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06화 (106/925)

106회

26. 공작님과 2황자 (1)

이번의 공작령에서의 일정은 진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밀린 서류의 양부터가 장난이 아닌지라, 일이 서툴던 첫 달보다도 훨씬 정신없이 흘러갔다.

'그래도 앞으로는 몇 달 정도 방문을 걸러도 괜찮도록 조치를 해놨다니까···.'

행여나 제국을 오래 비우는 일이 생기더라도, 이렇게까지 일이 밀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핵심이 되는 일들은 어쩔 수 없이 남겨 둘 수밖에 없겠지만, 그 밖의 것들은 영주성의 최고 행정관의 주도하에 다수의 행정관에게 동의를 받아 일을 진행하게 될 거란다.

그리고 이를 영주성의 총괄 집사이자, 프라시더스 공작가의 사설 정보 조직을 관리하는 로베르토 가문의···.

쉽게 말해 한스의 아들이 몰래 감시·보고하는 체제였다.

'원래는 성검의 주인이 되고 난 후, 써먹었을 방법이려나?'

이건 도대체가 믿고 맡기는 건지, 의심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맡기는 건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아무튼 그렇게 돌아갈 수 있도록 위임장을 남겼다 하니, 다시는 이런 몹쓸 고생을 하는 일은 없어질 거다.

'그런 방법이 있으면 빨리 좀 적용시켜놓지!'

백지장조차 맞들면 낫다는데, 그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서류의 산을 혼자 처리해왔다니. 이 세상 모든 짐을 혼자 짊어질 생각이었나보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앞으로는 공작령 또한, 수도의 저택처럼 과중 업무가 사라진 것이다.

'덤으로 내 일거리도 줄어들고.'

그렇다 해도 이미 쌓인 일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돌아오는 기차에 올라타자마자, 기절하듯 거의 하루를 꼬박 잠들었다.

내 꼴이 얼마나 피폐해 보였는지, 윈스톤도 돌아오는 길에는 내게 운동을 권하지 않았다.

그래도 간식은 뺏겼다.

수도로 돌아온 다음 날.

오전에 자문회에 다녀오고, 점심 식사까지 끝낸 뒤 집무실에 올라왔더니 익숙한 빈 병 하나가 내 책상 위에 다소곳하게 올려져 있었다.

'이 녀석 좀 보게?'

일부러 개수를 맞춰놓았으니, 어제저녁의 것을 마지막으로 병이 비었겠지.

안 그래도 오늘 이번 달의 일용할 사탕을 채워줄 요량으로, 사탕을 챙겨온 터였다.

사탕을 인질로 잡고 줄까 말까 하며, 제 입으로 사탕이 먹고 싶다는 얘기를 하면서 병을 내놓게 할 심산이었는데 이런 수를 쓸 줄이야!

선수를 뺏겼다.

어쩔 수 없이 종이봉투에 한가득 골라 담아 온 사탕을 하나씩 세면서, 종류별로 옮겨 담았다.

"무슨 맛 사탕이 제일 맛있었습니까?"

"그··· 달달한 거?"

"그렇게 말하면 어찌 압니까?"

설탕으로 만든 것이니만큼, 사탕이 단것은 당연한 소리다. 그걸 무슨 대답이라고 하는 거지?

"으음, 처음 먹어본 맛이라···. 초록색은 무슨 맛인 거지?"

"사과 맛이요."

"···그게 사과라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세르펜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먹은 사과 중에는 그런 맛과 향이 나는 사과는 없었다고 말하는 것 같다.

"맛이 똑같으면 건강하게 진짜 사과를 먹지, 사탕을 왜 먹겠습니까? 그게 바로 사탕의 묘미죠!"

개소리 같은데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했는지, 세르펜스는 그것을 더 걸고넘어지지 않았다.

"그럼 싫어하는 맛은요?"

"계피 향 나는 것?"

"그것은 계피 맛입니다."

"···왜 그것만 맛과 향이 충실하게 반영된 거지?"

그가 불만을 토로했다.

이전에 계피 설탕이 묻은 츄러스는 잘 먹길래 괜찮을 줄 알았는데, 계피 사탕의 알싸한 맛은 취향이 아니었나 보다.

