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회
29. 공작가의 보좌관들 (2)
혹시나 해서 침실 문도 두드려 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문고리를 돌려봐도 역시나 잠겨있다.
'항상 죽치다 갔는데, 오늘따라 바로 내려가면 이상해 보이려나?'
녀석이 어딜 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뒷조사하러 간 것만은 분명하다.
어차피 내 방으로 돌아가도 재밌는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5층까지 올라온 게 아까워서라도 그냥 내려가긴 아쉽다.
이렇게 된 거, 세르펜스의 알리바이 생성에 협조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서재에서 혼자 빈둥거려야 겠다.
서재에서 야식을 먹기 시작하면서 가져다 놓은 탁자 위에 케이크를 올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소파에 편히 드러누워, 책을 펼쳐 들었다.
들리는 거라고는 내 숨소리뿐인 적막 속에서 책을 읽고 있노라니, 조금씩 졸음이 몰려든다.
굳이 그것을 물리칠 필요는 없겠지.
"···선우."
잠결에 희미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확인할 필요도 없이 세르펜스겠지만, 눈을 감고 대화를 할 수도 없는 노릇.
일단 눈을 떴다. 시야에 후드가 달린 어두운 복장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들어 왔다.
"이제 왔어요?"
"방으로 향하려다 기척이 느껴져서 와봤더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어째서 침대가 있는 멀쩡한 자신의 방을 내버려 두고, 남의 서재 소파에서 자고 있느냐는 질문이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부스스 일어나 기지개를 쭉 켰다.
"뭐하긴요? 당연히 세르펜스를 기다렸죠."
"기다렸다니···. 내게 용건이라도 있는 건가?"
"그보다, 대체 말도 없이 어딜 다녀온 겁니까?"
그가 부재중이라는 걸 알았으면 올라올 일도 없었다. 케이크 정도야 주방에 맡겨놓고, 내일 티타임 때 같이 올려달라 부탁했으면 될 일이었다.
그 꼴을 하고 어딜 몰래 다녀온 거냐는 뜻을 담아, 의도적으로 그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윈스톤에게 검에 관한 얘기를 들어서 그런가?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그의 비어있는 허리춤이 신경 쓰였다.
'[성검의 주인]에서는 선택의 날이 지나자마자, 검을 챙겨 들고 다니더니.'
어째, 현재의 세르펜스는 아직도 비무장 상태다. 휴마누스가 준 생일 선물은 당연히 어딘가에 처박혀 있겠지.
'그때와는 달리 심적으로 내몰리지 않고, 마음이 안정되어 있다는 증거라 생각하면 긍정적이긴 한데···.'
그렇다고는 해도, 잠입 조사하러 가는 사람이 비무장일 건 또 뭐란 말인가. 전에는 내게 검을 안 들고 다닌다고 뭐라 하더니, 그러는 자기도 마찬가지였다.
"아르젠토 령에 다녀왔다."
"아르젠토 공작령이요?!"
무기 하나 없이, 적진에 다녀왔다는 소리다.
내가 기함하며 되묻자 그가 '얘는 왜 또 과민 반응이지?'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나름의 이유를 찾아냈는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젠토 공작령에는 암흑가와 연결된 게이트가 있다."
"거, 엄청나게 유용하네요."
그 먼 거리를 어떻게 금방 다녀왔느냐는 질문으로 받아들였나 보다. 비꼬는 내 말투에 그가 '이거 아냐?'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도 궁금하긴 했죠."
단지, 검에 꽂혀서 그것을 잠시 뒤로 미뤘을 뿐.
"세르펜스는 검 안 사요? 이제 성검 들 일도 없는데, 손에 맞는 거로 하나 맞추죠?"
"그 얘길 하려고 이제까지 기다린 건가?"
"아뇨."
나는 검지로 케이크를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 그의 시선이 탁자 위로 향했다.
"케이크 사 왔는데 자리에 없어서, 그냥 내려갔다가는 세르펜스가 밖에 나간 걸 들킬까 봐서요. 기다리는 김에 돌아오면 뭘 하느라 말도 없이 나갔는지도 물어보려고?"
"···일단 식사부터 하고 옵시다."
자다 깨서 몰랐는데, 아직 저녁 시간밖에 안 되었나 보다. 나갔다 온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식사 시간에 맞춰 돌아온 모양이다.
세르펜스는 옷을 갈아입고 갈 생각인지 침실 쪽으로 향했고, 나는 먼저 내려갔다.
