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회
27. 공작저의 부 집사 (3)
소 잃고 망가진 외양간을 들여다보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손에 들린 글씨체 변천사가 담긴 서류를 세르펜스에게 돌려주었다.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이, 안락의자에 누워 있느라 천장을 향하는 시선에 서류를 건네받는 세르펜스의 모습이 로우 앵글로 잡혔다.
"언제까지 서 계실 참입니까? 다리도 안 아프···시겠네."
세르펜스가 싸늘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 본다. 지금 네가 남의 자세를 가지고 지적할 만한 자격이 되느냐는 표정이다.
"원래 친구끼리의 대화는 편한 자세로 하는 겁니다. 세르펜스는 너무 정중하고 각이 잡혀있어요."
"당신은 너무 편하고."
"꼬우면 세르펜스도 드러누우시던가."
안 그래도 내려다보는 각도였다.
천사 같은 얼굴의 세르펜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며, 같잖다는 시선을 보내오니 효과가 굉장했다!
나는 큰 데미지를 입었다!
어쩔 수 없이 뭉그적 일어나, 의자의 정식 사용법대로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오늘 책은 더 안 읽겠다 하셨으니, 그 서류는 대충 내려놓고 이쪽으로 의자나 가져오시죠?"
나는 여전히 안락의자에 기대어 반쯤 눕듯이 늘어져 있었다. 그래도 세르펜스는 일단 내가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있다는 것에 높은 점수를 주었나 보다.
그는 받아든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순순히 책상 의자를 들어 가까이 옮겼다.
"아, 참! 저 처음 출근한 날 세르펜스가 필요한 게 있으면 다 들어줄 테니, 뭐든지 말만 하라고 하셨던 거 아직 유효하죠?"
"···상당 부분 각색된 것 같은데?"
그가 가져온 의자에 앉으며 기가 찬다는 듯 말했다.
"뭐 어때요, 뜻만 통하면 됐지!"
빌미가 될 만한 말을 한 세르펜스가 잘못한 거다.
내가 씨익 웃으며 말하니, 그는 잠시 갈등하다 결국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들어주겠다는 의미다.
"지금 상황에서 내게 바라는 거라면 부 집사를··· 자르···는 건 안 된다고 하였으니. 영주성 쪽으로 보내면 되겠는가?"
어쩐지 자른다는 말이 굉장히 중의적으로 들린다.
그나저나 행정 쪽이면 몰라도 집사 기준에서 주인과 멀어진다는 건 파견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좌천 아닌가?
"한스의 후계자는 어디서 구하려고요?"
"정 구하지 못하면 현장에 나가 있는 그자라도 불러들여야겠지. 일단 집사 교육도 받았다고 들었으니···."
"와, 꼰대 마인드."
집사 일을 하면서 정보를 취합하는 일보다 현장 체질이라던 한스의 손주를 말하는 걸 테다.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싫다는 가업을 억지로···.
'아차. 지금이 그런 시대였지, 참!'
다행히도 세르펜스는 꼰대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세르펜스랑 친하다고 제온에게 말해놨는데 의심받고 있는 상황에서 멀리 보내면 그가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
현재의 상황 모면을 위해 잠재적 위협을 시야 밖으로 치워 버리는 것은 세르펜스의 일 처리 방식이 아니다.
위협의 근원을 뿌리째 뽑아 버리거나, 그러지 못한다면 차라리 옆에 두고 감시해야 했다.
'본인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그것 말고는, 그가 저렇게 말할 이유는 없었다.
하여간 이 소심펜스. 알아줘야 한다.
"상황이 꼬이긴 했지만, 그게 어디 세르펜스 혼자만의 탓입니까? 제가 가족이 그립다는 티를 내어놓고, 진실을 말하는 걸 미뤄서 그런 이유도 있잖아요."
"···그래도 저는 당신과 시온 리벨론이 별개의 인물일 가능성을 생각해 봤어야 했습니다."
