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26화 (126/925)

126회

29. 공작가의 보좌관들 (7)

팔숨 경은 잠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굳이 내 옆의 의자를 끌어내 앉았다.

커다란 원형의 테이블이라 빈자리는 널렸다. 투스토르를 시작으로 눈치 보던 다른 보좌관들이 하나둘 끼어들었다.

눈치 게임에 실패한 자들은 적당히 근처에 있는 테이블 쪽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자리에 착석하자, 시종들이 원하는 음료를 물어보고 그것을 따라준다.

"리벨론 경께선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싫어하시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입니다."

"아! 확실히. 리벨론 경께서는 좀 그런 이미지시죠."

"예? 제가요?"

금시초문의 이야기다. 나만큼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다고.

그러나, 야속하다는 듯 던진 팔숨 경의 말에 그 옆에 앉은 갈색 머리 보좌관이 맞장구를 쳤다.

다른 보좌관들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보아, 한두 사람의 의견이 아닌 모양이다.

"사교계 출입이 없으신 건 이해하지만, 전임자분과 달리 이런 모임도 열지 않으시기에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내가 일부러 모임을 열지 않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도 내게 그런 모임이 있다는 얘기를 해주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뭘 알아야 열든 말든 하지.

내가 열어야 했다는 건 더더욱 몰랐다.

"황실 연회에서도 먼저 누군가와 어울리시거나, 말씀하시는 것도 거의 못 봤죠."

한 달에 한 번, 가식 일변도의 대화를 나누는데 친해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공식적인 자리라 그런가, 연회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공적인 느낌의 대화가 오갔다.

더군다나 보좌관들은 연회의 주체라기보다, 그들을 보조하는 업무로 따라온 탓이라 그런지 그것이 더했다.

모시는 분으로부터, '누구의 보좌관에게 이런저런 말을 떠봐라.' 같은 식의 지시를 받고 오는 경우가 많아서다.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면서도 상대방의 말실수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서, 무척이나 불편했다.

상대방의 흠이나 약점을 찾아내거나, 이해득실을 따지며 머리를 굴리는 게 훤히 보였다.

먼저 말을 걸어오면 속 빈 강정 같은 대답은 해 주었으나, 솔직히 별로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가식으로 상대를 대하는 건 세르펜스도 마찬가지긴 해도···.'

상대를 찌르기 위한 날카로운 가시를 얇은 천으로 덮어 숨긴 그들과는 달랐다. 미움받지 않으려고 자신을 갉아내고 마모시킨 결과물이라는 걸 알고 있다.

타인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은 불안감에서 나온 행동인지라, 오히려 안타까울 뿐.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 이제 막 보좌관이 된 제가 보좌관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여러분을 오라 가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랬습니다."

"그렇다 해도 공작가의 보좌관이신 리벨론 경의 부름에 누가 거절하겠습니까."

보좌관 중 한 명이 말했다. 아부하는 것 같기도 하고, 권력 남용을 권장하는 말 같기도 하다.

대충 흘리자.

"에이, 저는 당연히 또 다른 공작가의 보좌관이신 팔숨 경께서 열어주실 줄 알았죠. 그래서 여태껏 기다리기만 했지 뭡니까? 한참이 지나도 초대가 안 오길래, 저만 따돌리시는 게 아닌가 하여 행동도 조심스러워져서 저도 모르게 말을 아꼈나 봅니다."

변명을 늘어놓다 보니, 어째 모든 것이 팔숨 경의 탓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말을 뱉은 나도 그렇게 느꼈다. 듣는 사람은 더욱 그러하겠지. 팔숨 경이 바로 해명에 나섰다.

"저번에는 제 도움이 필요 없다 하시기에, 그런 고충을 겪고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도움을 바란 건 아니었습니다. 선배 예우 차원에서 양보했던 거죠. 다음 달이면 1년을 채우니까, 계속 소식이 없었으면 그때 가서 열 생각이었습니다."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려니 목이 탄다. 아까 받아두었던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건 그렇고···, 그래서 아까 그건 어떻게 된 겁니까?"

