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03화 (103/925)

103회

25. 공작가의 기사님 (1)

긴 소파에 편히 누워 뒹굴거리던 나와 달리, 세르펜스는 반듯한 자세로 좌불안석하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 상태로 점심시간대가 다가왔다.

세르펜스는 마치 4교시 종료 10분 전의 중·고딩처럼, 한쪽 다리를 살짝 옆으로 빼내며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태세를 취했다.

'평소 때는 보던 서류까지 끝내고 천천히 일어나더니만···.'

아마 오늘이 세르펜스의 25년 평생에 걸쳐, 처음으로 식사시간을 간절히 기다린 날이 아닐까?

정각이 되자마자, 그는 벌떡 일어나 '식사합시다!'라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거 또 도망간 거 맞지?"

이쯤 되면 그를 도망펜스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면전에 대고 그렇게 불러도, 세르펜스는 이를 부정할 자격이 없다.

식사를 마치고 올라오니 아니나 다를까, 그는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하기로 한 거 아닙니까? 대답까지 하셨잖아요."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 세르펜스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의 책상 앞에 서서 허리에 손을 얹고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니, 눈치가 보이는지 그의 고개가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이윽고 그의 고개가 아예 편지지 안으로 파고 들어가기 일보 직전,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스가 윈스톤의 도착을 알렸고, 세르펜스는 몹시 기꺼워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있는 게, 그렇게나 힘들었던 건가···?'

세르펜스는 한스에게 그를 불러들이라는 말과 함께, 기사 서임을 위한 예장용 검을 가져오라 명했다.

몇 분 후, 한스가 먼저 예장용 검을 가지고 돌아왔다. 거의 동시에 제온의 안내를 받은 윈스톤도 집무실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가문의 인장이 들어간 검이다 보니, 자신이 직접 그것을 챙기고 제온에게 안내를 시킨 것 같다.

"어서 오십시오, 레드포드 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윈스톤이 집무실에 들어서자, 세르펜스가 더없이 화사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연기와 계산이 아니라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그 미소란!

어제 연회장에서 보았던, 계산된 미소보다 더 자연스럽고 빛이 났다.

'저 찬란한 미소의 기원이, 할 일을 미뤄두고 아무 의미 없이 늘어져 있는 게 불편해서라는 건···. 이 자리에서 나밖에 모르겠지.'

세르펜스가 만약 내가 살던 세계의 사람이었다면, 과제가 나오는 날 바로 끝내 놓는 성실한 학생이지 않았을까?

'판타지 출신이라 그런가, 이렇게 대입만 해봐도 현실감이 사라지네···.'

원래 과제는 [과]거의 내가 원망스러워질 정도로 최대한 미루다가, [제]한 시간 내에 끝내기만 하면 되기에 과제인 거다.

아무튼, 윈스톤은 이러한 사정을 알지 못했다.

자신을 환대하는 세르펜스의 모습에, 그는 황송하고도 감격스럽다는 표정으로 몸 둘 바를 몰랐다.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헤매던 그는, 결국 냅다 무릎을 꿇으며 자세를 낮췄다.

"이 윈스톤 레드포드! 과거의 잔재와 굴레를 끊어내고, 이 자리에 도달하였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검이 되기를 소망하며, 충성을 바치고자 합니다!"

무척이나 비장한 목소리다. 지나치게 빛나고 있던 세르펜스도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고, 손을 옆으로 내뻗었다.

한스가 들고 있던 예장용 검을 그에게 건넸다.

"경은 저, 세르펜스 A. 프라시더스의 뜻에 따라 프라시더스 공작가를 위해 검을 들 것을 맹세합니까?"

"예! 맹세합니다."

"또한, 신성 루멘 제국의 안녕을 위해. 더 나아가 우리들의 땅, 가나안을 수호하기 위해 검을 들겠노라 맹약합니까?"

"예! 맹약합니다."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세르펜스와 윈스톤의 문답이 오갔다.

