"······."

자신이 왜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한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세르펜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천천히 되짚는 것이 보였다.

"···으음."

"본인이 왜 그러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전에."

"네?"

"이런 식으로 빙빙 돌려 말씀하시는 건, 분명 그러실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왜 쟤는 저기에 멀뚱히 앉혀 놓고 있냐고 묻는 듯, 그의 시선이 유지스에게로 향했다.

타당한 의문이다.

"세르펜스가 자신을 숨기지 않으셨으면 해서요. 저 말고도, 당신이 숨 쉴 수 있는 장소가 생기셨으면 해서?"

"···그 말씀은?"

"어차피 다 들킨 마당에 꼬박꼬박 존대하지 마시고···."

"혹시, 떠나실 작정입니까?"

이게 뭔 소리람?!

돌아갈 방법은 감감무소식이고, 네 녀석 상태도 아직 글러 먹었는데, 내가 떠나긴 어딜 떠나?

깜짝 놀라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니, 그가 뻘쭘한 듯 헛기침을 한다.

"그리고 위리디아님?"

"네?"

"우리 애가 보다시피 섬세하고 여린 아이니까, 무언가 말하기 전에 몇 번 생각하고 말해주실래요?"

"···네?"

내 입에서 나오지 말아야 할 말이 나온 것도 아닌데, 유지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깜박거렸다.

"저번에 암흑가에서 거칠고, 무자비하다고 하셨잖습니까?"

"그, 그건···. 그냥 박력 있고 냉철하다, 뭐, 그런 뜻이었어요."

"순화 표현이 있으면, 그걸로 사용해 주실래요?"

"···엘프 중에는 그런 유형의 분들이 없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만···."

해석하자면, 대충···.

유지스는 그런 유형의 남자가 취향이나, 온화한 엘프 중에는 없었다, 이건가?

그래서 자신의 이상형이 뭔지도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마주한 탓에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고 만 모양이다.

'어쩐지···.'

아무리 엘프들이 미남 미녀들뿐이라지만,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대외 버전의 세르펜스에게 단 한 번도 혹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했다.

그냥 취향이 아니었던 거다.

'[성검의 주인]에서도 휴마누스에게 가장 늦게 반한 건, 그가 초반에는 해맑음 그 자체여서 그런 거려나?'

오늘도 원작 속 언급되지 않았던 비설을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내용이다.

"저, 그런데···."

유지스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질문해도 좋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구는 되고, 이건 안되는 이유가 있나요?"

"그거야 일부러 그렇게 보라고 꾸며낸 건데, 문제가 있을 리가요."

"······."

옛날 옛적에 솔레르티아가 눈앞에 있는 게 세르펜스인 줄도 모르고 사용함으로써, 증명해낸 사실이다.

유지스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세르펜스를 바라보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불안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내가 유지스와 대화하는 동안 생각을 끝마친 모양이다.

"손잡아줘요?"

"···괜찮습니다."

유지스 때문에 눈치 보여서 거절한 거겠지.

이제 와서 이미지를 신경 써봤자, 아까 내 손을 잡은 시점부터 진작에 망했다.

냉큼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괜찮다고 했을 텐데."

"지켜보다가, 도움이 필요해 보이면 도와드리기로 약속했을 텐데요?"

그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 내게 잡혀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소름···끼치지 않습니까?"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옛날 옛적에 말씀드렸었는데. 기억 안 나세요?"

"······."

"저 믿죠?"

내 말에 비로소 안도감이 들었는지, 손가락을 움직여 내 손을 마주 잡았다.

그것은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문제점을 확실히 깨달은 모양이다.

'지금까지야 평등하게 인격체 취급을 안 했으니, 자신도 눈치채지 못했던 거겠지.'

비교 대상이 없었으니, 몰랐을 만도 하다.

그가 남몰래 악인을 처리해 온 것도, 그저 대륙을 살리기 위해 썩은 부위를 도려낸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거다.

세르펜스에게 있어, 그들의 차이는 그 정도뿐.

'소름 끼치지 않느냐고?'

느껴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누구보다도 그를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자는 세르펜스 본인이었다.

'소름이 끼칠 리가.'

정말 소름 끼치는 건···.

계속해서 발치에 장애물들이 치인다.

이곳의 주인은 나름 장식품이랍시고 가져다 놓은 걸 테지만, 세르펜스에겐 방해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걸리적거리는군."

세르펜스는 악마 숭배자들의 취향을 도통 이해하지 못했다.

'뭐든 많이 갖다 놓기만 하면 그만인 줄 아는 건가?'

이래서야 황궁 안팎을 금과 보석으로 번쩍거리게 장식해 놓았던 그들과 다를 게 뭐가 있나 싶었다.

쓸모가 없다는 점은 동일했지만, 적어도 그들은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는 적정선은 지켰다.

애초에 장식품의 효용 자체에 의문을 품는 그에게 있어, 장식품이란 거치적거리는 잡스러운 물건일 뿐이다.

- 찰박.

아까부터 풍겨오는 냄새로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아무래도 집주인이 새 장식품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하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는 옷이 더럽혀질 것이다.

"···쯧."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세르펜스는 어째서인가 버리고 싶어도 버려지지 않는.

지긋지긋한 그것을 뽑아내, 허공에 띄웠다.

찬란한 은빛이 새까만 어둠을 밀어냈다.

과연 그의 예상대로였다.

'바로 흡수해서, 흑마력으로 치환해 버리면 그만인 것을.'

그랬다면 앞서 걷어차며 왔던 것들처럼 방해는 될지언정, 부딪힌다 해도 옷을 축축하게 적셔 불쾌하게 만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굳이 흡수할 수 있는 흑마력의 손실을 감수하고서, 이런 식으로 늘어 놓다니···.'

역시 장식품이란 아무런 효용 가치가 없는 쓰잘데기 없는 물건일 뿐이다.

세르펜스는 바닥에 고인 핏물과 반쯤 썩은 시체들을 피해 걸음을 옮기며,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소름 끼치는 것은, 타인을 제대로 된 인격체로 취급하지 않는 것 정도가 아니다.

생명체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문제점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적어도 집주인이란 작자는 저게 잔인한 짓이라는 걸 알고 전시해 놓은 거잖아?'

완전히 망가져 버린 원작의 그와 비교한다면···.

'이 정도야, 그냥 귀엽지.'

세르펜스가 두려워하는 모습은, 원작에 한참 못 미칠 것이다.

유지스가 상상하는 것은, 그가 경계하는 것 이하일 테다.

그럼에도 세르펜스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개선해 나갈 여지는 충분하다.

'대륙을 비추는 광명이 되기 전에, 내부의 광명부터 찾아야 할 지경이니···.'

진짜, 이름 한번 제대로 잘못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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