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회
29. 공작가의 보좌관들 (5)
공작저로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세르펜스에게 먹일 음식을 준비시키는 것이었다.
마차에서 내리며, 마중 나와 있던 한스에게 그것을 부탁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없기는요! 사람들에게 시달리느라 아무것도 못 먹은 주제에."
그간 쌓인 얘기가 많았는지, 귀족들은 오늘은 평소보다 더 늦게까지 세르펜스를 붙잡아 두었다.
메인 요리라 할 만한 것은 거의 식었거나 동나 있었다.
먹을 사람은 모두 먹은 이후. 그것을 채울 필요는 없었고, 그 자리는 디저트류로 교체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디저트로 배를 채우라고 할 수는 없지!'
군것질에 처음 눈뜬 아이가 그러하듯. 안 그래도 식사보다 군것질거리에 눈독 들이고 있는 걸 뻔히 아는데, 그것을 방관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런 상황을 노리고, 일부러 늦게까지 잡혀있다 온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그를 바로 마차에 태워, 공작저로 돌아온 것.
"···시녀들에게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먼저 식사실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세르펜스의 허락이 아직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한스가 그것을 받아들였다. 빠른 식사 준비를 위해, 세르펜스에게 예를 갖춘 후 곧장 자리를 떴다.
이전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
"그럼 우리도 들어가죠?"
얼떨떨하다는 표정으로 세르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를 이끌고 본관에 있는 식사실로 이동했다.
"어떻게 뷔페를 앞에 두고, 먹지도 못하게 돌아가며 말을 건답니까?!"
때아닌 저녁 식사 준비로 인해, 시녀들이 바쁘게 왔다 갔다 하며 식탁 위에 냅킨과 물잔. 그리고 포크와 나이프 따위의 양식기를 올렸다.
그러면서도 내 말을 주워들었는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한데 시온 경께서도 식사하지 못하신 겁니까?"
그럴 리가. 세르펜스에게는 미안하지만, 투스토르의 질문을 막아놓고 잘 챙겨 먹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르펜스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즉, 저것은 먹을 거 다 먹은 사람이 왜 여기 앉아있느냐는 질문이다.
"저는 잘 먹었으니, 그냥 차나 한잔 준비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세르펜스에게 대답해주기에 앞서, 시녀에게 말을 건넸다. 그녀가 내 앞에 놓아주려던 식기를 거둬갔다.
'···설마, 앞으로는 나도 여기서 먹어도 되는 건가?'
초창기에는 엄두도 못 냈었는데, 이제는 내가 뭘 하던 그냥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라서 밥 좀 같이 먹는다고 별반 이상할 것도 없나 보다.
안 그래도 매일 혼자 식사하게 두는 것도 신경 쓰이던 차였는데, 마침 잘 됐다.
"당연히 업무 관련 얘기를 하기 위해서죠. 달리 있습니까?"
"······."
얼굴은 웃고 있으나, 듣지 못할 것이라도 들은 것처럼 미심쩍다는 눈을 하고 있다.
차라리 밥을 잘 먹나 안 먹나 감시하러 왔다고 말했으면 납득했을 거라고 말하는 듯하다.
"아까 투스토르 경으로부터 사교계에서 나도는 소문을 들었는데 말이죠."
"마차에서 질문하셨던 것 말고도 더 있습니까?"
"왜, 그 있잖습니까. 전에 제게 주의하라고 하셨던."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잘 알겠습니다."
그가 예사스럽다는 표정을 꾸며내며, '조심하라 했더니, 기어이 깔짝거리고 왔냐?'라는 뜻이 내포된 시선을 보낸다.
"직접 대화한 것도 아니고, 그냥 탐문 수사입니다!"
"네?"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왜 변명을 하느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지만 본심은 변명 따윈 집어치우라고 말하고 싶겠지.
아무리 프라시더스 공작가문의 사용인들이 충성도가 높다 하나, 대놓고 아르젠토 공작가를 저격하는 얘기를 할 수는 없고.
'무엇보다 이 녀석이 저런 태도를 보여서야···.'
원활한 대화가 이루어질 것 같지가 않다.
"자세한 이야기는 음식이 모두 나온 후. 사람들을 물리고 하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그 또한 답답한 건 매한가지였나 보다.
굳이 시녀들에게 다시 한 번 얘기할 필요도 없었다. 세르펜스의 말을 들은 그녀들이 음식을 코스 형식으로 하나씩 올리는 대신, 한 번에 내왔다.
크루통이 올라간 수프, 닭가슴살이 들어간 시저 샐러드와 연어 스테이크.
