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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회개해주세요!-87화 (87/925)

87. 공작님과 비밀 결사 (4)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도 괜찮다는 얘기는 아니란 거. 알고 계시죠?"

세르펜스의 손가락이 살짝 움찔했다.

"그렇겠지···."

눈을 반개한 채 내리깔며, 그가 쓰게 웃는다.

기다란 속눈썹에 가려져 눈가에 짙은 음영이 깔렸다.

"그렇다고 너무 자책하시진 말고요."

"맞아요! 페르센···. 아니, 공작님의 잘못만은 아니잖아요."

유지스가 자신을 두둔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줄곧 테이블 위를 멍하니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어째서 위리디아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째서 비인격체 취급을 당하고도, 괜찮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느냐는 뜻일 테다.

또한,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기도 했고.

동시에, 이제껏 위선과 가식으로 기만해 왔던 자신을 어째서 탓하지 않느냐는 물음이었다.

"전 당신에 대해 잘 몰라요. 하지만 그것을 깨달은 것만으로도 이렇게 힘들고 괴로워하시는 분이신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타인을 무감(無感)하게 여기게 될 리 없다는 건 알아요."

이건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해줄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다 알고 있으니까.'

지금의 네가 이렇게 괜찮은 사람인데, 그렇게 행동하게 된 건 필시 이유가 있을 거다- 라는 말과.

과거에 그러한 일이 있었으니, 이렇게 행동하는 것도 이해한다. 네가 나쁜 게 아니다- 라는 말은 분명히 다른 거다.

'듣는 이의 관점에서도, 말하는 이의 관점에서도.'

처지를 알고서 이해하고 동정하는 일은 쉽지만, 모르고도 이해하려 노력하는 건 어렵다.

'그냥 막연하게 세르펜스가 연기 없이,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늘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는데···.'

그녀는 스스로 빛날 줄 아는 존재였다.

굳이 내가 이런 자리를 만들지 않았더라도, 그녀라면 혼자 힘만으로도 같은 결괏값을 얻어낼 수 있었으리라.

'···이러니까, 괜히 더 안타깝잖아.'

만약에 본래의 흐름 속에서.

그가 유지스를 처음 구해냈을 때, 자신의 정체를 밝혔더라면.

혹은. 감옥에 갇혔을 때 악마 숭배 세력을 따라나서는 대신, 암흑가의 뒤처리를 하고 온 휴마누스가 오기를 기다렸더라면.

상대가 누구든 간에.

그가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도움을 요청할 기회나 계기만 있었더라면···.

'원작의 세르펜스도 충분히 행복해질 가능성을 품고 있었는데···.'

너무 오랫동안 외면받은 탓에, 그러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 자체를 인지하지 못했다.

상처 입은 마음을 그 누구도 보지 못하게 꽁꽁 걸어 잠그고,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 제 눈조차 가려버렸으니.

그 시선이 선의인지 악의인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뭐가요?"

"어떤 점이 말인가요?"

그가 나와 유지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 분은 어째서···. 아니, 어떻게···."

상냥한가. 다정한가. 친절한가.

다른 사람과 달리 외면하지 않는가. 저 같은 것에게도 손을 내밀어 주는가.

어떤 것부터 물어야 할지 몰라서, 여러 말이 그의 입안에서만 맴돌며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는 소리 없이 입술만 벙긋거렸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세르펜스. 당신을 외면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당신을 도우려는 사람도 많을 거라고. 설마 기억나지 않는다고 내빼진 않겠죠?"

"···기억하고 있습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진심을 내보였으니까?"

"···네?"

다른 주제였다면 바로 알아차렸을 거면서, 이런 부분에서는 어린아이와 다름없다는 게 새삼 느껴진다.

"세르펜스가 자기 자신을 드러냈으니, 그럴 수 있던 겁니다. 일부일지라도, 세르펜스가 어떤 사람인지 내보였으니까.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으니까, 이해하려는 시도라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기에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도 할 수 있는 겁니다."

"···당신은 다르지 않았습니까?"

"네?"