그 맛이 떠올랐는지, 그가 낯을 찡그렸다.

"세르펜스는 애들 입맛이네요!"

병을 흔들어 방금 담았던 갈색의 계피 사탕을 꺼내어 그중 하나는 내 입에 넣고, 나머지는 도로 봉투에 담았다.

그리고 그 개수만큼 초록색의 사과 사탕을 병에 담았다.

'맛있기만 하구만!'

이런 게 바로 어른의 맛이란다, 라고 말하는 표정으로 세르펜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은근히 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럴 때 보면 참, 어린애 그 자체인데.'

이 순진한 녀석이 어쩌다 타락해서 대륙을 파멸로 몰아가게 되었던 건지···.

자신의 진짜 감정을 어떻게 표출해야 할지 몰라, 얼굴에 모든 표정을 비워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변한 모습을 보니.

그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건 그렇고, 내일 연회에서도 그거 하시는 겁니까? 반짝반짝."

세르펜스의 자리로 다가가, 다 채워진 사탕 병을 그의 책상에 올리며 물었다.

"···표현하고는."

병을 품속에 숨기며, 세르펜스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이제 받을 거 다 받아냈다 이건가?

"그보다 어울리는 표현이 어딨다고 그러십니까?"

"······."

내 표현에는 불만이 많지만, 그것을 반박하고 보다 적절한 표현을 꺼내 들 자신이 없는지 세르펜스가 아무것도 못 들은 척했다.

"이번 연회에서는 2황자에게 접근해 볼 생각이다."

신성 루멘 제국의 제2 황자.

그의 이름은 '프레드릭 J. 루멘'으로, 황제인 '페리안데르 F. 유스 루멘'이나 황태자인 '휴마누스 B. 데바 루멘'과 달리 추가의 미들 네임은 없었다.

그것은 황태자로 봉해질 때 황제에게 하사받는 것으로, 정당한 황위 계승권자라는 증명이기 때문.

드디어 그와 접촉하려나 보다.

"세르펜스라면 연회가 아니라, 따로 방문을 신청해도 되는 것 아닙니까? 왜 굳이 번거롭게 연회에서···."

"선우, 당신이 말씀하셨잖습니까."

"네? 제가 뭘요?"

세르펜스가 망설이는 듯하다가, 결국 조심스레 입을 열어 말했다.

"당신이 읽었던 책 속에서는···. 선택의 날 이후 내가 논란에 오르게 되고, 그런 나를 옹호해 주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덧붙여, 그것에서 괴리를 느꼈다고도 말했지."

저번 달, 근무시간이 끝나고 나서 종종 그의 서재에 찾아갔었다. [성검의 주인]에 나왔던 주요 사건들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그때, 저 얘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그게 지금 왜 나와요?"

"그것이 과연 악마 숭배 세력에서 선동한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라고 보는가?"

"···아니죠."

그것이 의문이었다.

성검의 선택을 받지 못했을 뿐. 그 외의 확실한 물증도 없이 그를 비난하는데,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이상했다.

아무리 뛰어난 선동가가 나타나서 선동하려 한들, 그간 세르펜스가 쌓아온 것들이 있는데 제국의 모든 이들이 그것을 믿었다고?

그럴 리가.

차라리 막강한 권력을 가진 누군가가, 세르펜스를 감싸주지 못하도록 제재하고 억눌렀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아니, 이건 아니겠지···.'

···라고 넘겼던 가능성이, 세르펜스의 말에 다시금 떠올랐다.

"어···, 아닐 것 같···.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혹시···."

내가 떠올린 것이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낸 사람이···, 황제였다고?'

증거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그러나, 그 말고는 세르펜스를 고립시킬 수 있을 만한 인물은 없었다.

'최종 보스의 마지막 타락의 방아쇠가 주인공의 아버지였다니. 뭐 어쩌자는 거지?!'

황제가 악마를 숭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그랬다면 제국을 좀 더 요긴하게 써먹거나, 거짓 인질극이라도 벌여 휴마누스를 난처하게 했겠지.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제 아들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한 짓일 것이다.

