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05화 (105/925)

105회

25. 공작가의 기사님 (3)

세르펜스의 지시로 응접실 한쪽에 생뚱맞게 늘어져 있는, 푸른색의 무명실을 엮어 만든 밧줄을 몇 번 잡아당겼다.

이것은 일종의 호출 벨이다. 사용인을 부르기 위해 귀족이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없도록, 그들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마련된 장치다.

응접실 안은 방음이 되어있기 때문에, 줄을 잡아당기면 그것과 연결된 복도의 종이 울리는 식이었다.

줄을 당긴지 5분도 채 안 되어, 복도와 연결된 문에서 노크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한 호흡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한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세르펜스가 무엇을 위해 자신을 불렀는지 이미 눈치챈 모양이다.

부른 이유를 묻는 대신 살짝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비켜섰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윈스톤이 절도 있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 뒤, 응접실 문턱을 넘었다. 한스가 문을 닫았다.

밖과 안이 단절되었다.

"그래서, 한스 저 양반은 정체가 대체 뭡니까?"

나는 궁금했던 점을 바로 세르펜스에게 질문했다.

"집사잖습니까."

"아니, 세상에 어떤 집사가 걸을 때 발소리 하나 안 내고 걷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건 비밀 통로를 오가는 덕분이라 치자.

하지만 발걸음 소리가 안 나는 것은 지나치게 수상하다. 수상하기로 따지자면 한스 본인도 못지않은 것 같은데, 나에게만 뭐라고 해댔다니 억울하기 짝이 없다.

"별거 아니다. 로베르토 가문은 대대로 집사로서 프라시더스 가를 모시면서, 동시에 산하의 정보 단체를 관리하고 있다 보니 그것이 몸에 밴 것이겠지."

"···네?"

엄청나게 별것 맞잖아.

짜게 식은 눈으로 세르펜스를 바라보니, 그가 설명을 부연했다.

"대귀족이라면 어느 정도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다들 비밀리에 정보 단체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법이지."

···뭐야, 그게. 무서워.

설마 이 세상의 모든 대귀족 가문의 집사들은 정보 단체의 수장인 건가?

"보통은 따로 사람을 두고 관리한다."

"아, 그렇···."

무섭게 뭐 하는 짓이야?!

아무리 내 생각을 알아챘어도 그렇지, 입 밖으로 꺼내기 전에 답변을 해버리는 것은 좀 자제해 줬으면 좋겠다.

"그럼 집사님의 자식은 어쩌고, 제온이 부 집사를 하고 있죠?"

어느 날 돌아와 봤더니 제온이 부 집사가 되어있어서, 그것에 신경 쓰느라 깜박 잊고 있었다.

이전에 한스가 자기네 가문은 대대로 공작가를 모셔왔다며,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공작저 사람들의 반응도 그렇고, 다들 제온을 한스의 후계자쯤으로 인식하던 것 같던데….'

이 기회에 로베르토 가를 완전히 도려내고, 그 자리를 리벨론으로 채울 생각인 건가?

"아들이라면 선우도 본 적이 있을 텐데?"

"네? 언제요?"

"영주성의 총괄 집사."

밤늦게 영주성에 도착하면 우리를 기다리는 집사가 바로 한스의 자식이었나 보다. 영주성에 근무하는 4명의 집사 중 우두머리 격 인물이다.

매번 봤는데도 한스와 그를 연관시키지 못한 것은, 그 둘이 별로 닮지 않은 탓이다.

완전하게 머리가 하얗게 새어버리고, 눈동자가 보일 듯 말 듯 한 실눈인 한스와 달리, 그의 머리칼은 붉었고 눈매도 확 트여있었다.

부자 관계라고 듣고 나서야, 둘의 눈동자가 똑같이 남색이었다는 공통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 집사님이 은퇴하면 그분이 올라오는 겁니까?"

그건 아니라는 듯, 세르펜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세대(世代)마다 번갈아 가며 공작저와 영주성을 맡는다고 한다.

은퇴할 시기를 맞춰서, 자신의 손주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식인가 보다.

그러나 한스의 손주는 제 체질이 아니라며, 집사 교육은 때려치우고 로베르토 가문의 다른 일. 즉, 정보 수집 쪽에 집중하여 그 현장에서 뛰고 있다나?

'어쩐지 한스 저 양반이 거슬릴 텐데도, 어째 가만히 두고 있나 했더니···.'

특히나, 정보들을 취합하여 정리·보고하는 역할을 수도의 집사가 맡고 있다고 한다.