"그렇다면 오늘부로 레드포드 경은 저의 기사가 되었음을, 신 룩스메아의 이름 아래 서약합니다."

세르펜스는 들고 있던 검의 칼등으로, 윈스톤의 양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소설에서나 읽어봤던 기사 서임식을 직접 두 눈으로 볼 줄이야. 판타지 세계에 떨어지고 볼 일이다.

'그래, 수여식이라는 게 원래 이래야지!'

오글거리기는 하지만, 예스러운 멋이 있었다.

그에 반해 내 작위 임명식은 어떠했던가. 처음 받은 준 남작 작위야 어디까지나 임시직이라 그냥 임명서를 건네받았을 뿐이었지만, 자작 작위를 받았을 때는···.

'휴마누스 이 자식···?!'

그땐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지금 이 모습을 보니 괜히 억울해졌다.

'나도 저런 거 해보고 싶다고, 나중에 세르펜스를 졸라 볼까?'

그런 생각이 잠깐 떠올랐으나, 내가 과연 진지한 분위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자아 성찰 후 빠르게 포기했다.

보나 마나 처 웃기 바쁠 거다.

"레드포드 경은 이제 일어나셔도 좋습니다."

"주군의 명을 받듭니다!"

세르펜스가 그에게 프라시더스 가의 인장이 새겨진 예장용 검을 건넸고, 윈스톤은 그것을 조심스럽게 받아들고는 절도있는 동작으로 바로 섰다.

어디까지나 예장용이니만큼 실제 전투에서는 쓰이지 않겠지만, 그것을 하사받는 것 자체로 큰 의미가 있겠지.

"집사와 부 집사는 이만 나가보셔도 좋습니다."

세르펜스가 그들을 밖으로 물렸다.

한스는 언제나 그러하듯 소리 없이 문밖으로 빠져나갔고, 제온은 작은 발걸음 소리를 내며···.

'방금 그거 뭐야? 한스, 당신 그거 어떻게 한 건데?!'

이제까지는 너무 자연스러워서 눈치채지 못했으나, 비교 대상이 생기니 이질감이 보였다.

'저 양반,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그가 빠져나간 문과 세르펜스를 번갈아 쳐다보며 입을 뻐끔거렸으나, 무슨 문제 있느냐는 시선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렇게 한스에 관한 의문은 풀지 못한 채, 우리는 응접실로 자리를 이동했다.

"생각보다 좀 늦으신 것 같은데, 일이 많이 길어지셨나 봐요?"

"망명 신청 후 서류 심사 기간이 있다는 것을 깜박해서···. 일을 진행하며 미리 신청해 두었어야 했는데, 그것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 탓입니다."

내 질문에 그가 겸연쩍다는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이전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이제 보니, 원망과 복수심으로 흐릿해져 있던 그의 두 눈에 또렷한 상이 맺혀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전에는 제게 그런 말투 안 쓰시지 않았습니까?"

"프라시더스 공작가 소속의 이들은 서로에게 경어를 써야 한다고, 올라오면서 부 집사님께 들었습니다."

기사 서임을 위해 검을 챙겨오라 했으니, 그것은 그를 프라시더스 가문의 소속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말과 동일했다.

이를 눈치챈 제온이 그에게 프라시더스 가의 규칙들을 몇 가지 알려 준 거겠지.

"그렇다고 극존칭을 사용하실 필요는 없는데요?"

"···그런 겁니까?"

애초에 그가 나에게 쓰던 말투도 높임말의 한 종류였다.

"서로를 존중해주자는 의미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설령 레드포드 경이 반말을 한다 칩시다. 그렇다고 상대를 낮잡아보는 그런 사람은 아니시잖아요?"

"···그렇게 봐주셨다니, 감사할 따름이오."

이제 보니 윈스톤은 감동 임계치가 낮은 편인가 보다.

그냥 내가 편히 지내고 싶어서 한 말이었음에도 그는 감동하였다는 표정을 지었다.

