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12화 (112/925)

112회

27. 공작저의 부 집사 (2)

펼쳐 들었던 책은 도로 덮어서, 가슴 위에 올렸다.

"그냥 좀 불편해서요."

"지금 그 자세보다?"

"이 자세도 불편하긴 하죠. 그러니까 의자를 바꿔달라 한 거 아닙니까?"

"···뻔뻔하긴."

대화를 하기로 했으니, 바로 앉으란 소리였겠지.

거기다 대고 더 편하게 늘어질 수 있는 환경을 요구했으니, 내가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이긴 했다.

그렇다고 고칠 생각은 없지만.

"사실 제온 눈치가 좀 보여서···. 여기라면 절대 못 오잖아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일이 있었다기보단, 어제 그에게 질문을 좀 받았는데···."

퇴근 후, 제온이 불쑥 방에 찾아 왔었다.

그냥 같은 지붕 아래 살면서 형제끼리 너무 대화가 없는 것 아니냐는 데, 차마 물릴 수가 없더라.

그리고 그냥 궁금해서 묻는다는 듯한 투로 몇 가지 질문하고 간 것이다.

["이번에 새로 오신 기사님은 왜 작은 형을 선배님이라고 불러?"]

···라든가,

["그러고 보니 공작님이랑은 친구 같은 사이랬던가? 요즘은 서재도 드나드는 것 같은데, 어쩌다 그렇게 친해지게 된 거야?"]

···라든지.

"뭐, 그런 질문들? 호기심에 물어볼 만한 것들이긴 한데, 사실대로 대답하긴 좀 그렇잖아요."

"그래서 뭐라고 답하신 겁니까?"

내 얘기를 들은 세르펜스가 불안한 표정으로 닦달하듯 물었다.

"윈스톤 경은 세르펜스를 모신 경력으로 따지면 내가 위인 데다가, 예전에 세미타 거리에서 악마 숭배자들과 엮였던 무용담을 들려줬을 뿐이라 말했고. 세르펜스랑은 그냥 나이도 비슷한 또래다 보니 마음이 맞아서 편하게 지내기로···. 표정이 왜 그래요?"

윈스톤에 관한 얘기에는 '그 정도면 쓸만한 변명이지.'라는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던 세르펜스가, 자신의 얘기에는 참담하다는 듯이 눈을 감아버렸다.

"이게 최선입니다, 확실해요!"

내 말에 세르펜스가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표정으로 쏘아보다가, 무상함을 느꼈는지 고개를 가로 저으며 그것을 털어냈다.

"친구가 되는 데에 그보다 중요한 게 어딨습니까?"

"···이미 뱉은 대답을 물릴 수는 없으니, 이번만은 넘어가도록 하지."

나랑 마음이 맞았다는 소리가 그렇게 참담해 할 일인가?

아까도 나랑 같이 간식으로 나온 슈크림을 잘만 집어먹던 놈이 저러니, 상당히 억울하다.

"아무튼, 또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받게 될 것이 걱정되어 내 서재로 도망 왔다는 얘긴가?"

"질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바스툴 왕국에 갔다가 돌아왔던 날 제온이 저를 떠본 것 때문에 그런가. 이게 형제간에 하는 일상적인 대화가 아니라 탐색전처럼 느껴져서 영···."

"그런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자가 선우, 당신을 떠봤다고?"

"엇, 몰랐습니까?"

이 저택 안에서 있었던 대화는 모두 세르펜스가 듣게 되는 것 아니었나?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하여 굳이 말하지 않았던 내용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 와서 떠올려보니, 그날은 내 몸 상태를 걱정한 세르펜스가 나를 빨리 쉬게 하기 위하여 먼저 본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집무실에서 밀린 서류들을 처리했을 테고···.

나와 제온이 숙소가 있는 별관으로 이동하고, 한스는 정리를 위해 그 자리에 남아 시종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으니···.

'제온이랑 내가 입 다물고 있으면, 세르펜스도 모르는 거였잖아?'

괜히 보안 유지를 한답시고, 롤링 페이퍼에 관한 얘기를 번거롭게 글로 적어 보여줬다.

"그날 무슨 대화가 오갔던 거지?"

왜 그런 얘기를 자신에게 숨겼느냐는 눈으로, 세르펜스가 나를 타박하듯 캐물었다.