"내가 무언가를 내보이기도 전부터, 저를 돕기 위해 애쓰셨잖습니까."

그럴 리가. 내가 무슨 성인군자도 아닐진대.

아니, 성인군자라 하더라도 상대가 도움이 필요한 상태인지 모르면 도울 수 없는 법이다.

그는 분명히 자신을 드러냈다. 감춰왔던 과거의 상처를 내보였다.

'죽어가며 남긴 마지막 회상을 통해···.'

만약 그것조차 없었더라면, 나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을 거다.

그런 시도조차 못 했겠지.

[성검의 주인]에서의 그는 선천적으로 감정이 결여된, 그야말로 완전한 '악(惡)' 그 자체로 보였으니까.

'그와 친해지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다른 방도를 찾으려 했겠지···.'

하지만 그는 성검에 심장이 꿰뚫리던, 그 최후의 순간.

그는 자신의 인생 중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자신을 괴롭게 만든 세상을 파멸로 몰아가기 직전, 실패로 끝난 것에 대한 비통함이라기에는 너무 무덤덤했다.

애초에 복수심이나 원망, 그 비슷한 감정이 묻어나는 묘사는 단 한 줄도 없었다.

'단지 끝없이 고통스러워했을 뿐···.'

[성검의 주인]에서 그 부분을 읽었을 때는, '왜 하필 이런 걸 마지막에 알려줘서···!'라는 생각이 앞섰으나.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것은 단말마의 외침이었다.

누구든 좋으니, 자신을 이해해 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자신을 구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포기하고, 체념하여, 자기 자신에게까지 감추고 숨겨둘 수밖에 없었던.

그가 내비친 마지막 본심이었을 것이다.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누군가의 따스한 온정을 받아보고 싶다고.'

그런 마지막 미련이었지 않았을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르펜스. 당신의 진심을 보았으니까, 당신을 돕고 싶었던 겁니다."

"그건···."

"제가 무슨 말을 할지 아시죠?"

알아들었다는 듯, 세르펜스가 지그시 눈을 깜박였다.

선택의 날.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니까, 당장 모두에게 그러기는 힘드실 테지만···. 적어도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드러내 주셨으면 합니다."

"···네."

"다른 이가 아닌, 당신을 위해서."

그가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그런 의미에서 저희 이름으로 부르지 않을래요?"

우리의 대화가 마무리되는 듯하자, 잠잠히 지켜보고 있던.

혼자 이름으로 못 불리고 있는 유지스가 슬그머니 손을 들고 제안했다.

"저는 환영입니다! 유지스님이라 부르면 됩니까?"

"그냥 이름으로만 부르셔도 괜찮아요."

유지스가 보드랍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안 그래도 위리디아님은 너무 거리감이 느껴졌던 터였는데 잘 되었다.

"저도 그냥 시온이면 됩니다!"

"시온, 앞으로 잘 부탁해요. 그리고···."

나와 유지스는 세르펜스를 바라봤다.

우리의 기대 가득한 시선을 한몸에 받은 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싫습니다."

어딘가 따뜻하고 몽글해질 뻔한 분위기가 단박에 싸늘해졌다.

"우리 공작님이 낯을 조금···. 네, 무지막지하게 많이 가립니다."

"···어딘가 기시감이 드는 말이네요."

"저도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한 7개월쯤 걸렸나?"

내가 7개월 걸렸다는 말에, 그녀의 얼굴이 아연하게 질렸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왠지 뿌듯한데?'

호칭 문제도 그녀가 먼저 알아냈다.

나처럼 커닝해온 것도 아니면서, 순수한 관찰과 예측만으로 세르펜스를 파악해 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캐 해석에서 밀린 느낌?'

아무튼 그런 탓에, 못내 분한 마음이 들던 차였다.

그 와중에 세르펜스가 바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줬다면, 정말 섭섭해질 뻔했다.

'아무리 내게 길들여져, 집냥이가 되었더라도 그렇지! 나는 7개월이나 걸렸는데!'

비유를 하자면···.

