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공작님과 선택의 날 (3)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의 손을 구명줄처럼 붙들고, 고해성사라도 하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실감이 안 났습니다. 왜 제가 이곳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제가 뭘 해야 하는지···. 아니, 이건 너무 노골적이라 눈치채긴 했는데."
"음···."
"우선은 살고 보자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당장 도망쳐봐야 어차피 대륙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래서···. 세르펜스가 대륙의 편에 서도록 설득할 생각이었습니다."
"그 웃기지도 않은 간식 공세로 말인가?"
"그렇게 말하면 피차 우스워지니, 그만두죠?"
그 웃기지도 않은 것 때문에 계략을 세우던 게 누군데, 저런 소리를 잘도 한다. 예전엔 안 이랬던 것 같은데···.
내 지적에 그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어쨌거나, 저는 '그날'이 오기 전까지 당신을 그저 두려워했습니다. 그 마지막 회상을 보고도 당신이 가엾다는 생각보다 두렵다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사실 그도 그럴게, [성검의 주인]에서 시온을 죽인 것은···."
"···나 인가."
시온과 내가 다른 인물임을 알게 되었어도, 자기도 모르게 나를 죽이는 상상이라도 했나 보다.
내 손에 얹고 있는 것에 가깝게, 조심히 잡고 있던 그의 손에 약간의 힘이 들어갔다.
"세르펜스, 당신은 기만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저는 분명 당신을 기만했습니다. 당신의 과거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쉽게 입에 담았으니까."
"그 상황에선 그게 최선이었겠지. ···내가 당신을 궁지로 몰아넣었으니."
"그렇다 할지라도. 저는 책 속에 나왔던 당신의 모습만 보고, 동요는 할지언정 그렇게까지 두려워할 줄은 몰랐···. 아뇨, 조금도 생각해 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 대한 배려도 없이, 자신의 동정심에 취해 눈물 흘리며 그의 상처를 들쑤신 거나 다름없다.
이것만은 누가 뭐라 해도 나의 실수였고, 기만이었다.
달리는 기차에서 그가 창밖으로 몸을 던진 후에야, 그가 소설 속의 단편적인 존재가 아니란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가 다시 돌아와 주었을 때. 그리고 지켜보겠다 말해줘서, 지켜봐도 된다고 표현해 주어서.
진심으로 안도하고, 고맙고, 또 미안했다.
"정말로···."
"사과하지 마십시오."
사과하려는 나를 세르펜스가 저지했다. 그 표정을 보니, 또 울 것 같은 얼굴이다.
실질적으로 그가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린 것은 한 번뿐이었으나, 그걸 두 시간이나 보고 있었더니 어째 선가 몇 번이고 운 것처럼 느껴졌다.
"···그날이 제게 있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고 있잖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당신이 그것을 사과해 버린다면."
"······."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날은 나에게도, 그에게도. 중요한 계기가 된 날이라서, 그때 내가 내뱉었던 거짓을 고백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죄송합···, 아! 이건 그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조금 전. 사과하려고 한 것에 대한 사과입니다."
"그건 사과할 만했습니다."
"저도 사람이다 보니, 세르펜스가 웬일로 어른스럽게 구니까 저도 모르게 이기적인 투정을 부렸나 봅니다."
"웬일로라니···."
내 말에 그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자신이 언제 어린애 같은 행동이라도 했느냐는 듯한, 불만 가득한 얼굴이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고 투덜대는 꼬맹이 같았다.
"아니, 어째서 다시 어려지신 겁니까? 왜 퇴화한 거죠?"
"···그건 또 무슨 헛소리지?"
질색하는 듯한 말투와 달리, 그 표정은 장난기 가득한 소년 그 자체다.
평범하게 친구와 장난치고, 그것을 되받아치는. 그런 평범한 남자아이 말이다.
"제가 살던 세계에서는 이런 단어가 있습니다."
내가 살던 세계라는 말에 세르펜스가 흥미를 느꼈는지, 눈을 반짝하고 떴다가 무안한 듯 눈을 몇 번 깜박이며 아닌 체했다.
'그게 더 티나···.'
배움을 강요당하는 행위에 거부감을 느낄 뿐, 호기심 자체는 많은 편인 듯하다.
항상 필요한 지식만을 강요당했으니, 그 밖의 것들에 관심이 많아질 만도 하지.
그러고 보면 바스툴 왕국으로 향하는 중, 처음으로 야시장에 들렸을 때도 냉큼 내 짐까지 들어다 옮겨 놓지 않았던가.
조금이라도 놀 시간을 더 확보하려는 것처럼.
내게 기대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던 것도, 결국 자신이 기대했기 때문 아냐?