늦은 저녁 시간대라 그런가, 위에 부담이 가지 않는 가벼운 식단이다. 마지막으로 내 앞에 차를 올려 두고, 알아서 식사실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실로 프로페셔널한 모습이라 아니 말할 수 없다.
"분명 알아서 조심하고, 피하라 했을 텐데?"
바로 인위적으로 꾸며냈던 미소를 집어치운 세르펜스가 불만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연기하지 않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하다고 말하던 사람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접근하지 말랬지, 언급조차 하지 말란 말은 안 하셨잖습니까?"
"그런 것까지 일일이 설명해 줘야 하는 건가?"
"일단 먹으면서 얘기하죠."
세르펜스가 한숨을 내쉬면서도, 얌전히 숟가락을 들어 수프를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나는 차를 살짝 불어 마셨다.
"그래서 무슨 얘기를 듣고 온 겁니까?"
녀석이 삐졌는지, 못마땅하다는 투로 질문했다.
"팔숨 경이 제 뒷담을 하고 다닌다거나, 그의 과거에 대해서. 근데 이거 세르펜스는 알고 있었죠?"
"뭐···, 그렇지."
그가 슬쩍 시선을 회피하며 음식을 먹는 데 열중하는 척한다.
반응을 보아하니,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팍팍 전해진다.
"그런 정보가 있다면 제게도 미리 알려주셨으면 좋았잖아요? 그럼 제가 그런 걸 캐묻고 다닐 일도 없을 텐데, 입을 다문 세르펜스도 잘못 한 겁니다."
"당신이 알면 뭔가 달라지는 건가?"
"제 호기심이 충족되죠! 그것보다, 지금 저 무능하다고 깐 겁니까?"
"······."
하지만 맞는 말이긴 했다. 내가 안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없긴 하지.
"아무튼, 지금 팔숨 경은 본가가 그 모양이라 뒤에서 무시당하는 것 같던데···. 공작가의 권력이면 완전히 풍비박산 나기 전에 다시 되돌릴 수 있었던 거 아닙니까?"
"가주 자리가 다른 이에게 넘어가기 전이라면 가능하지. 공작가의 체면을 생각하면 그러지 않은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많이 이상한 일이었나 보다.
그녀들이 도와달라는 부탁을 해온 것은 그가 보좌관이 된 이후였으니, 도와줄 여력은 충분했다.
그리고 그 일은 팔숨 경 본인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정말 단순히 그녀들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해서, 그 복수 때문에 백작가라는 배경을 완전히 버렸다고?'
애당초 버렸다고 말하기도 뭐한 상황이 아니던가. 어쩔 수 없는 피신이었지.
"상대 영주를 회유하건, 강제로 뺏어오건. 영지를 되찾아 주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다. 제국법상, 영지전으로 빼앗겼던 영토는 그에 따르는 보상을 치르면 다시 돌려받는 게 가능하다. 그리고 그건 아르젠토 공작에게도 이득이 되는 일이지."
"어떤 점이요?"
"영지를 되찾아 준 대가로 매해 일정량의 세금을 떼어 간다거나, 아예 그 경영에 직접 개입하는 것도 가능하다. 공작 가문의 이름으로 벌이기엔 좀스러운 사업을 건드려 본다든가, 자신의 영지에 바로 적용하기 어려운 제도 등을 시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듣고 보니, 약간의 수고를 감수한다면 아르젠토 공작에게도 메리트가 되는 일이라는 거다.
즉, 팔숨 백작가가 그렇게 풍비박산 난 것은 순전히 팔숨 경이 원해서라는 얘기다.
그의 여동생이 작위를 팔아넘긴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행동이다.
그대로 버텼으면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만 했겠지. 상황이 악화된 만큼, 부인조차 아닌 첩으로 들어가게 될 형편.
'그런 상황에서 허울뿐인 작위를 빚을 모두 갚고도 남을 금액으로 사준다?'
신 룩스메아가 내려준 자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간 은혜로운 게 아니다.
그들 모녀에겐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요, 훨씬 더 나은 삶이었던 거겠지.
더는 귀족이 아니게 되었지만, 그 대신 자유를 얻었다.
"···영지를 되찾으려면, 내세울 영주가 있어야 하겠죠?"
"당연한 소릴."
"그리고 경영권은 대부분 아르젠토 공작의 손에 들어갔을 테고요."
"그렇지."
세르펜스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답하며, 연어 스테이크를 잘라 입에 넣었다. 내 질문을 제대로 듣긴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성의 없는 대답이다.
"어쩌면, 그거 때문 아닙니까? 그녀들을 돕는 걸 거절했던 건."
"······."