"여기에 빙의물, 회귀물, 환생물 같은 게 판치는 세상도 아니고. 저를 의심했다면 또 모를까, 믿으면서 그런 걸 어떻게 떠올립니까?"
세계관 자체가 충분히 판타지라 그런가, 일반 문학이 충분히 판타지다워서 판타지 소설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더라.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빙의는 알겠으나···. 회귀와 환생은 무엇을 의미하는 거지?"
"그냥 우리 세계 소설 얘깁니다."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은 존재하지 않고, 죽음을 신 룩스메아의 품에 안긴다고 표현하는 세계다.
빙의야 바로 눈앞에 나도 있고, 악마나 사령 등이 사람에게 씐 경우도 있다. 이해하는 데 별문제 없겠지.
하지만 나머지 두 가지는 다르다. 끽해봐야 회귀는 돌아가다, 환생은 죽다 살아났다는 의미로나 쓰일까.
그런 세계관이니만큼, 그 개념 자체가 모호하게 들리는 거겠지.
"아무튼요! 논점은 알고 그런 게 아니니, 제게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절 생각해서 그런 거잖습니까?"
"하지만 결과가···."
"사람이 실수도 해보고 그러면서 사는 거지! 결과가 좋지 않았다고 해서 그 좋은 의도까지 나쁘게 변하는 건 아니잖아요? 방법과 결과가 좀 그래서 그렇지, 스스로 생각해서 절 도우려 했다는 걸 뻔히 아는데 그것 가지고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고맙고 기특하기만 하네, 뭘!"
그 말에, 세르펜스의 표정은 뭐라고 해야 할까···.
제 엄마를 돕겠다며, 몰래 설거지를 하려다가 그릇을 깨먹은 어린아이가 연상되었다.
혼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다치지 않았을까 걱정 받고,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까지 들은 것 같은.
그런 표정이다.
그릇이 깨지며 낸 요란한 소리에 놀라고, 여기저기 흩어진 날카로운 파편으로 인해 당혹을 느끼며.
혼날 줄 알고 겁먹었다가 그러질 않아서 안도하고, 도와주려던 의도와 반대로 해가 되어 버린 것이 미안해서.
그런데도 자신을 먼저 걱정해주는 것이 너무 감사하여.
되려 고맙다 말해주는 모습에 감격과 죄스러움이 밀려들어.
그 모든 감정이 한데 뒤섞여, 어찌할 줄 몰라 그저 발만 동동 구르며 울먹거리는 어린애 같다.
"어떻게든 잘 되겠죠! 어차피 막내가 태어나면 리벨론 영지에 내려가 봐야 할 텐데, 쉽게 들킬 거라면 차라리 제온 한 명에게만 들킨 후 그에게 협조를 받는 편이···."
"···선우."
"물론 아예 안 들키는 게 최고긴 하죠, 네."
거, 되게 매섭게도 노려보네.
물론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 채 매섭게 노려본들, 위협적이라기보다는 어린애를 괴롭힌 것 같아 양심이 콕콕 찔려올 뿐.
"어쨌거나, 제온 얘기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은근슬쩍 화제를 돌리려던 의도겠군."
"이미 쏟아진 물을 바라보면서 걱정해봐야 아무 소용도 없잖아요."
"그래도 그것을 닦아낼 수는 있겠지."
"그거 이미 카펫이 다 먹었대요."
세르펜스가 '하아─···.'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으로 땅을 꺼뜨릴 수 있다면, 공작저의 5층 높이를 뚫고 지저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갈 기세다.
"그 이전부터 말하려던 얘기였거든요?"
내 말에 그가 의심스럽지만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 눈을 지그시 깜박였다.
"제가 세르펜스에게 갚아야 할 빚에 관한 얘깁니다."
"으음…. 내 개인 자산 기준에서는 그다지 큰돈은 아니나, 보좌관에게 그냥 내어줄 만한 금액도 아닌지라···. 자칫하면 비자금을 만든다거나 기타 불법적인 일에 사용할 목적으로 빼돌린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어서···."