"착하고 어진 벗을 '선우(善友)'라고 합니다."
"···지금 자신이 착하고 어진 벗이라 얘기하고 싶은 건가?"
"네, 그렇습니다!"
뭐 이런 뻔뻔한 자식이 다 있느냐는 그의 표정이 무척이나 유쾌해서 킥킥거리며 웃었다.
"어질다는 말은 고려해봐야겠으나, ···다른 건 얼추 맞는 것 같군. 서···서누?"
"발음이 약간 샜지만, 뭐. 대략 맞습니다."
"······."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니, 그가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는 '선, 우. 선···우···. 서언-우···.'하고, 그 단어를 몇 번이나 낮게 읊조렸다.
왠지 모를 전율 같은 게 느껴졌다.
"···선우. 이것이 그대의 진짜 이름인가."
"네, 맞습니다. 정확히는 '유 선우(柳 善友)'. 참고로 앞이 성이고 뒤쪽이 이름입니다."
"정말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세상의 것이로군."
"다른 세상의 사람이니까요."
그가 또다시 내 손을 꽉 쥐었다.
"이렇게 꽉 잡지 않아도, 어디 안 갑니다."
"유 선우."
"···네."
"선우···."
"왜···, 자꾸 부릅니까?"
안 그래도 오랜만에 듣는 본명이 가뜩이나 어색한데, 그것이 명확하게 나를 칭하고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감격스러워서···.
바로 지근거리에 있는 세르펜스의 모습이 크게 흔들리고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선우. 실컷 울어도 된다. 나는 누구처럼 두말 안 합니다."
"저도 누구처럼···, 두 시간이나 내리 우는 짓은···."
비로소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 세계에서 혼자 붕 떴던 것이, 이제야 자리를 잡은 것 같다. 드디어 온전히 이곳에 '나'라는 존재가 존재하는 듯하다.
'외로웠구나.'
외로움을 느끼면서, 그것이 외로움인 줄 모르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나 보다.
맞잡고 있던 손의 손등 위로, 또 다른 손이 겹쳐졌다. 그가 양손으로 내 손을 꼬옥 붙들었다.
그는 내가 그에게 그리했던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역시 다른 얘기를 먼저 꺼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벌써 다 운 건가?"
제가 두 시간을 내리 울고도 모자랐으니, 최소 한 시간쯤은 울 거라 예상했나 보다.
울음을 그친 내게 세르펜스가 손수건을 건네며, 고작 그거 가지고 되겠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눈앞에 연속 두 시간을 울어 재낀 녀석이 있다 보니, 창피함도 못 느끼고 시원스레 울고 털어버렸다.
"후···, 그러게 제가 말했잖아요?"
숨을 고르고 눈가를 닦아내며 답하자, 그가 민망해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눈가가 붉어졌는데, 치유해도 됩니까?"
"뭘 이런 것까지···."
"선우, 당신을 걱정하는게 아니다. 내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아서 그러는 것 뿐."
응접실에서 단둘이 대화하다가, 한쪽이 울면서 나오면 다른 한 명이 울렸다고 볼 수밖에.
항상 이상한 사람으로 몰리는 상황에 부닥친 건 나였는데···.
"···그것참 솔깃한, 아니. 아닙니다."
그가 인상을 찌푸렸고 나는 또다시 웃었다.
계속해서 내리누르던 것들이 사라지니, 그냥 다. 세상만사가 다 즐거웠다.
'세르펜스도 그러려나?'
나에 대한 의문도 풀었고, 성검도···.
"···성검은 어떻게 된 겁니까?!"
"황태자를 선택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이후가 중요한 거잖아요!"
"보통은 누가 받았느냐가 중요하지 않나?"
내가 무엇을 궁금해하고 걱정하는 줄 뻔히 눈치챘으면서, 그가 괜히 의뭉을 떨었다.
"저는 다 얘기했으니, 어서 당신도 얘기해 보시죠!"
어째서 그런 묘한 표정으로 나타난 주제에, 성검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인 것인지.
[성검의 주인]에서 언급된 상황만으로는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그 전에, 중요한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또 뭡니까?"
중요한 일? 그런 게 아직도 남았나?
부루퉁한 기색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답하니, 그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저녁 시간대잖습니까. 밥부터 먹고 나서 얘기하도록 하지. 정 뭐하면 내일···."
"댁이 언제부터 밥때를 꼬박꼬박 챙겼다고!"
저거 그냥 미루는 거다.
말하기 힘든 일이라 미룬다기보다, 내가 그를 몇 개월이나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한 작은 복수였다.