식사를 끝마치고 올라왔다. 주방에서 빌려온 식기류를 테이블 위에 올리고, 케이크를 꺼내고 있자니 세르펜스도 도착했다.
"검이라면 가문에 종류별로 갖춰진 것이 있으니, 필요하다면 그중 하나를 쓰면 됩니다."
오자마자 대뜸 본론으로 들어갔다.
[성검의 주인]에서의 세르펜스는 선택의 날 이후, 바로 검을 가지고 다녔으니. 그것 중 하나를 썼나 보다.
"새로 안 맞추고요?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지만, 도구가 좋으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게 당연하잖아요."
"제대로 된 무기를 얻으려면 테라룸 왕국에 방문해야 하는 데, 현재로서는 제국의 안정화가 우선인지라 어쩔 수가 없다."
말하는 것을 보아, 무기를 맞출 생각이 있긴 한 모양이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당분간은 그냥 있는 것으로 때우겠다는 얘기다.
'드워프는 장인의 종족이라, 직접 사람을 보고 사용자에 맞춰 무기를 제작해 준다든가?'
긍지와 자존심이 대단한 자들이다.
사용자가 직접 찾아오지 않으면, 천금을 준대도 의뢰를 거절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다.
현재 룩스메아 교단의 대신전에서 쓰이는 신종(神鐘)을 만든 자 또한 드워프였다. 그때는 교황이 직접 그들의 왕국에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좋게 보자면 장인 정신이 뛰어나고, 나쁘게 말하자면 융통성이 없었다.
우스개로, '엘프는 죽는 순간까지 소년/소녀 같은 순수함을 유지한다면, 드워프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꼰대 같은 고지식함을 가지고 태어난다.'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
'그래, 신 룩스메아더러 직접 찾아오라고 하지 않은 게 어디야?'
아무튼 그 정도 검이 아니고서야, 세르펜스의 실력에서는 모두 고만고만한 검이라 맞추고 말고 할 게 없나 보다.
"···그래도 위험한 곳 갈 때는 무기 좀 챙겨서 다녀요. 혹시 모르잖습니까?"
"남 말 하긴."
"저도 앞으로 잘 챙길 테니, 세르펜스도 챙기고 다니라는 말입니다."
내 말에 의외의 소득이라도 얻었다는 표정으로, 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앞으로는 유의하지."
그런 그에게 보상으로 접시에 밀크레이프 케이크를 한 조각 올려 내밀었다.
세르펜스는 겹겹이 쌓아 올려진 그것을 살피다가, 일반 케이크를 먹듯 끝을 잘라 입에 넣었다.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평소보다 섬세한 손놀림이다.
"그래서, 다녀왔던 일은 어땠습니까?"
나는 포크로 윗면을 돌돌 말면서 그에게 질문했다.
"아무래도 밝은 낮에 영주 성까지 숨어드는 건 어려울 것 같아서, 영지 주변만 돌아보고 왔다."
병력 배치를 비롯한 방범 장치들을 모두 꿰뚫고 있는 프라시더스 가문의 것이라면 모를까.
다른 공작 가문의 성을 대낮에 드나들기는, 제아무리 세르펜스라도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소득은 있었습니까?"
"깨끗하더군."
마뜩잖다는 듯,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깨끗하다는 게 말 그대로 더럽지 않다는 뜻은 아닐 테고. 악마 숭배 세력의 흔적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는 얘기일 거다.
"그럼 그냥 아르젠토 공작이 순수한 권력욕으로 세르펜스를 견제한다는 겁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으나···. 당장은 그 보좌관이 의심스럽더군."
"보좌관이라면, 팔숨 경이요?"
저번에 대판 싸우고 난 뒤로, 그와 두 번 다시 대화를 나누지 않았었다.
나는 그에게 먼저 말을 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 역시 괜히 나를 건드려 봐야 좋은 꼴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터라, 서로를 반쯤 무시하며 지내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친하게 지낼 걸 그랬나? 그랬다면 대화라도 하면서 은연중에 떠봤을 텐데."
"큰일 날 소리."
접근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듯, 표정도 목소리도 단호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정말 팔숨 경이 문젭니까? 혹, 아르젠토 공작이 그에게 다 뒤집어씌우려 한다거나···."
"그럴 가능성도 최대한 염두에 두고 있으나, 지금으로써는 그자가 가장 의심스럽다."
