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회
29. 공작가의 보좌관들 (8)
얼마 지나지 않아 팔숨 경의 심부름을 갔던 시종이 돌아왔다.
덜렁 술병만 들고 올 줄 알았는데, 이것저것 많이 올려진 서빙 카트를 끌고 왔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화려한 금박으로 병의 목 부분을 감싼 양주병이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술도 드시지 못하면서, 아버지께서 마냥 수집만 하시던 미니어처 양주보다 약간 더 큰 크기의 병이었다.
"시중에 풀리는 수가 적다 보니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애주가들 사이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다죠. 없어서 못 구하는 겁니다."
팔숨 경이 그것을 건네받고, 라벨을 확인하라는 듯 내게 가까이 보여주며 말했다.
'용감한 자의 불꽃'이라는 술의 이름과 그 밑에 생산연도로 추정되는 숫자가 적혀있었으나···.
'본다고 내가 아나?'
이름조차 처음 듣는 술의 생산연도를 본다고, 그게 좋은지 나쁜지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보좌관 중에서 술에 일가견 있는 자가 있었는지, '오···!'하는 작은 탄성을 흘리는 것이 들렸다.
'그딴 건 내 알 바가 아니지.'
병의 주둥이 부분을 감싼 금색 포장지가 새것인지 여부 정도만 확인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팔숨경이 조심스레 포장을 벗겨낸다. 포장지로 가려졌던 금속 재질의 뚜껑이 모습을 드러냈다.
뚜껑의 마감을 보니, 개봉한 흔적은 없었다.
- 까드득.
첫 개봉 시에만 나는. 특유의 금속 마찰음이 들려 왔다. 동시에 독한 알코올 향이 강하게 치고 들어왔다.
취하는 것보다, 속을 다 버려 놓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다.
'스트레이트로 한 번에 마시면, 어지간한 사람들은 그냥 훅 가겠는데?'
이런 걸 내게 먹여서 뭘 어쩔 생각인 걸까.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여 뜨거움을 호소하며 물을 찾는 우스꽝스러운 연출을 기대하는 건지, 아니면 만취해서 실수하길 바라는 건지.
어느 쪽이든 사양하고 싶다.
"이거 위장이 다 상할 것 같은데요? 이 정도면 '용감한'이 아니라 '어리석은'이란 수식어를 달아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 좋은 지적입니다.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그냥 스트레이트로 마셔서 용감함을 시험했다고 하는데, 참 미련한 짓이지요."
지가 준비해놓고 이게 뭔 개소린가 싶었다. 그것이 나도 모르게 표정에 드러났는지, 팔숨 경이 헛기침을 했다.
"크흠! 이 술은 단번에 마시고 취하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훌륭한 술인지라···."
그가 시종에게 술병을 도로 건넸다.
어느새 다른 시종이 한 명 더 붙어, 나와 팔숨 경의 자리 앞에 하이볼 글라스를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서빙 카트 위에 있던 얼음 통에서 집게로 얼음을 꺼내, 옮겨 넣었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이러지?'
행여나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타지 않을까, 유심히 살폈다.
시종이 모래시계 모양의 계량컵을 이용하여 물을 먼저 붓고, 그 위에 술을 따랐다. 연주홍 빛의 술이 노을처럼 내려앉는다.
그 과정에 의심스러운 부분은 없었다.
"요즘에는 다들 이렇게 플로트 스타일로 즐기지요. 희석되면서 알코올 냄새가 가시니, 풍부한 향이 살아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향과 맛을 즐기며 느긋하게 마시는 것이, 진정으로 이 술을 즐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예."
진짜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평범한 애주가였을 뿐인가?
오늘 불렀던 것은 그저 탐색전이었거나, 내 경계심을 무너뜨리는 것이 목적이었던 걸까?
아니면 냄비에 개구리를 넣고 물을 끓이듯, 취하는 것도 모르게 은근슬쩍 보내버린다는 작전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희석했다 한들, 여전히 도수가 높은 편입니다. 속이 상할 수도 있으니, 그전에 위를 보호할 겸 꿀물이라도 한 잔 마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얼씨구? 이젠 내 위장 건강까지 생각해 준다.
한쪽에서 술을 타는 동안, 꿀을 타고 있던 다른 시종이 나와 팔숨 경에게 꿀물이 담긴 잔을 건넸다.
"젊었을 때는 이런 걸 따지지 않았는데 나이를 먹고 나니 속이 영 부담스러워져서···. 리벨론 경도 젊다고 방심하지 마십시오. 건강은 젊었을 때부터 지켜야 하는 법입니다."
팔숨 경이 겸연쩍다는 듯 말하고는 꿀물을 원샷했다. 것 참 시원하게도 마신다.
어떻게 술을 버려야 자연스러울까 생각하며, 꿀물이 든 잔을 들어 올린 순간.