어디서 본 대로 느긋하게 와인잔을 돌리며 있어 보이는 척 스월링을 하고 있으니, 누군가 안달 난 목소리로 질문해 왔다.

"그거라뇨?"

"꾸, 꿀팁 대방출···."

되는대로 뱉은 말이었는데, 정말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하늘색 머리칼의 학자 풍의 인상을 한 사내가 조심스레 말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프그누토 백작이 세르펜스와 검술 대련을 위해 찾아왔을 때, 공기처럼 서 있던 자다.

"그건 모시는 분에 따라 태도를 달리해야 할 문제라 생각하는데, 경께서는···."

"저는···?"

"근육이라도 키워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네?"

헛소리 같지만, 헛소리가 아니다.

나를 배경 취급하던 프그누토 백작이 내가 세르펜스의 검술에 관해 이야기하자, 그 시선이 호의적으로 변했던 것을 기억한다.

다른 보좌관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은 없지만, 제온만큼 연약해 보이는 이 사내에게는 확실히 답해줄 수 있었다.

"일단 한번 해보시죠."

원하던 답변이 아니었는지, 그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뭔가 말 한마디로 사람을 꿰는 방법이라도 있을 줄 알았나?

"이제야 알겠습니다. 어떻게 리벨론 경께서 단기간에 프라시더스 공작님의 신뢰를 얻으실 수 있었는지."

갑자기 팔숨 경이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운을 띄우듯 말했다. 어딘가 비릿함이 느껴지는 것이, 찝찝함을 불러일으켰다.

"프라시더스 공작께서는 정의로운 분이시니, 그걸 노리신 것 아닙니까? 이전에 악마 숭배 세력과 엮이셨을 때, 악의에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아니, 악의에 굴하지 않는 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딴 거에 굴하는 놈이 나쁜 새···, 자식이죠!"

어우, 깜짝 놀랐네.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무심코 긍정했다가는 악마 숭배자와 엮였던 일까지 내 계획의 연장처럼 느껴지게끔 말하고 있다.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발상을 떠올리실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륙을 해하려 하는 악마 숭배자들의 행태에 분노하는 것은, 이 대륙을 살아가는 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생각이고. 악을 미워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마음 아닙니까?"

동의를 구하듯 주변을 둘러보며 말하니, 당연하게도 모두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고개를 젓는 놈이 있다면 악마 숭배자거나, 앞으로 악마를 숭배할 놈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공작님께서 늦지 않게 저를 구하러 와주실 수 있었던 건 서로를 믿는 유대 덕분이었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하, 하하···. 제가 그걸 잠시 잊었습니다. 그때가 분명 공작가에 채용되신지 두 달도 채 되기 전이었던 걸로 압니다. 그렇게나 짧은 시간 만에 신뢰를 얻으신 방법이 궁금해지는군요."

그 문제를 계속해서 거론하며 트집을 잡아봤자, 서로 폭탄을 주고받는 치킨게임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나 보다.

옆으로 샐 뻔한 화제를 되돌리는 척하며, 그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일축했다.

"신뢰라는 게 오랜 시간을 통해 쌓아진다지만, 때로는 시간보다 더 중요한 것도 있는 법입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다 해도 서로를 불신하는 관계가 있으니, 당연히 그 반대도 있지 않겠습니까?"

"시간보다 중요한 것이라···.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요?"

"진심이죠. 서로를 대함에 있어 거짓이 없다면, 믿지 못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판에 박힌 듯 뻔한 이상적인 말이지만, 어쩌겠는가.

먹을 거로 길들이면서 고양이 모시듯 지내왔으며, 성심성의껏 애 취급한 결과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와 내가 진심으로 서로를 대한 건 맞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상대의 행동이 진심인지 거짓인지를 어떻게 압니까?"

"타인을 대할 때 의심부터 해야 한다니, 얼마나 불신 속에서 살아오신 겁니까?"