세르펜스의 존재로 인해 휴마누스가 사람들에게 성검의 주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니까.

비록 휴마누스가 원해서 성검의 선택을 받은 것은 아니나, 그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는 이들이 많았다.

'그것으로 인해, 휴마누스가 힘들어하기도 했고···.'

휴마누스가 선택될 수밖에 없던 이유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세르펜스을 깎아내리고, 흠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덮을 기회조차 박탈시킨 것이 아닐까 하는 가정이 자연스레 따라왔다.

"그런 법이 어딨습니까?! 그동안 세르펜스가 제국에 기여해온 세월이 얼만데! 제국과 대륙을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는데!"

1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공작위에 올라서, 죽어라고. 보통 사람이라면 정말 죽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일만 해왔던 세르펜스에게. 그리고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을 황제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지?

'윈스톤이 제국으로 망명 신청을 해올 것이 아니라, 세르펜스가 타국으로 망명해 나갔어야 했나?'

갑자기 머리에 열이 확 오른다.

"진정해라, 선우.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불과하다."

"거짓말하시네! 완전 확신하고 있다는 얼굴로, 누굴 속입니까?"

성검 파티에 세르펜스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은 것도. 같이 있으면 휴마누스가 비교당할까 봐.

세르펜스가 빛날수록 휴마누스가 그 빛의 그늘에 가려질까 봐···려나?

"자식 참 더럽게 아끼네! 보호자가 나서서 남의 집 애를 따돌리는 게 어딨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분통을 터트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푸후-'하고 작은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전혀 그럴 상황이 아닌데도, 세르펜스는 나직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기쁘다는 듯 웃고 있었다.

"웃어요? 지금 이게 웃깁니까?!"

"그런가 봅니다."

이번 달도 적자라서 가계부를 쓰며 한숨을 쉬고 있는데, 옆에서 아기가 해맑게 방긋방긋 웃어주면 이런 기분이려나?

기가 차서, 나까지 덩달아 피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철없는 녀석 때문이라도 내가 더 힘내야지 어쩌겠는가.

"사탕 하나 더 드릴까요?"

절대 먼저 간식을 달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결코 거절하지 않는 녀석답게 그는 당당히 손바닥을 내밀었다.

곧 그의 입에도 사탕이 물려졌다.

"그 책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내가 2황자에게 정식으로 방문을 요청한다면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다."

제국의 단 둘뿐인 공작 중 한 명이 황태자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이전까지 제대로 된 교류 한 번 없었던 2황자에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경계하기 딱 좋은 상황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계승 싸움에 끼어들어 한쪽 편을 들어준 것처럼 보일 거다.

다른 귀족들이 이미 2황자에게 마수를 뻗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 세르펜스가 그것을 한 달간 방치한 것도 그러한 오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서일 테다.

"···괜찮겠어요?"

"뭐가 말이지?'

"괜히 오해받아서 황제에게 찍히기라도 하면 곤란한 거 아닙니까?"

"글쎄. 선우가 말한 책의 내용대로라면, 나보다 황제가 더 곤란해 해야 하지 않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듯, 세르펜스가 웃어 보였다.

괜히 수틀려서 자신이 제국을 엎어버리기라도 한다면, 황제만 손해라는 식의 농담이었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농담이지만, 그래도 자신감이 넘쳐 보여서···.

"···농담 맞죠, 그거?"

"아니라면 어쩔 텐가."

짐짓 오만한 표정을 꾸며내며, 세르펜스가 무게감을 잡고 말했다.

하지만···.

"푸핫-! 입안에 사탕 물고, 볼 한쪽이 볼록해져서 그렇게 말하니까. 하나도 안 진지해 보이는 거 알아요?"

되려, 더 장난스러워 보였다.

"물론 알고말고. 조금 전에 선우, 당신이 직접 시범을 보여주었잖은가."

"······."

어쩐지 내가 심각하든 말든, 즐겁다는 듯 웃고 있더라니.

지금은 다 녹았지만, 입안에 아직 계피 향이 남아있었다. 이놈의 사탕, 분위기 망치는데 아주 일등 공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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