"책··· 아니, 보좌관님은 볼수록 배려심과 사려가 깊으신 분 같소. 이런 사람을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였다니, 당시의 나는 얼마나 눈이 멀었던 것인가···!"

허어-, 하고 탄식을 내뱉으며 말하는 그 모습에, 세르펜스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내가 배려심과 사려가 깊다는 말 때문일 거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세르펜스는 그 말에 비웃으면 안 되지 않아?'

돌봐준 은혜도 모르는 괘씸한 녀석 같으니. 그를 살짝 흘겨준 후, 다시 윈스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앞으로 자주 얼굴 볼 사이니, 편하게 지내고 싶어서 그런 것뿐입니다."

"그런 얘기가 아니오."

윈스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투기장에 잡혀 있던 사람들을 풀어주고, 그들을 지키며 밖으로 빠져나오고, 그들이 내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을 때. 당신이 내게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소."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두 분을 비롯한 그 비밀 결사단체가 오지 않았더라면, 내가 죽이게 되었을 사람들이었소. 그런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받으니, 나 자신이 참으로 염치없게 느껴지더이다. 그들에게 미안하고, 그곳에서 내가 죽였던 이들에게도 미안하고···. 진정한 적을 두고 죄 없는 피해자들에게 살의를 피워댔던 과거의 자신이 어찌나 어리석게 느껴지던지."

씁쓸하게 웃으며 말하지만, 죄책감에 짓눌린다거나 하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기보다, 과거를 반성하고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우리 애는 언제쯤 저만큼 자랄까?'

잠시 일탈했을 뿐인 성인과 미처 자라지 못했던 어린아이의 차이다.

"무릇 기사라면 살의를 가지고 적에게 검을 겨누는 것보다, 지켜야 할 존재들을 살피는 것이 우선되어야 함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소. 모두 보좌관님 덕분이오."

그렇게까지 거창한 뜻을 가지고 한 말이 아니라, 그냥 자신을 소중히 여기라는 것뿐이었는데···.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레드포드 경이 직접 느끼고 깨달으신 겁니다."

"그렇지 않소! 이렇게 뒤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보좌관님이 해주셨던 말이 있었기 때문이오!"

나를 너무 높이 평가하는 게 아닌가 하여 손을 내저었지만, 윈스톤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아주 내 얼굴에 금칠하고 있다.

"주군으로 모시고 싶은 분이 프라시더스 공작님이시라면, 보좌관님은···. 마음의 스승으로, 인생의 선배로 모시고 싶은 분이오."

"···네?!"

"이렇게 같은 주군을 모시게 되었고, 보좌관님이 나보다 먼저이니···. 그, 선배님이라 불러도 되겠···소?"

윈스톤이 큼큼, 헛기침하며 쑥스럽다는 듯 말했다. 이건 대체 무슨 소리일까.

'마음의 스승과 인생의 선배?'

공작저 식구들이 들었다면, 공작저가 뒤집힐법한 소리다. 아마 제온이 내가 소심하단 얘기를 했을 때 이상으로 혼비백산하지 않을까?

"좋은 후배가 생겨서 다행입니다, 시온 경."

"네?!"

어이가 없어 잠시 멍해진 사이, 세르펜스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체 너까지 왜 이러세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만일 눈앞에 있는 이가 윈스톤이 아닌 유지스였더라면, 그 말을 필터링 없이 바로 내뱉었을지도 모른다.

"간략한 보고는 서신으로 받아보았으나, 자세한 이야기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아예 그쪽 화제를 꺼내지도 못하도록 얘기를 돌려버린다.

아까 몰래 비웃을 땐 언제고, 내가 곤란해 하는 게 재밌나?

"물론입니다. 우선 그 백작가문의 처우는 선배님께서 말씀하셨던 그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듯, 이제는 가문명조차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를 부르는 호칭은 선배님으로 굳어지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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