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14화 (114/925)

114회

27. 공작저의 부 집사 (4)

그 뒤로도 나는 세르펜스의 서재를 찾았다.

어차피 내 방에 있나 여기 있나 하는 짓은 똑같다. 그런 거라면 차라리 여기가 더 편했다.

긴 소파에 누워 빈둥거리며, 공작저의 도서관에서 빌려온 소설책을 펼쳐 읽었다.

세르펜스는 여전히 신성 문자가 적힌 책에 파고들었다.

달라진 점이라면 책상 앞이 아니라, 원래 있던 안락의자에 등을 기대고 편히 앉아서.

처음엔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책을 들고 있더라. 그것이 불편해 보여 무릎 위에 쿠션을 올려 그 위에 책을 얹고, 등을 기대게 하니 훨씬 편안한 자세가 완성되었다.

'아, 나도 누워서 읽기 편하게 책 거치대 같은 거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세르펜스에게 내가 살던 세계의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거치대를 설명하며, 책을 대신 들어줄 거치대의 제작을 의뢰했다가 경멸에 찬 시선만 받았다.

인간이길 포기한 거냐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자신처럼 앉아서 보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데….

조용히 닥칠 수밖에 없더라.

읽고 있던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긴 후 그것을 덮었다.

슬쩍 세르펜스를 바라보니, 그가 읽고 있던 권의 남은 페이지 수가 얼마 안 되어 보였다.

'엄청 빨라졌네?'

며칠 전만 해도 매우 느릿느릿한 속도로 정독하듯 읽어 내려가던 것이, 점차 속도가 붙어 이제는 내가 소설책을 읽는 것과 엇비슷해졌다.

이쯤 되면 신성 문자의 일인자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리라.

"잠깐 뭐 좀 먹을래요?"

"···이 시간에?"

어제 중반부까지 읽었던 책을 이어 읽은 터라, 아직 저녁 아홉 시 밖에 안 되었다.

"야식 먹기는 좀 이른 시간이긴 하네요."

"···이르다고?"

불현듯 출출해서 뱉은 말이었으나, 이걸 왜 이제야 떠올린 건지 후회스러울 정도로 훌륭한 생각이었다.

"오늘도 이따 밖에 나갈 거잖아요? 배고플 텐데 뭐라도 든든하게 먹어두는 게 좋겠습니다."

"···저녁도 먹었고, 애초에 몇 끼 굶는다고 문제가 되는 몸도 아니다."

2월이니 아직 겨울이었다.

그러나 세르펜스는 벌써 여름이 되면 밤이 짧아진다는 소리를 해대며, 격일로 조사를 위해 자정이 넘으면 밖으로 나가 싸돌아다니고 있었다.

"다음부터는 주방에 미리 얘기해놔야겠네. 오늘은 늦었으니, 제 방에 사다 둔 초콜릿 바라도 갖다 드릴까요?"

"정말 괜찮습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생각난 김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걸 두고 말이 씹힌다고 하는 건가."

"아니, 어디서 그런 말을 배우신 겁니까?!"

책에서 눈을 뗀 세르펜스가 나를 바라보며, 나를 향해 턱짓했다.

"심심한 사과의 뜻을 담아 초콜릿 바를 바치겠나이다! 부디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푸훗-!"

이게 그렇게 웃긴가?

평소대로라면 '그냥 네가 먹고 싶어서 그런 것뿐이면서, 괜히 내 핑계를 대지 마라.'라고 말하며 톡 쏘았을 텐데.

불의의 기습을 당했다는 듯 터져 나온 웃음을 급하게 한 손으로 막고, 어서 다녀오라며 반대 손을 흔들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서재를 나와 계단을 2층 정도 내려갔을 때. 나는 후회했다.

'본관을 빠져나가 별관으로 이동해서 내 방이 있는 2층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되돌아와서 5층을 올라야 하잖아?!'

고작 초콜릿 바 따위를 위한 희생치고는 너무 크나큰 체력 손실이다. 생각이 짧았다.

집 앞 편의점 다녀오는 느낌으로 나왔는데, 어리석었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기에는···.'

괜찮다는 세르펜스에게 굳이 내가 권해놓고, 귀찮다는 이유로 그것을 무를 수는 없었다.

아닌 척해도, 분명 기대하고 있을 거다. 그런데 내가 빈손으로 돌아가면 얼마나 실망할까?

어린아이에게 사탕을 줬다 뺏는 짓이나 다름없다.

'까짓것, 운동할 겸 갔다 오자!'

이제 본래의 체중을 복구했으나, 다이어트만큼 어려운 것이 유지라는 누나의 말이 있었다.