"더이상 남들에게 휘말리지 말고, 자유롭게 살길 바라서. 그것 때문에 고비가 오긴 했지만···. 가문을 다시 세우고 영지를 되찾는 것이, 팔숨 경과 아르젠토 공작 모두에게 큰 이득인데. 그렇게 하지 않을 만한 이유라고는···."
우아한 태도로 식사를 해나가던 세르펜스가 오른손에 들고 있던 나이프를 내려놓는다. 그가 잔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넘기고는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예? 방금 제 말을 제대로 듣긴 한 겁니까? 그러니까, 세르펜스의 말대로라면 여동생을 영주 자리에 앉혀 놓으면···."
"그게 아니라. 그렇게 생각해서 좋을 것이 뭐가 있느냐는 뜻입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람?
내가 아무리 세르펜스어 마스터라고 해도, 방금 한 말은 해석되지 않았다. 그의 표정 또한 어수선하여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어떻게든 이해해 보고자 그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고 있노라니, 세르펜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때마침 그런 좋은 조건으로 작위를 산다는 자가 나타나고, 얌전히 위자료까지 넘겨주며 이혼을 해준 것부터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역시···!"
한 가지 문제는 풀렸는데, 세르펜스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더 알 수 없게 되었다.
"어차피 그자는 적이다. 최악에는 악마 숭배 세력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고. 만약 그러하다면 그자의 과거가 어떻든 구제할 방도는 없다."
"그렇긴 하지만···."
"동정하지 마라. 그자의 감정에 이입하지도 말고, 이해하는 것도 하지 마라."
"너무 매정한 말 아닙니까?"
"그러는 그대는 정이 너무 많고."
이제야 알겠다. 세르펜스가 왜 그런 표정으로 그런 얘기를 했는지.
"제가 망설이고, 그를 구해주길 바랄까 봐서입니까?"
"···그래. 이래서 말하지 않으려 했던 건데, 어디서 주워듣고 와서는."
그가 불편하다는 심기를 숨기지 않고, 낮게 혀를 찼다.
대체 이 녀석은 나를 얼마나 선인으로 여기고 있길래, 무슨 죄든 덮어주고 용서해 줄 거라 생각하는 거지?
"동정이야 하겠지만, 그거랑은 별개입니다. 악마 숭배 세력과 관련이 없다면 아르젠토 공작이 어련히 덮어 줄 테고, 관련이 있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죠. 괜히 덮어 주려다가 저희까지 이상하게 몰릴 수도 있잖습니까."
"그렇···지."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면 약간의 손해는 감안할 수 있지만, 치명적인 피해를 감수할 정도로 미련하진 않거든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제야 녀석이 굳은 표정을 풀고, 안도의 미소를 짓는다.
"그래도 될 수 있으면 손해도 입지 않는 선에서 끝내라."
"당연한 말씀!"
멈춰있던 세르펜스의 손이 다시 움직이며, 식사를 재개했다.
"그리고 아르젠토 공작에 관해 얘기가 나온 김에 묻는 건데, 그가 팔숨 경을 어째서 보좌관으로 뽑은 건지도 아십니까? 팔숨 가의 상태를 몰랐을 리는 없을 텐데···."
"일만 잘한다면야. 그 정도는 공작가의 힘이면 충분히 해결 가능한 문제다."
"도움 자체를 거절할 줄은 몰랐나 보네요."
빚을 갚아주고 영지를 되찾아 주겠다는데, 그것을 거절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겠지.
"그럼 그냥 순전히 능력으로 뽑힌 겁니까?"
"어느 정도는. 도박에 빠졌던 당시의 팔숨 백작을 대신해 재정이 파탄 난 영지를 유지해 나가던 게 그자였다. 빚이 더이상 늘지 않고, 영지전이 일어나지만 않았더라면 무난하게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을 정도였다고 하더군."
무능력해서 보좌관으로 뽑힌 건 시온뿐인가 보다. 그래도 지금의 나 정도면 꽤 괜찮겠지, 아마도.
"어느 정도라는 건 또 뭡니까?"
"보통이라면 서류가 공작에게 전달되기도 전에 걸러졌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는 얘기다."
개나 소나 서류를 죄다 받아주는 건 아니었나 보다.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고, 공작씩이나 돼서 모든 이들을 일일이 확인하고 면접을 볼 수는 없겠지.
물론 세르펜스가 시온을 뽑게 된 경위는 특이 케이스였으니 넘어가자.
"그렇다는 건, 혹시 당시 담당자의 뒤를 캐보면···!"
"죽었다."
"암살입니까?!"
"···노환으로."
"······."
세월의 무게가 너무나도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