세르펜스가 어물어물 대답했다.
오해를 산다기보다, 그렇게 트집이 잡힐지도 모른다는 얘기겠지.
공금도 아니고 자기 돈을 자기가 쓰고 싶은 대로 쓴다는데, 그것도 눈치를 봐야 하나?
'것 참, 청렴결백하게 살기도 힘드네.'
평소 워낙 깨끗하게 살아온 탓에, 종이 위에 살짝 내려앉은 작은 티끌이 먹물이 쏟아진 것처럼 보이는 건가. 그냥 불면 깨끗하게 날아갈 먼지에 불과한 것을.
그걸 꼬투리 잡아 순백의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놓을 듯 덤비는 놈들이 문제다.
'선택의 날 이전이라든가, 그가 성검의 선택을 받았다면 모를까.'
더이상 그는 대륙의 구세주가 아니었다. 당장 아르젠토 공작가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악마 숭배세력이 문제지.'
[성검의 주인]에서 조차, 세르펜스를 견제하며 암흑가를 이용해 휴마누스와의 사이를 이간질하려 들지 않았던가.
"당장 급하게 큰돈이 나갈 일이라도 생긴 건가?"
"아뇨, 그런 게 아니고···."
"월급이 부족한 거라면 리벨론 가문에 보내는 돈을 줄이면 되는 것 아닌가?"
"지출이라고 해봐야 군것질 정도가 전부라···."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는 듯,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저 월급 명세서를 받을 때 빚이 빠져나가는 것이 눈에 거슬렸을 뿐이라는 걸, 세르펜스는 이해하지 못하려나.
"당장 돈이 필요한 게 아니라면 몇 달만 참아라."
"몇 달 뒤면 다 갚아지는 겁니까?"
듣던 중 희소식이다. 생각보다 금액이 별로 크지 않았···.
"그건 멀었고, 대신 연봉 협상이 있지."
"역시 멀었습니까···?"
그러고 보니 내가 근무를 시작한 게 5월이었다. 이제 2개월 하고도 보름가량만 지나면 꼭 일 년을 채운다.
"물론 연봉 협상은 하겠지만, 제가 하려던 얘기는 빚을 탕감해달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갚겠다는 거지."
"······."
어째서 그는 '어떻게?'라기보다, '주제에?'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세르펜스도 '라드라바'가 누군지 알고 계시죠?"
"선우가 그자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라드라바.
몇백 년 전, 가나안 전역을 무대로 활약하며 악명을 떨치던 대 도둑의 이름이다.
그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았기에 그것이 본명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그가 물건을 훔친 뒤, 그 자리에 항상 '라드라바'라는 네 글자를 적어놓고 갔기에 그를 그렇게 부를 뿐이다.
물론, 우리 세상의 만화에나 나오는 것처럼 예고장 따위는 보내지 않았다.
"당연히 [성검의 주인]에 나왔으니까 알죠. 주인공 일행이 그의 비밀 근거지를 우연히 찾아냈거든요."
휴마누스가 그곳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시기상으로 아직 여유가 있었다.
개월까지 계산해가며 읽은 것은 아니나, 그것을 가늠할 수 있는 근거는 있었다.
그가 용사의 무구를 3개 중 2개째를 얻는 시련 과정 중, 우연히 발견했다는 것.
이제 첫 번째 시련을 받으러 가는 중일 테니, 기간도 남았다.
나중에 세르펜스에게 여유가 생겼을 때, 다녀오자고 권유할 생각이었으나···.
'그럴 기미가 안 보여!'
이 녀석 하는 꼴을 보니 없는 일도 만들어내서 할 것 같다.
일단 먼저 말해놓고 나서 시간을 내어 일정을 잡든지 말든지 해야지.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말을 꺼낸 것이다.
"그 책에 실린 내용은 다 말해준 것 아니었나?"
