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16화 (116/925)

116회

27. 공작저의 부 집사 (6)

세르펜스 덕분에 악마 숭배 세력의 첩자라는 누명만은 피한 것 같다.

"일이 모두 끝나면 형은 돌아올 수 있는 거···, 겁니까?"

격양되었던 감정은 가라앉고 또 가라앉아, 침잠된 목소리로 제온이 내게 질문했다.

그 존댓말이 무척이나 거리감이 느껴졌다.

조금 쓸쓸하다.

"···모릅니다."

"당신은?"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냐 묻는다면, 그것도 모릅니다."

내 표정을 꼼꼼히 살핀 제온이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형의 정확한 행방을 찾기 전까진, 저는 절대 보좌관님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겁니다."

"이해합니다."

"더는 가족처럼 대하지도 않을 거고."

"네."

"그렇다고 방해할 생각은 없으니···. 그 외에는 지금까지처럼 합시다."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원치 않게 시온의 몸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아챘나 보다.

여전히 나를 원망하는 감정이 묻어나는 얼굴이나,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제온이 예의를 갖춰 나와 세르펜스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세르펜스는 안 나갑니까?"

그는 밖으로 나가기는커녕, 오히려 더 안쪽으로 들어와 아직 열어두고 있던 금고에서 방음 스크롤을 꺼내어 찢었다.

오늘로 벌써 세 개째다.

"그걸 왜 또 찢어요? 밤도 늦었는데 그냥 내일 대화하면 될걸···."

"······."

대답이 없다. 그는 여전히 금고가 있는 벽 쪽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저, 세르펜스?"

숨을 흑 하고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서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울어요?!"

어쩐지 제온에게 그럴듯한 거짓 설정을 늘어놓으면서도, 표정만은 조금도 꾸며내지 못하고 있더라니.

나와 제온을 보며 안타깝고 측은하다는 듯한 표정을 연기했어야 할 그의 얼굴이, 힘겨울 정도로 슬퍼서 고통스럽다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계속 참고 억누르느라 그랬었나 보다.

"세르펜···."

"힘들면 말하겠다더니!"

돌연, 세르펜스가 비통함을 끄집어내듯 소리쳤다. 그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마주친 그의 눈빛은 배신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비참해 보였다.

"도대체, 얼마나 힘들어지고 난 후에야 말할 생각이셨습니까?! 내가 그대를 만나기 이전 수준으로 무너지고 난 이후에?"

그의 두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은 그의 길고 풍성한 속눈썹을 흠뻑 적시고도 계속해서 흘러나와 뺨과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렇게나···, 제가 못 미더웠던 겁니까···?"

슬프다 못해 처참함까지 느껴지는 한 마디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게, 각오는 했는데 막상 닥치니 생각보다 더···."

"흐윽···. 개소리."

"······."

변명은 그만두라는 뜻이리라.

"어째서 선우는 내게 원망을 품지 않는 겁니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으면서, 자신은 마땅히 그자의 원망을 감내해야 한다 말해 놓고. 정작 그대는 내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되려 감싸주기만···."

세르펜스는 이전에 자기 때문에 내가 오게 된 것이 아니냐는 말을 했었다.

그땐 그냥 지나가듯 넘겼었는데, 계속 그의 마음속에 그러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나 보다.

"내가 약한 탓입니까? 그래서 이 외딴 세계에서, 기댈 사람 한 명 없이 남몰래 그렇게 외로워하셨던 겁니까? 선우를 유일하게 알고 있던 제가 너무 약해서, 차마 기댈 수가 없어서. 내가 그대에게 너무 의지해서···! 또···, 결국 나 때문에···."

방해가 되는 안경을 벗어낸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손등으로 그것을 밀어 올리며 눈가를 비볐다.

눈물을 계속해서 훔쳐내어도, 그것은 멈추지 않고 흘러나와 닦아내는 보람도 없이 손과 얼굴에 번져나갔다.

"세르펜스, 가까이 좀 와봐요."

옆자리를 툭툭 치며 그를 부르니, 울면서도 얌전히 다가와 앉는다.

"손수건은 어쩌고 그러고 있어요?"

"흑, 흐읍···."

그때와 옷은 다르지만, 손수건처럼 바로바로 꺼내 쓰는 물건은 보통 비슷한 위치에 넣고 다니는 법이다.

예전에 그가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던 것을 떠올리며, 재킷 안주머니를 뒤져 그것을 찾아냈다.

'나도 이젠 손수건을 좀 챙겨 다녀야 하나···.'