"크흠···! 리벨론 경께서 아직 세상을 많이 겪어보지 않으셔서 잘 모르시나 봅니다. 그 순진함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인간 불신론자가 될 뻔한 팔숨 경은, 그것을 내 사회생활 부족 탓으로 돌렸다.

"그럼 팔숨 경께서는 어떻게 아르젠토 공작님과 그리도 돈독한 신뢰 관계를 쌓으신 겁니까?"

"제가 정성을 다해 공작님을 모셔온 것이 어언 20년입니다. 그 세월에 대한 보상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너무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은 것처럼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르젠토 공작님도 불쌍하시지···."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비꼬는 말에, 팔숨 경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라갔다.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안타까워서요. 소문에 따르면 팔숨 경을 친자식처럼 여기신다고 들었는데, 경께서는 너무 사무적이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

그가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너무 관심이 지나치신 것 아닙니까? 거기까지 상관하실 바가 아닙니다."

"아, 그래요? 제가 실례했나 봅니다. 팔숨 경께서 우리 공작님을 아주아주 걱정해 주신다고 들어서···. 저는 또, 어느 가문이고 할 것 없이 서로서로 참견하고 걱정해 주는 문화가 요즘 사교계의 유행인 줄 알았지 뭡니까?"

"하···."

기가 차다는 듯,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게 남을 욕할 때는 자신도 똑같이 돌려받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야지.

"저도 실례가 많았습니다. 리벨론 경과는 대화를 나눌 일이 없었던지라, 제가 오해한 나머지 말을 함부로 했던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죠."

저번에도 느꼈지만, 감정을 추스르는 것이 무척이나 빠르다. 상당히 노련한 자다.

이런 사람이 그깟 말싸움에서 좀 밀렸다고, 뒤에서 욕하고 다녔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르펜스의 명예를 흠집 내기 위해서라 하기에도 부족했다.

먼지도 쌓이면 큰 산이 된다지만, 한 번 불면 날아가 버릴 정도로 가벼운 내용이라 제대로 모이지도 않을 성싶다.

'나중에 크게 한 방 터트리려고 밑밥이라도 깔아둔 건가?'

아까 악마 숭배자를 언급했던 것을 생각하면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연회에서 보니, 리벨론 경께선 술을 즐기시는 듯하던데. 마침 선물로 귀한 술이 들어온 것이 있어서, 사과의 의미로 한 잔 나누고 싶습니다."

"예? 아뇨, 괜찮습니다. 지금 마시고 있는 것도 충분히 훌륭하고···."

"이렇게 리벨론 경과 터놓고 대화한 것이 기뻐서 그렇습니다. 그간 대화가 적은 탓에 오해했었는데, 훌륭하신 분 같아서. 진심으로 친해지고 싶어졌습니다."

그렇게 말한 팔숨 경은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시종을 불러 자신의 방에 있는 술을 가져다 달라고 지시했다.

치사하게 내가 조금 전에 신뢰의 근원으로 내건 진심이라는 단어를 인용하여.

'···겁나 수상한데?'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연 사교 모임이었다. 열린 장소도 아르젠토 공작가인데다, 본인이 준비한 술이고. 지켜보는 사람도 많았다.

독을 탔을 리는 없다. 당장 나를 죽여서 이득 볼 것도 없다.

"'용감한 자의 불꽃'이라는 이름의 술인데, 혹시 아십니까?"

안타깝게도 시온은 귀한 술을 마셔볼 만한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기에, 내가 아는 이 세계의 술 이름은 [성검의 주인]에서 휴마누스 일행이 마셨던 것뿐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저런 이름의 술은 없었다.

"아뇨. 처음 듣지만, 이름부터 도수가 상당할 것 같은데요?"

"네, 맞습니다. 그리고 맛 또한 상당하지요. 하지만 제작 공정이 복잡하고 오랜 숙성이 필요한 술이라, 한 병당 두 잔밖에 안 되는 양입니다. 많이 권할 수도 없으니 안심하십시오."

나 한 잔, 본인 한 잔인가. 미칠 듯한 찝찝함이다. 실수인 척 흘려버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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