열량 높은 초콜릿 바를 먹을 예정이니, 그를 위한 열량 소비라 생각하자.

반쯤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숙소가 있는 별관 앞에 도착했다.

'한스와 제온도 지금쯤 퇴근했으려나?'

한스뿐 아니라, 제온의 방도 1층에 있었다.

이 별관은 집사와 보좌관인 내가 머무는 건물이기도 하나, 예전에 솔레르티아가 그랬던 것처럼 손님이 머물다 가기도 하는 건물이다.

보좌관인 나야 같은 층을 쓰더라도 상관이 없으나, 준 귀족이라고는 하나 사용인에 가까운 집사가 그렇게 한다면 대부분 귀족들은 불쾌해할 거다.

지금 이 건물에 머무르는 건 두 명의 집사와 나 한 명뿐이지만.

실은 바로 그게 문제였다.

"···왜 2층 불이 켜져 있는 건데?"

굳이 창문을 세며, 그 위치를 가늠할 필요도 없다. 내 방일 거다.

세르펜스가 저택 내에 있었으니 간 크게 침입할 외부인은 없었다.

본격적으로 악마와 계약한 마인이나, 악마 그 자체가 기승을 부리는 1년 후라면 모를까.

지금은 외부 침입자가 있더라도 그가 바로 눈치챘겠지.

내부인이고 내 방에 몰래 침입할 만한 사람이라면···.

'···한스 이 양반이 또?!'

현장을 잡을 요량으로 계단을 올라, 숨을 가다듬으며 문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돌렸다.

조금 돌아가는 듯하더니 바로 멈춰 선다.

역시 잠겨있다.

문에 귀를 대보니, 안쪽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어설픈데?'

문고리에 조심스럽게 열쇠를 끼워 넣고 돌렸다.

- 철컥.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문을 벌컥 열어 재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제온?"

"으악-!"

- 철퍼덕.

갑자기 문이 열리자, 우왕좌왕하던 제온이 비밀 통로가 있는 욕실 쪽으로 도망가려다 제 발에 걸려 넘어졌다.

"······."

"······."

쪽팔려서 그런 것인지 아직 안 들켰다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으나, 제온이 일어나는 대신 엎어진 그대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제온,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보통 세게 넘어진 게 아닌지,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어디 크게 다쳤나?

그에게 다가가, 잡고 일어나라는 뜻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는 너는 거기서 뭐 하는 건데?"

"뭐하긴, 일으켜 주려는 거지. 그보다 형한테 너가 뭐야?"

- 철썩.

제온이 내가 내민 손을 강하게 쳐냈다.

"형? 형이 어디 있는데?"

"···으, 응?"

망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나를 노려보는 눈이 매섭기 그지없다.

"내가 우리 가족도 못 알아볼 줄 알아? 당신 대체 누구야? 우리 작은 형은 어디 갔어!!"

기껏 피해온 보람도 없이 빨리도 들켰다. 절규하듯 부르짖는 그의 모습에 나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눈치챘지?"

"거짓말···."

자신이 자기 입으로 내가 시온이라는 것을 부정해놓고도, 내가 그것을 긍정하니 그 또한 부정했다.

부정하고 싶겠지.

"어떻게 알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으려나···."

"그, 그 말은···?"

가족이니 알아챌 만한 근거는 얼마든지 있었을 거다.

그리고 이렇게 방을 뒤지고 있는 것을 보면, 오늘이 처음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요 며칠···.

'아니지. 저번 달에도 [성검의 주인]의 얘기를 전하느라 퇴근 후 세르펜스의 서재를 드나들었으니, 그때부터였을지도.'

이미 충분히 확신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를 내지 않고 계속 확인하고, 또 확인한 것은, 내가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아니라 진짜 자신의 형이길 바라서 일지도.

'내가 시온이 아니라면, 시온이 위험에 처했거나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니까.'

별관의 구조상, 그냥 대화를 나누면 한스가 듣게 될지도 모른다.

방 한쪽에 두었던 스크롤 가방에서 방음 마법이 부여된 것을 꺼내 찢었다.

스크롤을 중심으로 빛이 퍼져 나와, 벽에 부딪히며 푸른 막이 씌워졌다,

"뭐, 뭐야···!"

"방음 마법. 소리가 새어나가면 곤란하니까."

제온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치다, 다리가 풀린 듯 힘없이 넘어졌다.

그는 바들바들 떨면서도, 정신을 차리려는 듯 제 입술을 꽈악 물었다.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들키게 된다면 바로 멱살을 잡힌 채 원망을 들을 줄 알았는데.

