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회
24. 공작님과 성검의 주인 (6)
보통 때라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눈치를 봐서 적당히 빠져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연회는 성검의 주인을 떠나보내는 자리였다.
휴마누스가 연회장으로 다시 돌아온 후. 황제가 폐회사까지 마치고 나서야 연회는 끝이 났고, 우리는 저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었던 것 아닙니까?"
마차에서 내려 세르펜스에게 내일 출근해서 보자는 식의 인사를 건네자, 그가 본관으로 들어가는 대신 내게 질문을 건넸다.
"아, 그거요? 당장 급한 일은 아니라서 내일 출근 후에 해도 됩니다."
"그런데 왜···."
"네?"
그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눈을 맞췄다.
그렇게 눈을 몇 번 깜박이고 나서야, 세르펜스는 인위적으로 꾸며낸 미소를 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과 함께 저택 본관으로 들어갔다.
'이건 내가 표정 관리를 못 하는 거야, 쟤가 예리한 거야?'
앞으로는 조심해야겠다. 내가 불안한 모습을 보이면 보호자로서···.
아니다. 괜히 어중간하게 숨기다가 들키면 더 슬퍼하려나?
* * *
출근과 동시에 바로 응접실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서 어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했길래 표정이 그따위였던 거지?"
"제 표정이 뭐 어쨌다고 그럽니까?"
"무언가··· 괴로운 선택을 강요당하는 듯한. 그런 표정이었습니다."
쓸데없이 정확하다.
이 정도면 사람들의 표정을 분석한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유선우 패치까지 적용한 게 틀림없다
"거기까지 눈치채셨다면야, 그냥 바로 말씀드리는 게 낫겠네요."
어서 얘기해보라는 듯, 세르펜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가 있다고 칩시다."
"소중하다는 건, 어느 정도를 말하지?"
"모두에게 배척당하며 홀로 고독감에 젖어들 때. 유일하게 다가와서 위로해주고, 긍정해주고, 같은 눈높이에 서기 위해 노력해 준. 그래서 너무 고맙고, 그 존재가 없는 삶은 상상하기조차 괴로울 정도로."
[성검의 주인]에서 나왔던 표현을 떠올리며 천천히 답했다.
아니마가 휴마누스와 리에나에게 마음을 열고 난 뒤. 부끄러워하며 조심스레 그녀에 대해 그렇게 말했었지.
그러면서, '나중에 둘에게도 우리 언니를 꼭 소개해주고 싶네···.'라고 혼잣말하듯 작게 덧붙였다.
지나고 보니 유사 사망 플래그 격의 복선인지라, 앞으로 되돌아와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또···."
"아, 알겠으니···. 다음으로 넘어갑시다."
추가 설명을 이어가려 하자, 세르펜스가 이제 되었다며 본론에 들어가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 누군가의 소중한 존재가 죽는 것을 내버려두게 된다면, 더 많은 이들을 구할 힘을 얻게 된다고 칩시다."
"···뭐?"
"그리고 그 존재를 살리는 것을 택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을 구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어쩌면 대륙이 위태로워질지도 몰라요."
"······."
말이 이어질수록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세르펜스라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구할 겁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가 조금의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답했다.
"어? 정말요?"
"···내게는 희생을 자처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네?"
아니, 이게 무슨 생뚱맞은 소리지?
마치 내가 대륙을 위해, 이 한 몸 바쳐 제물로서 희생하겠다는 말이라도 들은 듯한 반응이다.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간절하고, 다급하면서. 어딘가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누군가를 희생시켜 구원을 바라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그러니 다 같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은 선우, 바로 당신이었잖은가."
"···네?"
얼씨구? 이젠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내가 더 노력한다면···. 그걸로는 어떻게 안 되는 건가···?"
"어, 음···."
그가 울먹거리며, 애원하듯 말해왔다.
'이 자식, 진짜 내가 죽겠다는 얘기로 알아들은 거잖아?!'
재빨리 내가 했던 표현을 되짚어보니, 정말 자기소개가 따로 없었다.