공작을 가까이 모시고 있으며, 공작령보다 수도에 훨씬 많은 정보가 빠르게 오가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정보 단체에서도 핵심 역할을 맡아야 하니, 능력뿐 아니라 정녕 믿을만한 자가 맞는지도 확인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더더욱 후계자를 고르는 것에 신중해질 수밖에.

"설마 제온이 그것도 인수인계 받는 중입니까?"

"···궁금증이 다 풀렸으면, 이제 일 하러 갑시다."

대답을 피한다는 건 내 말대로라는 거겠지. 제온은 낙하산은 낙하산이나, 이유 있는 낙하산이었다.

이미 시간이 꽤 늦어졌기에, 몇 시간 남짓 남은 근무시간 동안 집무실에서 열심히 일에 집중했다.

그리고 퇴근 후, 저녁을 먹다가 깨달았다.

'···오늘은 일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었나?'

느닷없는 정보 조직에 관한 이야기에 정신이 빠져, 깜박 잊어버리고 말았다.

* * *

공작령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 세르펜스가 윈스톤에게 물었다.

"공작저에서의 생활은 어떠십니까?"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고작 며칠 지냈을 뿐이었으나, 빈말이 아니라는 듯 윈스톤의 표정에는 만족감으로 가득했다.

공작저는 잡생각 없이 검술 수련에만 집중하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더구나, 드디어 청혼서의 답장을 끝낸 세르펜스가 그의 검을 이따금 봐주기 시작했다.

2m가 훌쩍 넘는 키 때문인지 문득 프그누토 백작이 떠올라, 윈스톤이 없는 자리에서 세르펜스에게 둘 중 누가 더 강하냐는 질문을 던져봤다.

'아직까지는 백작.'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언젠가 제치긴 할 거란 얘기네.'

듣자하니 아직은 공작저의 기사들 사이에서도 상위 가량의 실력이라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하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아직 멀었다.

그나마 빠른 속도로 성장 중이라니 다행이다.

이래저래 성검 파티의 전력 감소가 예상되는 만큼, 실력을 키울 수 있는 아군은 최대한 키워놓는 편이 안전하겠지.

물론, 그 수고는 세르펜스가 할 거다.

'적의 전력을 더 빼 올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그 행방이 예상 가능한 존재는 이미 악마 숭배자들 측에 넘어간 후거나, 어디서 뭘 하던 사람인지 아예 모르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러고 보니 공작저 내에서 선배님의 평가가 꽤나 해괴하더이다."

"제가 왜요?"

문득 떠올랐다는 듯, 윈스톤이 말했다.

"가볍고 유쾌하다던가, 한심하고 무능하다거나, 생각이 없어 보이지만 활기차고 착한 것 같다던가 하는 평이 들렸소."

이 사람들이?!

제온이 손님으로 방문했을 때의 일로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내 이미지가 이 정도까지 일 줄은 몰랐다.

윈스톤의 덩치나 사나운 눈매를 보고도 사용인들이 먼저 말을 붙여 떠들어댔을 리는 없고. 그렇다고 그가 이런 것을 묻고 다닐 만한 사람은 아니다

들려왔다는 말 그대로, 그가 나를 선배라 부르다 보니 주변에서 나에 관해 쑥덕거리게 되고, 그것을 듣게 된 걸 테다.

아니면 얼마 전 기사들끼리 조촐하게 환영회 자리를 가졌다니, 거기서 주워들은 거던가.

'한심하고 무능하다는 건 어차피 한스의 평일 테니 무시하고.'

생각이 없다는 말은 좀 억울하다. 내가 이 세계에 오고 난 후, 귀찮아서 안 쓰던 머리를 얼마나 빡세게 굴리며 살았는데!

그들과 친해지려고 세르펜스의 찬사에 맞장구쳐주고, 그 과정에서 뇌를 안 거치고 되는 대로 떠들어댄 탓이다.

'아마도···?'

하지만 이젠 나를 천하에 둘도 없는 책사로 여기며, 선배로 모시겠다는 윈스톤이 왔으니 그것을 정정해 주었겠지.

"아, 걱정하지 마시오. 절대 그것을 정정하지는 않았으니."

"네?"

"주군께서 미리 언질을 주지 않았더라면, 실수할 뻔했소."

이게 뭔 소린가 싶어, 세르펜스를 바라보니 그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걸렸다.

"본인을 감추어, 타인의 방심을 끌어내기 위한 작전···이라 들었소. 혹여, 그것을 부정했다가 선배님의 의도를 해칠까 저어되어, 그냥 긍정하였소."