가끔 지 내킬 때만 애교를 부리던 밀당냥이, 아주 가끔 집에 놀러 오던 친구에게 갑자기 우다다 달려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그 친구의 다리에 머리를 비비며 자신의 것이라는 영역 표시를 하는 모습을 봤을 때 정도의 섭섭함?

'아니, 이렇게 생각하니 섭섭한 정도가 아니라 서럽잖아!'

모든 관계에는 단계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몸에 좋은 것도 급하게 먹으면 탈이 나고 만다.

하물며 그것이 대인 관계라면, 더욱 그러하겠지.

조금씩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며 친해져야, 진정으로 오래가는 사이가 되는 거다.

"저렇게 단호하게 거절하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말의 앞뒤가 상반되는 것 같은데요···?"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것도 아닌데, 연기 없이 솔직하게 제 생각을 말하지 않았습니까? 매우 긍정적인 반응입니다."

"···그, 그런 건가요?"

유지스가 저 말이 사실이냐는 눈으로 세르펜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려 그 시선을 회피했다.

"눈을 피하시는데···."

"방법의 문제입니다. 좀 더 차분하고 이완된 분위기 속에서, 찬찬히 눈을 마주치며 부드럽게 깜박여 주시죠."

"···그거 사람 대하는 법, 맞···죠?"

놀랍게도 그러하다.

* * *

방구석 3인방은 이른 새벽, 윈스톤이 찾아와 몰래 데려갔다.

'아니, 들고 갔다고 해야 하나?'

자다가 갑자기 들어온 찬바람 때문에 깼더니, 세르펜스가 그들을 창밖으로 던지고 있었다.

깜짝 놀라 침대를 박차고 나와 밖을 내다보니, 윈스톤이 그들을 받아내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잠결에 잘못 본 건 줄 알고 눈을 비볐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윈스톤이 두 명을 겹쳐서 한쪽 어깨 위에 들쳐 메고, 남은 한 놈은 반대쪽 옆구리에 끼고 있더라.

눈이 마주치니, 그는 내게 꾸벅 목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뭐였죠?"

"인수인계."

"······."

나는 생각을 멈췄다.

그냥 아무것도 보지 못한 거로 하고, 남은 잠을 마저 청하기로 했다.

몇 시간 뒤, 다시 눈을 뜨니 날이 밝아져 있었다.

우리는 각자 짐을 챙겨 들고나와서 기차표를 예약했다.

남은 시간 동안 우리는 어젯밤 일에 대한 소식도 들을 겸, 내가 챙긴 여행안내 책자에 나온 유명 식당으로 이동해 식사를 주문했다.

"오늘따라 아침부터 떠들썩한걸?"

"자네, 소식 못 들었는가?"

우리는 조용히 식사에 집중하는 척하며 주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여기저기 떠드는 목소리에 집중해보니, 과연 어젯밤 일어난 일로 야단이다.

'마법이 펑펑 터져나간 데다, 교단의 신관들이 몰려와 제압당한 투기장 관련 인원들을 잡아갔으니···.'

그리고 지금도 광장에서는 신전 측의 발표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악마 숭배자들은 벌써 우리네 사이로 숨어들어, 사람들을 타락의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꾸준히 악을 멀리하고, 죄를 경계하며···."]

들리는 얘기를 조합해보면, 대충 이런 식으로 떠들고 있는 모양이다.

'발표가 아니라, 사이비 종교 단체의 포교 활동처럼 들리는데···?'

하지만 신과 악마의 존재가 확실한 세계였다.

모두가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악마 숭배 집단을 두려워하는 마음에 여기저기서 떠들어댔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윈스톤도 함께 하는 듯했다.

증인으로 참석하여,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척 말룸 백작가의 비겁함을 알렸다.

그에 관한 이야기도 드문드문 들려왔다.

'그리고 또 하나···.'

일루미나티.

그 이름도 종종 언급되었다.

오랜 시간 악마 숭배 집단을 몰래 뒤쫓으며, 대륙의 안녕을 기원해온 비밀 결사 단체.

'그것이 이번 일로 인해 수면으로 올라온 것이다···라는 식으로.'

결국, 유지스의 망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그것은 뚜렷한 실체를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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