그가 혼자서 외로움을 끌어안고 있을 때, 다가가서 위로와 긍정의 말을 해주며···.
'심하게 같은 눈높이를 추구했···지?'
내가 말한 눈높이는 아니마가 보는 세계를 함께 보기 위해, 마법 실력을 갈고닦으며 노력한 것을 뜻했는데.
왠지 그녀의 거룩한 뜻을 내가 더럽혀버린 것만 같다.
"아니, 이거 제 얘기 아니거든요! 안 죽어요, 희생 안 합니다!"
"···정말인가?"
"네, 정말로."
그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에 물리적인 힘이 있다면, 그대로 나를 꿰뚫기라도 할 기세다.
거짓말이 아니었기에, 당당하게 그 시선을 마주했다.
"···그, 그래 보이는군."
혼자서 착각하고 소란을 피운 것이 무안한 모양이다. 그가 헛기침하며, 물기가 어렸던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냥 오해로만 끝났으면 다행이지. 앞뒤 문맥을 이어보면 자기 입으로 내가 자신에게 소중한 존재라고 선언한 셈.
태연함을 가장하려 했으나, 민망함과 부끄러움으로 달아오른 그의 얼굴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아유, 그러셨구나~! 제가 그렇게 소중하셨어요?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크읏."
내가 낄낄대며 놀리자, 그가 분하다는 표정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그, 그럼 그건 누구 얘기였던 겁니까?!"
"어제 연회에서 만났던 아니마와 그녀의 친한 언니요."
"······."
처음부터 그것을 밝히고 시작했으면 좋지 않았냐는 듯, 세르펜스가 극도로 억울하다는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이대로 계속 놀리면 울 것 같으니, 이제 자중해야겠다.
'더군다나, 이제부터 말하려는 내용은 결코 가벼운 얘기가 아니니까···.'
나는 웃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분위기를 잡고 본래의 주제로 돌아왔다.
"아무튼···. 아니마는 천재적인 마법에 대한 재능 탓에 다른 마법사들과 마법을 이해하는 눈높이 자체가 달랐거든요. 그래서 다른 마법사들에게 배척당했고, 그 탓에 일부러 성장하려는 노력 자체를 그만두게 되어버렸다는 설명이 있었습니다."
"······."
이 녀석, 완전히 삐졌나 보다. 시위라도 하는 듯, 눈도 안 마주치고 입을 앙다물고 있다.
"그리고 훗날. 악마 숭배 세력이 그 유일한 존재의 몸 안에 악마를 소환해 버렸고, 결국···. 아니마가 제 손으로 그녀를 죽이게 된 겁니다."
"······!"
그 소중한 존재를 죽인 것이 아니마 본인이라는 얘기에, 세르펜스가 흠칫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다른 방향으로 돌리고 있던 고개가 다시 나를 향했다.
악마가 대륙에 소환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
첫 번째 방식이 그릇을 이용한 소환이고, 두 번째는 악마의 육신 채로 넘어오는 방식이다.
그릇을 이용한 소환의 장점은, 육체를 소환하지 않기에 재료와 제물의 부담이 적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것은 장점이자 단점으로, 그릇이 되는 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악마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이 천지 차이라는 특징이 있다.
적합한 그릇을 찾는다면, 적은 제물로 보통의 소환보다 훨씬 큰 전력을 얻을 수 있었다.
반대로 그릇이 보잘것없다면, 소환을 하나 마나다.
육체를 가지고 소환되는 거야, 이런 제약 조건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장점이겠고.
그 외에도 윈스톤의 경우처럼 계약을 통해 힘만 전해주는 예도 있으나, 그것은 소환으로 보기는 모호하니 넘어가자.
"어째서 죽인 건가. 어떻게···죽일 수 있었지?"
"그녀가 그러길 바랐고, 또 괴로워했으니까요."