그의 안경을 벗겨내고, 부드러운 재질의 손수건으로 그의 눈가를 톡톡 찍어내듯 닦아주었다.

"세르펜스를 못 믿어서가 아닙니다. 제가··· 약해서 그래요. 저 진짜 괜찮은 줄 알았거든요? 근데 이게 진짜··· 생각보다 더 힘들었나 봅니다. 최대한 생각을 안 하고,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져서 괜찮아질 줄 알고···."

"···거짓말."

그가 여전히 흐끅대면서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정말입니다. 거짓이 있다면,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뿐이지. 진짜 견딜 수 없게 되면 말하려고···."

눈물 때문에 내 모습이 제대로 보이기나 할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펑펑 울고 있는 주제에, 세르펜스가 눈을 홉뜨며 나를 노려봤다.

"아, 알았어요. 견딜 수 있어도 힘들면 바로 털어놓을 테니까···."

"···거짓말."

"아니, 진짜로요!"

그가 눈을 깜박였고, 눈물이 다시 주룩 쏟아져 내렸다.

이전처럼 해묵은 감정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 슬피 우는 그 모습이 못내 애처롭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서럽게 우신대?"

"···그대가, 울지 않으니까."

"남을 위해 울 줄도 아시고. 이제 세르펜스도 다 컸네요."

"···거짓말."

···그건 부정하면 안 되지?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으로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째서 선우는 그 누구의 탓도 하지 않는 거지?"

"···세르펜스가 몰라서 그렇지, 속으로 룩스메아랑 [성검의 주인] 작가 탓 엄청나게 했거든요?"

그런 의미가 아니지 않으냐는 표정이다.

"사실 제가 이곳에 온 걸 다행이라 생각하거든요."

"거짓말···."

아까 제온도 그러더니. 오늘 평생 들을 거짓말이란 소리를 다 들은 기분이다.

"오늘따라 그 말 되게 많이 하시는 거 압니까? 믿겠다더니?"

"먼저 저를 속였잖습니까."

속이려고 속인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것을 숨기다가 언젠가 터지게 된다면 그가 더 괴로워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되기 전에 먼저 얘기할 생각도 있었다.

단지.

돌아갈 수 있는 가망이 보이지 않는 지금, 떠올려 봐야 별 소용이 없을 거란 생각에 그것을 묻어두어서.

너무나도 깊이 묻어두고 떠올리는 것조차 회피한 나머지, 이미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지 못했을 뿐.

하지만 그의 매서운 눈초리에 나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침 먹은 지네가 되어 조용히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 그건 그렇다 치고. 하지만 다행이라는 말은 참말입니다."

"계속 그렇게 허튼소리를 할거라면, 다 그만둡시다."

대체 뭘 그만두자는 것인지, 감히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른 소설에 들어왔다면 이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거짓말."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높은 확률로 원래 와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었다고 생각하거든요."

"…뭐?!"

내 말에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찌나 깜짝 놀랐는지,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멈추지 않고 흘러나오던 눈물도 멈췄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입니까?"

"···으음."

어쨌거나 눈물도 그쳤으니, 그의 손에 젖은 손수건을 돌려주었다. 세르펜스가 그것을 반듯하게 접으며 나를 힐끔거렸다.

"제가 [성검의 주인]을 읽게 된 계기는 제 누나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나는···. 어쩌다 친해진 동료 작가가 그것을 읽고 감상을 알려달라고 했다나 봐요."

* * *

"선우야~."

"왜, 또! 이번엔 뭘 시키려고?"

누나가 나를 저토록 다정하게 부르는 경우는 내게 무언가 시킬 일이 있거나, 나에게 심부름을 시킬 생각이거나, 나를 부려 먹으려고 할 때뿐이었다.

"야, 유 선우. 누가 들으면 내가 맨날 널 부려 먹기만 하는 줄 알겠다?"

"왜, 유 선화(善化)! 솔직히 맞잖아?"

"어쭈? 감히 이 누님을 이름으로 불러? 이번 달은 용돈 안 받고 싶지?"

"제가 어리석은 나머지 생각이 짧아, 감히 하늘 같은 누님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고야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장난스레 손바닥을 싹싹 빌며 말하자, 그녀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손날로 내 양쪽 어깨를 번갈아 툭툭 치며, '너의 죄를 사하노라.' 같은 소리를 해댔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요즘 내가 읽고 있는 판타지 소설이 하나 있는데, 그거 읽어보지 않으련~?"

과하게 부드러움을 꾸며낸 말투가 분명 다른 꿍꿍이속이 있는 게 분명했다.