나는 그날 있었던 상황들을 설명했고···.

"···두 번 떠봤군."

나와 세르펜스가 없는 동안, 제온은 한스를 비롯하여 공작저 식구들에게 나에 관한 얘기들을 들었을 거다.

그리고 세르펜스가 서류상의 시온과 실제의 나 사이에서 이질감을 느꼈듯, 제온 역시 마찬가지의 기분을 느꼈겠지.

그래서 내게 자신의 형이 맞냐는 질문을 했던 거고.

'내가 살찐 것을 빌미로, 형제간의 장난으로 치부하고 넘길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만약 내가 나쁜 마음으로 시온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해도 원래 얘네 형제는 그러고 노는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었던 만큼, 리스크 부담 없이 찔러본 걸 테다.

하지만 커프스단추는 조금 충동적이었나?

"잠시 확인할 것이 있다."

무언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던 세르펜스가 밖으로 나가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제온에게 갑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그자를 걱정하나?"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아, 그의 발걸음을 멈춰 세우며 질문했다. 그런 나를 세르펜스는 묘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미안하잖아요. 비록 제 의지와는 무관한 일이나, 그에게서 소중한 형제를 빼앗았는데. 그냥 뺏은 정도가 아니라, 시온의 존재 자체를 삼킨 격이잖아요? 앞으로 살아가며 만나는 사람들은 시온 리벨론을 그가 아닌 나로 인식할 테고, 그럼 진짜 시온은 이 세상에 그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는 건데···. 그의 가족들을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쏟아지는 나의 죄책감을 막아서듯, 세르펜스가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챈 나의 손을 양손으로 조심히 감싸 쥐었다.

"그냥 확인해 볼 서류가 있어서, 그걸 가지고 오려는 것뿐이다."

"서류요?"

"그래."

그 담담한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니, 나까지 마음이 진정되었다. 손가락에서 힘이 풀린다.

세르펜스가 내 손을 자신의 옷으로부터 분리해내어, 내가 가슴에 올려놨던 책 위에 그것을 고이 올려놓았다.

"금방 올 테니, 괜한 걱정하지 말고 그 책이라도 읽고 있든가."

"상관님이 시키신다면, 당연히 그래야겠죠. 저처럼 말 잘 듣는 보좌관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잘'이 아니라 '안'이겠지."

평소대로 능청스럽게 말하니, 그가 피식 웃으며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서재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내가 책장을 넘긴 횟수가 10번을 미처 채우기도 전에, 세르펜스가 돌아왔다.

'금방 오겠다더니, 진짜 빨리도 왔네.'

그의 손에는 내가 읽은 페이지 수보다 많은 양의 서류들이 들려있었다.

"그건 다 뭡니까?"

"시온 리벨론이 제출한 이력서와 이제까지 선우가 처리해온 서류들. 적당히 보름 간격으로 뽑아와 봤다."

책을 덮고, 그가 건넨 서류를 넘겨받았다.

첫 장은 시온이 작성한 이력서고, 그 뒤부터는 내가 작성한 것이 순차적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한 장씩 넘기며 천천히 살펴보았으나, 느껴지는 거라고는 일 처리 능력이 향상된 나 자신을 칭찬해줘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이게 뭐 어쨌다고···, 어?"

아까 낮에 작성되었던 것을 마지막으로 다시 첫 장으로 돌아오니, 엄청난 이질감이 느껴졌다.

"필체가 변하고 있더군."

"···그러게요."

점차 악필로 변해가는 나 자신을 반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낯선 문자라 그런지 몸에 익은 대로 시온의 필체로 작성되었던 것이, 익숙해지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내가 편한 방향으로 조금씩 바꿔 가고 있었나 보다.

3~4장씩 한 번에 휙휙 넘기니, 그것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원래 세상은 등가교환의 법칙을 따르는 법입니다. 글씨체를 대가로 일 처리 능력을 얻었다고 치면···."

"그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는 사람이 있을 리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지, 발상 자체가 신기하다는 표정이다.

"아, 왜요! 일 좀 빡세게 하다 보면 손이 급해져서 글씨가 좀 괴발개발 날아다닐 수도 있지!"

"선우의 업무 처리 속도가 나와 비등해진다면 인정해 주지."