악마는 자신의 그릇이 성검의 동료인 아니마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음을 눈치채고, 일부러 그녀의 자아를 남겨두었다. 조롱하듯 조금씩 내보이며 아니마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아니마는 그녀를 놓아줄 수 있게 되었다. 그녀를 위해 그녀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발판으로 아니마의 실력이 몇 단계나 뛰어올랐고, 그 이후로도 복수를 위해. 이제까지의 나태했던 과거를 버리고, 힘을 길렀습니다. 그녀의 마법으로 많은 이들을 구하고, 적들을 해치울 수 있었죠."
망할 [성검의 주인] 같으니···.
"······."
"괜찮아요, 세르펜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자신이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태연하던 그가, 눈도 제대로 깜박이지 못할 정도로 경직되어 있었다.
"세르펜스? 저기요, 아도르!"
그가 고장 난 고양이처럼 몸을 크게 달싹이더니,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아···, 네. 괜찮습니다."
전혀 안 괜찮아 보인다.
본인도 모르게 몸에 밴 습관대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완벽하지 못해, 어색하기 짝이 없다.
심지어는 내가 자신의 세례명을 부른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진정하고, 정신 차리고. 아무 말이나 좀 해봐요."
"······."
세르펜스가 한참을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왔다.
"혹시···. 그것도 '저'의 모략입니까?"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유일한 이해자를 제 손으로 죽이게 하는. 그런 계획을 자신이 꾸며냈느냐는 질문이다.
소중한 존재가 단 한 명도 없었던 [성검의 주인] 속의 그라면, 충분히 가능한 짓이라 여긴 거다.
"그런 거 아닙니다. 세르펜스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저를 위로하기 위해 하시는 거짓말은···."
"그럴 거면 애초에 최종 보스 얘기도 안 했거든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계시는 분이···."
그제야 진정한 듯, 그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가 흠칫 놀란다.
"안도하기는 좀 이르죠. 눈치채셨겠지만, 그 얘기는 즉···."
"···이번에도 일어나는 것이 확정된 거나 다름없다는 얘기로군."
바로 맞췄다.
그가 보인 모습을 보면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기왕이면 확실히 해두는 편이 좋겠지.
"구할 거죠?"
"···그래야지."
아까 부족한 전력은 본인이 메꾸겠다고도 말했으니···. 어째 순진한 애를 속여서 사기 계약을 맺은 느낌이다.
"그래서 그 일은 언제 일어나는 겁니까?"
"일단 악마가 소환되기 시작하는 건 1년 후 즈음부터니까, 아직 멀었네요."
"······."
어째서 그걸 벌써 말해서 사람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느냐는 눈빛으로 세르펜스가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뭐, 당장 떠올리고 싶어서 떠올렸나?
"그래서 당장 급한 일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당신은 도대체가···."
그가 몸에 힘을 빼고, 소파에 늘어지듯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이마를 짚은 모습이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지칠 만도 하지.'
감정도 다양하게 휙휙 바뀌고, 몸도 경직되었다가 움찔거렸다가. 아주 바빴다.
"그러고 보니 아직 오늘 업무는 시작도 하기 전 아닙니까?"
"······."
"청혼서 답장 쓸 것도 아직 남았죠?"
"···하."
아득하다는 표정으로 그가 궤탄에 찬 탄식을 내뱉었다.
"오늘처럼 격렬하게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날은 처음입니다."
"그건 참 큰일이네요. 보통은 쉬고 있어도 좀 더 격렬하게 쉬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그건 그쪽 세계의 사람들에게만 해당 사항 아닙니까?"
별 괴이한 소릴 다 듣겠다는 표정이다.
세르펜스는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멍하니 늘어져 있는 경험이 있기나 할까?
"그럴 리가요! 세르펜스가 제대로 쉴 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취미 생활이라면 잘 하고 있지 않은가."
"아직 멀었습니다. 세르펜스에겐 가르칠 게 참 많네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좀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기분도 배워야 하고. 이불 밖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뼈저리게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그딴 걸 배우는 게 옳은 것인가, 라는 의문이 세르펜스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깟 청혼서 답장 따위! 까짓거 미루고, 오늘은 그냥 쉬죠? 아니, 쉽시다!"
"······."
"이럴 땐 '그럽시다!'라고 대답해 주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 그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