그렇다고 긍정할 건 없지 않나 하는 생각에, 조금 씁쓸해졌다. 뿌듯해 보이는 그 표정 때문에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뭐했다.

세르펜스는 나 몰래 무슨 말을 해놓은 거야?

"원체 시온 경께서 명예보다는 실리를 중요시하는 분이시라···."

뭐라 할 말이 없어 침묵을 지키고 있었더니, 조용히 차를 마시던 세르펜스가 불쑥 한마디 거들었다.

얘는 대체 내 설정을 어디까지 키울 셈인지 모르겠다.

어처구니를 잃은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윈스톤이 감탄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인다.

"아무튼, 그냥···. 실제와 소문이 다른 것이 워낙 딴판인지라, 놀라워서 말해보았소."

나도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이후, 이어진 기차 안에서의 시간은 더욱 내 할 말을 잃게 하였다.

가만히 앉아 있던 윈스톤이 좀이 쑤셨는지, 세르펜스에게 허락을 받고 구석에서 푸쉬업이나 윗몸일으키기 등 체력 단련을 시작했다.

세르펜스는 이전. 솔레르티아와 함께 기차를 탔던 날처럼 기도를 올렸는데, 그냥 자세만 취했던 그때와 달리 은은한 빛까지 흘려댔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미약한 신성력이 흘러나왔다.

'뭐 하는 거지?

그 모습들을 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침대에 들어가 낮잠이라도 자려 했으나···.

"방금 간식을 드시고 주무시는 거요?"

윈스톤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선배님을 다시 뵈었을 때 느꼈던 거지만, 이전보다 살이 좀 올랐다 생각은 했는데···. 호신을 위해 검을 배우고 계시다 들었소만, 민첩한 움직임을 위해 조금은 체중 조절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네?"

졸지에 나까지 윈스톤의 옆에서 그를 따라 운동을 하게 되었다.

'차라리 세르펜스 옆에서 기도하게 해줘! 룩스메아에게 따질 것도 많은데!'

기도 중에도 소리와 기척은 모두 파악하고 있었는지, 한참 뒤 눈을 뜬 세르펜스가 운동 중인 내 모습을 보며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릴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

그렇게 기차 안은 느긋한 여유 대신, 급박하게 차오르는 호흡과 땀으로 인한 열기로 가득해졌다.

지금 여기가 기차 안인지, 지옥의 50시간 다이어트 캠프인지 분간이 안 간다.

나를 선배님이라 모시겠다는 후배는 어디 가고, PT 트레이너가 나타나서 나를 열심히 굴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간식을 자제하며 조금씩 빼 나갈 것을!'

내가 미리 챙겨온 간식들은 모두 세르펜스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윈스톤은 단 음식을 싫어했고, 나는 식사 외의 음식물을 금지당했기에 어쩔 수 없다는 이유였다.

단 음식 하니, 세르펜스가 사탕을 먹는 장면도 목격되었다. 저녁 늦게 윈스톤이 씻으러 욕실에 들어가자마자, 냉큼 사탕을 하나 꺼내어 입에 넣었다.

병 안의 사탕은 상당수 줄어있었다.

그렇게 세르펜스의 입에는 단 음식이 들어가고, 내 입에서는 단내가 나는 기차여행이 진행되었다.

기차에서 내릴 때가 되니, 근육통으로 팔다리가 후들거려 세르펜스에게 신성력을 주입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돌아갈 때 또 해야 하는 거잖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러나 그 끔찍한 일은 기차 안에서만 벌어지지 않았다.

'공작령에 내려온 게 몇 달 만이더라?'

일이 겁나게 많이 쌓였다는 소리다.

영지 방문 일정 중, 내가 유일하게 즐거워하는 둘째 날의 일정. 보육원에 갔다가 공작령에 암행을 나가는 일정이 통째로 날아가고 서류처리에만 집중해야만 했다.

어차피 영주성. 그것도 집무실에만 콕 박혀있는 고로, 우리가 서류에 시달리는 동안 윈스톤은 세르펜스의 배려로 가족들의 새 보금자리를 확인하러 갔다.

처음에는 주군이 일 더미에 파묻혀 있는데 어찌 혼자 쉬러 가느냐며 거절했으나, 새로 입주한 영지민의 생활을 확인하고 오라는 명을 받고 나서야 가족들을 보러 갔다.

"기사들은 원래 다 저럽니까?"

"대개 그런 편이다."

진짜 피곤하게들 산다.

내가 기사가 아니라 보좌관의 몸에 들어와서, 정말 천만다행이다. 난 저렇게는 절대 못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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