"글씨를 알아보기 쉽게 쓰는 것도 업무의 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글 쓰는 속도도 빠르면서, 글씨체까지 예쁜 건 반칙 아닌가?

속으로, 그가 못 하는 것을 반드시 발견해 내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하지만 그런 게 있기나 할는지. 다짐과 동시에 회의가 느껴진다.

"행정관들이나 집사의 경우, 선우가 작성한 서류들을 매일같이 접해왔으니 의심하지 않았겠지만···."

"제온은 그게 아니죠."

제온에게도 이 서류들을 보여주며 바쁜 업무를 따라가다 보니 이렇게 되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해도 믿어 줄지 의문이나,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준비해서 그에게 설명하는 것도 웃긴 노릇이다.

그가 물어봤다 쳐도, 바로 증거를 꺼내 보이는 것 또한 수상하겠지. 되려 의심만 더 깊어지지 않을까?

'이제 어쩐다?'

당시에는 그럭저럭 넘기긴 했으나, 모든 의심을 일소시킨 것은 아닐 거다.

어쩌면 넘겼다고 생각한 것조차 나만의 착각이고, 그 이후로도 쭉 나를 의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왜 나만 이렇게 자꾸 수상한 건데?! 빙의물 소설 보면 다들 위화감 없이 잘만 녹아들더니만!'

성격이 개차반 같거나 소심의 결정체 같던 캐릭터가 어느 날 갑자기 180도 바뀌어서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도, 가족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은 그 변화를 흐뭇한 눈으로 지켜봐 주는 게 빙의물의 기본 전제잖아?

대놓고 말하지는 않더라도 그렇게 약속된 거 아니었어?

이것이 바로 공상과 현실의 차이인가 보다.

아무튼, 절대 내 탓은 아니다.

"이건 모두 룩쓰렉···, 룩스메아가 잘못 한 겁니다. 적어도 저와 비슷한 성향이 있는 사람을 준비했어야지, 완전 생뚱맞은 녀석 몸에 집어넣으니 이런 일이 생기는 거 아닙니까?"

"이 세상 어디에도 그대 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거다."

치사한 녀석.

이럴 땐 무조건 내 편을 들어줬어야지, 저도 이 세상의 사람이다 이건가?

신에 대한 공경심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는지, 유일신인 룩스메아를 욕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었나 보다.

저런 태도가 고부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거다.

"어휴···. 들키게 된다면 원망 정도는 들어줄 수는 있겠지만, 그 이후가 문제네요."

"어째서 당신이 원망을 들어야 하는 거지? 선우의 잘못이 아니잖습니까."

"그렇다 해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어느 날 갑자기 진짜 가족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모르는 놈이 그 행세를 하고 있으면 앞뒤 분간할 거 없이 그를 원망할 수밖에 없을 거다.

"원래 사람은 부정적인 감정은 소진하면서 살아야 하거든요."

잘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우선은 탓하고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찾게 되는 것은. 부정적인 감정에 잠식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인간의 기본 본능 같은 게 아닐까?

"그보다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는 세르펜스가 더 잘 알잖아요?"

"······."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술을 배죽였다.

"어린애가 따로 없다니까···. 아무튼, 생판 모를 남이 가족의 몸에 들어와 있는 상황이잖습니까. 여러모로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 아닙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가 당신에 대해 변호하는 거로는 부족한가? 저번처럼 신 룩스메아의 사자라고 하면. 비록 성검의 주인은 아니나, 선택의 날에 각성 비슷한 것을 했으니 그때 계시라도 받았다고 한다면 믿어 줄지도 모른다."

이 자식, 유지스 때도 그러더니 보증을 아주 남발하고 있다. 아주 큰일 날 녀석이다.

"안 믿으면 어쩌려고요? 게다가 받지도 않은 계시를 거짓말로 지어내다니···! 신의 사자는 어떻게 끼워 맞춰보면 틀린 말은 아니라지만, 가짜 계시는 아니죠! 같이 세트로 묶여서 파멸 루트 걸을 일 있습니까?!"

"······."

"아니, 그 표정은 또 뭡니까?! 친구 따라 강남 가도 유분수지, 어딜 따라오려고! 아, 물론 그렇다고 제가 파멸 루트를 걷겠다는 건 아닌데···."

앞으로 수상함을 줄일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다. 그리고 들켰을 때 설득할 만한 변명도 생각해 봐야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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