그보다 더 심했다.

충격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공포마저 느끼는 듯한 모습.

겁에 질린 채로 벌벌 떨면서도, 부릅뜬 눈은 나를 경계하며 노려보고 있었다.

"나, 나를 어쩔 셈이야?"

"어?"

"작은 형에게 그랬듯, 내게도 똑같은 짓을 하려고? 나를 죽여서, 바꿔쳐서···."

"···뭐?"

잠깐 내가 한 말과 행동들을 되짚어 보는 반성의 시간이 필요했다.

'···수상한 정도가 아니잖아?!'

제온의 신체 능력이 나보다도 형편없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당장 내게 덤벼들어 제압한 후 교단에 넘겼어도 무방한 언행이었다.

"뭔가 오해가 있나 본 데···."

"오해는 무슨 오해! 이제 와서 당신이 작은 형이라 주장할 생각은 아니겠지?"

두려움에 떨면서도 핏발 선 눈으로 악을 쓰며 내게 소리치는 모습은 비장함 그 자체였다.

"네 말대로 난 진짜 시온이 아니야. 미안."

"······."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악마 숭배자라거나, 그쪽과 관련된 것은 절대 아냐. 첩자 같은 것도 아니고, 너를 해할 생각도 전혀 없어. 방음 마법도 그냥 너와 조용히 대화를 나누려는 의도뿐이고."

하나도 안 믿는 표정이다.

"우리 형은 어쨌는데?"

"···적어도 이 안에는 없어."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고, 그에게서 아무런 감정도 전해지지 않았다. 파헤치고 파헤쳐도 메마른 정보뿐.

그래서 내린 결론이다.

이 몸 안에 있는 영혼은 나 하나뿐이다.

"자세한 건 나도 잘 몰라."

"당신이 왜 몰라!"

"모를 수밖에! 나라고···!"

나라고 남의 삶을 뺏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내 삶을 잃으면서까지.

'적어도 예고라도 해주지···.'

나도, 시온도.

각자 자신의 가족에게 작별 인사라도 건넬 시간을 주지 그랬어, 이런 야박한 신 같으니.

눈물이 핑 돌았다.

"···당신, 대체 뭐야?"

"어쨌든 시온의 행방은 이 안에 없고 나를 이 안에 넣은 건 신 룩스메아니까. 아마 신이 거두어 갔거나, 내 원래 몸 안에 있거나 하겠지."

제온의 표정은 더욱 혼란스럽게 변해갔다.

그러면서도 두 눈은 여전히 경계의 빛을 띠었다. 내가 연기를 하는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는 걸 테다.

"당신의 원래 몸은 어딨는데?"

"다른 세계?"

너무 허황하게 들렸나? 완전히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더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내 뒤쪽에 내려놓은 스크롤 가방을 힐끔거리며 노리고 있었다.

신체적 능력이 떨어지는 제온이 나를 이기려면 그 수밖에 없겠지.

"미안. 아, 계속 미안하다는 얘길 하게 되네. 어쨌거나 미안한데, 내가 잘못되면 좀 큰일 나서. 알면서도 모르는 척은 못 하겠다."

그가 빼앗지 못하도록 내가 메어서, 방음 스크롤을 꺼내느라 열어놨던 것을 도로 닫았다.

"···룩스메아님이 보내셨다고? 어째서? 증거는? 그리고 왜 하필 우리 형의 몸을 가로챈 건데?"

도망가려 해봤자 나에게 바로 잡힐 거라는 계산이 섰는지, 달리 방도가 없으니 차라리 대화를 통해 뭐라도 끌어낼 심산인가보다.

나도 그게 좋았다.

"대륙을 위해서. 증거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안다는 것. 그리고 시온은···. 죽을 운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라서?"

그렇다기보다는 사실 세르펜스의 보좌관이어서. 그와 접촉하기 가장 쉬우면서도, 이전부터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일 거다.

"저번에 악마 숭배자들과 엮였다고 말했던 것 기억나? 아마 그 사건 때문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어. 내가 알고 있는 미래는 선택의 날부터고, 그땐 이미 시온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거든."

"그래서,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으니 괜찮다고?"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아니면. 그 몸뚱이라도 살아 움직이게 남겨줬으니, 감사하다는 말이 듣고 싶은 거야?"

"그런 게···."

"왜? 알고 있는 미래는 선택의 날 이후뿐이라며! 그런데 어째서 당신은 살 수 있었고 형은 죽어야만 했는데?!"

제온이 억울하고 서럽다는 듯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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