"누나 요즘 비축분 동나서 그간 읽던 소설도 읽을 시간 없다고, 죄다 킵해둔 상태잖아."

"그게 사실은···. 어쩌다 친해진 애가 있는데, 걔가 갑자기 글을 쓰기 시작했다며 봐달라지 뭐야?"

역시, 단순한 소설 추천이 아니었다.

"나중에 읽는다고 하면 되잖아."

"그렇게 말은 했는데, 계속 기프티콘을 날리면서 선배 작가로서 자기 글이 어떻게 보이는지 감상평 좀 알려달라고···. 안 받겠다고 했는데도, 얘가 자꾸 보내니까 얼마나 절실하면 이럴까 싶기도 하고···."

무언가 불길함이 감지되었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해?"

"생각해봤는데 독자가 어떻게 느끼느냐가 중요하지, 다른 작가가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래서?"

"어차피 너 소설 읽는 거 좋아하잖아. 그냥 읽고 매 편마다 어떤 감상을 느꼈는지만 알려주면 돼. 간단하지? 그냥 댓글 쓰는 거랑 별반 차이도 없어!"

얼굴이 와락 찌푸려진다.

그냥 댓글이랑 차이가 없기는 무슨, 신경 써서 정독하고 완전 자세히 써야 하는 거잖아!

"무슨 초등학생 때나 쓰던 독후감을 웹 소설 편마다 작성할 일 있나···. 절대 안 해! 용돈을 준대도 싫어, 귀찮아! 안 할 거야!"

"정말 그러할까?"

내 말에 누나가 양손을 허리에 얹으며,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를 배뚤게 올렸다.

"태블릿 PC를 새로 살까 하는데···."

"어? 지금 있는 거 잘 되잖아?"

"그래서 기존에 쓰던 것을···. 아니다, 어차피 누나 부탁도 안 들어주는 동생, 뭐가 예쁘다고. 그냥 보상 판매하는 게 낫지."

"그래서 연재 사이트가 어디라고?"

* * *

내가 아니라 누나가 오게 되었다면 시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갔으려나?

공작저의 시녀 중 하나거나, 귀족 영애 중 하나라거나···.

'또 뭐가 있지?'

어쨌거나 신 룩스메아가 제정신인 신이라면, 적어도 시온 몸에는 넣지 않았겠지.

내 감상평을 누나가 전달해주면서 스포일러를 모두 당한 탓에, 결국 끝까지 누나는 [성검의 주인]을 읽지 않았다.

그래서 꿩 대신 닭으로, 내가 오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게 나의 추측이다.

"뇌물에 넘어가서 그걸 제가 하게 됐는데···, 아마 그게 아니었더라면 누나가 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행이라는 건가?"

"그렇죠."

세르펜스가 기껏 곱게 개었던 손수건을 꽉 움켜쥐었다. 녀석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왜, 왜요?! 이번엔 뭐가 문젭니까?"

"결국, 본인이 희생해서···. 그게 다행이라는 얘기잖습니까."

아, 이건 반박할 말이 없네.

"당신을 보면 압니다. 선우가 살던 세상은 가나안과 달리 생명의 위협 같은 건 느낄 일 없는. 평화롭고 느긋한, 그대에게 있어 무척이나 행복한 세상이었겠지."

"···그래서예요?"

"···뭐가 말이지?"

다른 무엇보다, 내가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가장 먼저 찾으려 했던 이유.

내가 그것을 묻고 있다는 걸 눈치챘으면서, 그가 모르는 척 의뭉 떨었다.

"가족, 친구들···, 그곳에서 누리던 모든 것들이. 그립죠, 당연히. 혼자 있을 땐 좀 외롭기도 하고요."

"···그런데 왜!"

다시 손수건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으나, 잡아당겨도 놓아주질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조금 뻣뻣한 셔츠의 소맷단으로 그의 눈물을 훔쳐내었다.

"세르펜스가 옆에 있는데, 위험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이렇게 저를 대신해서 울어주는 친구도 있고요."

"···흐윽."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못 해봤을 경험도 해봤고. 충분히 즐거웠습니다."

"거짓···말···."

이 많은 눈물은 도대체 어디서 생겨나는 건지, 닦아도 닦아도 끝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닦아주던 것을 그만두었다. 그의 어깨를 감싸고, 등을 토닥였다.

"그렇게 미안하시면 맨날 일만 하지 마시고, 제가 외롭지 않게 좀 놀아주시던가요."

"···읏, 흐읍."

세르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