세르펜스의 설명에 의하면 아르젠토 공작이 그를 상당히 싸고돈다는 모양이다. 자신의 보좌관을 아들보다도 아낀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라나?
'종종 자문회에서도, 귓속말 같은 걸 주고받는 모습을 보일 정도였으니.'
20년 가까이 아들보다도 더 가까운 위치에서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다니며 모셔 왔으니. 가족보다도 가깝게 느껴질 만했다.
하지만.
"세상에, 공작씩이나 돼서 보좌관에게 휘둘리는 사람이 어딨답니까?"
"···보좌관이라는 게, 가장 가까이에서 상관을 모시며 조언이나 의견 등을 제시해 주는 직책이잖은가. 그, 그럴 수도있지"
"있긴 개뿔이!"
같은 공작이라고 편드는 건지, 세르펜스가 변명 같은 말을 쏟아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허, 참. 어이가 없어서···. 뭐 그런 무능한 놈이 다 있대?!"
"그, 그렇다고 무능까지야···."
"무능한 거죠!"
"으, 으음···."
그가 포크까지 내려놓으며 고개를 숙인다. 같은 공작으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라 생각한 거겠지.
"나, 참! 그리고 팔숨 경도 정말 제정신이 아니네! 고작 보좌관 주제에 공작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쥐락펴락하다니. 불경해도 정도가 있지! 쯧-!"
"······."
혀를 차며, 포크에 감아둔 크레이프를 한 장 입에 넣었다.
그런 나를 세르펜스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아, 먹는 거로 장난치는 거 아닙니다! 우리 누나가 먹던 방식인데, 한 번 따라 해봤더니 이게 은근 재밌어서요."
"그게 아니라···."
그가 말끝을 흐리며, 조용히 눈을 깜박거렸다.
"···왜 그렇게 봐요?"
"······."
"······아."
어쩐지 세르펜스가 자기 일처럼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게 이상하다 했다. 정말 자기 일이라 그랬던 거다.
"보좌관에게 휘둘리는 공작들로, 제국은 괜찮은 겁니까?"
"···으읏!"
"정말 걱정돼서 묻는 겁니다. 두 명뿐인 공작이 둘 다 그래도 되는 건지···."
"윽···!"
그딴 걸 자신에게 묻지 말라는 듯, 세르펜스가 치욕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수치심에 달아오른 얼굴로 부들거리는 꼴이, 눈앞에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기어들어갈 기세다.
"어, 음···. 그, 그래요. 아르젠토 공작이 70대랬나? 자식은 영지 관리에 집중한다고 내려가서 따로 살고···, 부인은 사별했댔나요?"
"······."
삐졌는지,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돌려버린다.
"나이 먹고 마음이 부쩍 약해져서 그럴 수도 있죠! 그래, 이거네! 약해진 마음을 파고들면서 옆에서 살뜰히 모시니, 넘어갈 수밖에요!"
"······."
"외롭고 적적하다 보니 무의식중에 의지할 곳을 찾게 되고, 당연히 오랜 시간 곁을 지켰던 팔숨 경에게 기댈 수밖에요! 상대가 하는 말이 다 맞는 것 같고 그러겠네!"
"······."
너무 욕만 한 것 같아서, 열심히 옹호해 줬는데도 세르펜스의 표정은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과장이 심해서 진실성이 느껴지지 않았나 보다.
"그, 그러니까. 마음과 정신이 불안정한 상태에서는 남의 말에 쉽게 휩쓸린다, 그런 뜻입니다."
"···이제 그만 되었습니다."
"······."
우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며, 케이크를 깨작거렸다.
각자 한 조각을 먹어치우고 나서야, 우리는 다시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럼 아르젠토 령까지 가서 여기저기 둘러보고 오신 거네요? 기념품 같은 건 없어요?"
"일하러 간 겁니다."
"출장이라도, 기념품 같은 건 사와야 하는 겁니다."
"···다음에 가게 되면 참고하지."
분위기 전환 차 가볍게 던진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본래의 색을 되찾은 세르펜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니, 그가 빈 접시를 내게 내민다.
그 위에 케이크를 한 조각 더 올려줬다.
"행여나 하는 마음에 묻는 건데, 케이크 많이 먹으려고 식사 조금만 하고 온 거 아니죠?"
"······."
잘 먹는 게 기특해서 덮어놓고 먹이다 보니, 이런 문제가 생길 줄이야. 앞으로는 조금씩 조절하며 먹일 필요성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