"중요한 사건들은 기억나는 대로 다 했죠. 아, 혹시 이 시기에 황태자 전하가 신의 시련으로 어디서 뭘 하고, 어떻게 극복하고, 중간중간 쉬면서 무엇을 했는지. 그런 것도 궁금하신 겁니까?"
"듣는 시간조차 아까운 얘기군."
그렇게 시간 낭비라는 식으로 말하면, 그걸 읽느라 시간을 쓴 나는 뭐가 되지?
이 자식은 소설을 읽는다 하더라도, 문학적 소양을 길러주는 귀족 필독서 같은 것 말고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다.
재미 위주의 킬링타임용 소설을 읽을 시간에 논문을 한 글자 더 읽었겠지.
"어쨌거나! 그곳에 준비된 아공간 주머니에 보화들을 깡그리 담아, 그것들을 팔아서 활동 자금으로 썼습니다. 그리고 아공간 주머니 속에 모든 짐을 넣고 편하게 대륙을 돌아다녔다, 이거죠!"
아공간 주머니는 총 6개로, 하나씩 나눠 가지고 남은 하나는 팔았다.
"···그런 것을 가로채도 괜찮은 건가?"
"당연하죠! 어디까지나 제국으로부터 지원을 못 받아서 그 대신 썼던 거니까, 이제는 필요 없잖아요? 발견된 주머니 중 하나만 건네줘도 짐 정도야 공동 관리하겠죠, 뭐."
각자의 짐을 가방 통째로 넣어놨다가 필요할 때 꺼내서 건네주면 되겠지.
"그래서, 그건 어디에 있지?"
"···테라룸 왕국에 있는 어느 산 중 하나요."
"산 이름은?"
"···하하!"
멋쩍게 웃음으로 넘어가려 했으나, 세르펜스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네가 그럼 그렇지, 라는 눈빛이었다.
"광맥이 있는 땅이라면 어디든 파헤치고 보는 드워프들의 나라에서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건···. 그 도둑이 활동하던 시기 이전에 광맥이 모두 동나서, 방치된 곳 중 하나겠군."
"아, 맞아요! 버려진 폐광!"
그런 것을 먼저 말하라는 표정이다.
"달리 생각나는 것은?"
"산더미 같은 황금과 보화들을 담는 과정에서 그 속에 파묻힌 드워프의 유골이 나왔습니다. 아마도 라드라바의 유골이겠죠."
아공간 주머니가 한 개도 아니고 여섯 개나 있었으니, 그 안에 보물들을 넣고 다니는 편이 훨씬 안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것들을 버려진 폐광에 함정까지 설치해가며 쌓아둔 이유는···.
'황금의 바다를 바라보며, 그 속에서 헤엄쳐보고 싶어서겠지.'
그리고 아마 그 과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그대로 파묻히듯 깔려 죽은 게 아닐까 한다.
발견된 유골의 위치와 갑자기 활동을 중단하고 사라졌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만든 도구들을 이용해서 범행에 이용했고. 함정들도 모두 그가 직접 만든 기계식 함정이라 마법 탐지에 안 걸리고, 아직도 잘 발동된다는 점?"
"···발견된 아공간 주머니 중 하나를 황태자에게 구매해 달라는 얘긴가?"
이 자식 좀 보게?
이건 굳이 세르펜스어 통역기를 돌릴 필요조차 없었다.
'그 시간에 다른 일을 처리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거겠지.'
가더라도 자신은 아무런 이득도 없고, 귀찮고, 번거롭고, 그딴 보화에 관심도 없으니, 안가겠다는 소리다.
대신 아공간 주머니를 탐내는 것 같으니, 그걸로 적당히 합의를 보자는 제안이기도 했다.
"뭐든지 다 들어준다면서, 이 거짓말쟁이!"
"그건 선우가 멋대로 내 말을 각색한 거잖습니까?"
"그래도 아까는 들어줄 것처럼 굴었으면서!"
고개까지 끄덕거려 놓고 이제 와서 발뺌하다니, 정말 해도 너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