"실컷 울었으니 슬슬 허기질 것 같은데, 아닌가? 게다가 선우, 당신은 식사에 무척이나 예민하잖습니까."
그의 말대로다. 게다가 오늘은 3시 간식 타임도 건너뛰었으니···.
"그럼 먹고 나서 다시 올 테니, 여기서···. 아니, 세르펜스도 얼른 식사하고 다시 여기로 오는 겁니다?"
"야근 수당까지 챙겨달라 할 기세군."
"그럼 저야 더 좋죠!"
"턱도 없는 소리."
안 주는 게 당연한데, 저가 먼저 언급해놓고 발을 빼니 줬다 뺏는 느낌이다. 내가 노려보든 말든 그가 태연하게 안경을 다시 썼다.
그냥 빨리 밥부터 먹고 와야겠다.
"···그럼 맛 밥!"
"아니, 그 전에."
그의 손을 놓고 일어나려는 나를 그가 잡아당겨 도로 앉히고,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손바닥으로 내 눈가를 덮었다.
따뜻한 기운이 어리고, 따끔거리던 눈가가 진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아도르(Adore)."
갑자기 세르펜스가 뜬금없는 단어를 내뱉었다.
"네? 그게 뭐···. 아, 놔!"
이 자식, 또 튀었다.
손을 치우기가 무섭게 바람처럼 밖으로 빠져나갔다. 어차피 밥 먹고, 또 보기로 했으면서.
저러면 덜 부끄럽나?
"···세례명이겠지?"
가족이나 연인. 친우나 동료. 무엇이 되었건, 정말로 소중하고 믿을만한 존재에게만 알리는 신성하고 존엄한 이름.
이전까지는 친구라고 여기면서도 괜한 반발심으로 시치미를 떼며 모른 척하는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정말로 친구라 인정해주는 것 같았다.
"아도르의 뜻은 분명히···."
그의 세례명을 듣고 나니 확신이 섰다.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역시 신 룩스메아였다.
계속 여기에 홀로 앉아 죽치고 있다간 세르펜스의 식사가 끝나버릴 것 같아, 식당으로 걸음을 옮기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신 룩스메아는 그에게 '나는 너를 무척이나 아끼고, 좋아하며, 사랑한다.'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모두에게 외면받고 홀로 외로워했을 10살의 세르펜스에게. 그런 의지를 전하고자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다른 이들에게 진심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이름을 내린 것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그런데도 그의 성장 과정은 물론, 그가 타락해가는 모습까지 그저 지켜봤다는 것은···.'
신이 직접 개입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다고 보면 되려나?
'이건 좀 생각해 볼 여지가 있겠는데···.'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음식을 먹는다기보다 마시다시피 서둘러 마치고, 다시 본관 4층의 응접실로 되돌아왔다.
식사 시간 한 시간을 꽉 채워서 밥 먹고 휴식까지 취하다 온 평소와 달리, 오늘은 밥만 먹고 올라온 탓일까.
세르펜스보다 한참 늦게 출발했음에도 엇비슷하게 도착했다.
복도에서 마주친 그를 보고 잽싸게 달려 응접실 문을 먼저 열었다.
"어떻습니까? 오늘은 제가 빨랐죠?"
"···복도에서 뛰지 마십시오."
중고등학생 때나 들어봤던 말을 이 나이에, 이 세상에서, 그것에 세르펜스에게 듣게 될 줄이야.
상실한 어처구니를 찾아서 얼타는 동안, 내가 열어놓은 문으로 그가 먼저 쏙 들어가 버렸다.
- 탁-.
나도 따라 들어가 문을 닫았다.
"자, 그럼 세르펜스 아도르 프라시더스?"
"···보채지 않아도 얘기할 테니. 유 선우, 당신도 자리에 앉으십시오."
"넵!"
"그리고 그건 평소에 막 부르라고 알려준 게 아닙니다."
그 정도는 알고 있다. 세례명은 이 세계에서 워낙에 소중하고 귀한 것이라, 간직하는 것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성검의 주인]만 해도, 휴마누스를 직접적으로 ‘브라이트’라 부르는 경우는 없었지.'
하지만 그래도···.
"그딴 거 제가 알 바입니까? 부르라고 있는 게 이름이지, 신줏단지 모시듯 간직만 하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안 그렇습니까, 아도르?"
"···절대 안 그렇습니다. 선우, 당신이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건 잘 알겠으나. 제발 이곳의 상식을 지키는 시늉이라도 하길 바란다."
질색하다시피 불편해하면서도 낯 간지러워하는 듯한 모습을 보니, 괜히 더 놀리고 싶어졌다.
'그래도 익숙해지면 효과가 좀 반감되려나?'
가끔 장난칠 때나 써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