- 쨍그랑!
"아악-!"
유리창을 깨고 들어온 무언가가 나와 팔숨 경 사이를 빠르게 지나쳤다.
비스듬하게 날아온 그것은 내 손에 들린 잔을 관통했고, 내게 잔을 건넸던 시종의 허벅지에 틀어박혔다.
시종이 내지른 날카로운 비명이 연회장 안을 채웠다. 깨진 잔에 담겼던 음료로 인해 손과 소맷자락이 젖어 들었다.
"습격이다!"
"암살이다, 암살자야!"
순식간에 모임은 아수라장이 되어, 보좌관들은 공황에 빠져 소리를 지르며 테이블 밑으로 숨어들었다.
테이블이 들썩이며, 그 위에 올려져 있던 술들이 쏟아져 여기저기에 튀었다.
나도 그들을 따라 허겁지겁 의자에서 내려와 테이블 밑으로 숨으며,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뭐, 뭐야 방금?! 자칫 잘못 했으면 죽을 뻔했던 거 아냐?'
이 또한 팔숨 경의 계획 중 일부인가 싶어, 반사적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전혀 모르는 일이었는지, 눈을 크게 치켜뜨고 두리번거리며 다급하게 기사들을 불러댔다.
소란은 순식간에 밖으로 퍼져나갔다. 기사들이 범인을 찾느라 야단이다.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더 이상의 공격은 이어지지 않았다.
"괜찮습니까, 리벨론 경?"
"······."
"리벨론 경?"
팔숨 경이 가장 먼저, 타겟으로 추정되는 내 안부를 확인한다.
"아···, 아! 네, 네···. 괘, 괜찮···."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위협을 당한 것은 처음이라, 정신이 아득했다. 때문에 답이 조금 늦었고, 그동안 팔숨 경은 내가 다친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모양이다.
내게서 시선을 떼고, 급히 다른 보좌관들의 안부도 살폈다.
"다치신 분 계십니까?!"
확인 결과, 날아온 단검에 맞은 시종 외에는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소란통에 바닥에 떨어져 깨진 와인 잔의 파편에 베인 자들이 몇몇 나왔다.
혹시 모를 추가 습격을 대비하여, 아르젠토 공작가의 기사들이 연회장을 둘러쌌다.
"팔숨 경!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침입자가 들어오다니, 아르젠토 공작저의 경비가 이 정도밖에 안 될 줄은 몰랐습니다!"
"프라시더스 공작저에서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인데···."
안전이 확보되었다고 생각했는지, 한두 명씩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비난의 목소리에 팔숨 경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입술을 짓씹었다.
"어떻게 대제국의 공작가 저택에서 암살 시도가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암살이라 확정이 난 것도 아니나, 불안정한 심리는 최악의 수를 생각해냈다.
날아온 것이 사람의 숨통을 충분히 끊을 수 있는 날붙이라는 점.
그리고 그것이 내가 다치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는 것 때문인지, 아예 암살 시도로 못 박아버린 모양이다.
"애초에, 오늘의 모임 자체가 이상하지 않았나···?"
누군가 작은 의문을 던졌다.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린 혼잣말이었으나, 그 독백은 모두의 귀에 꽂혔다.
"화, 확실히···. 듣고 보니, 팔숨 경이 이런 모임을 열 필요는 없을 터인데···."
"굳이 탄탄한 공작저의 보안을 뚫고 다른 가문의 보좌관을 노리다니, 그것도 이상합니다."
"팔숨 경을 노린 것 아니었습니까?"
"아니오, 누가 보아도 리벨론 경을 노린 것이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을 따라, 나도 내 꼴을 살펴봤다.
어딘가에서 튄 적색 와인과 테이블 위에서 쏟아진 '용감한 자의 불꽃'. 그리고 꿀물로 범벅이다.
"팔숨 경은 이전부터 리벨론 경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지 않았던가···?"
"······."
"······."
짤막한 적막이 스쳐 지나갔다.
"···저, 저는 이만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저도···."
"리벨론 경께서도 어서 돌아가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더 있다가는 자신들을 입막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일까?
든든하게 연회장을 지키고 선 기사들을 보며, 위협을 느낀 그들이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난다.
"침입자가 아직 주변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직 확인 중이니, 안전이 확보된 이후에···."
"아직도 침입자를 찾지 못했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입니까? 공작저 한복판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팔숨 경은 나가는 이들을 잡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는 불신이 서려 있었다.
처음부터 침입자 자체가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계획된 암살일 수도 있다.
프라시더스 가문의 경계를 뚫는 것 보다, 내부에서 일을 처리하는 편이 낫다고 느낀 걸지도 모른다.
···대충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한다.
아르젠토 공작저에서 일어난 일이니만큼 이번 일의 책임은 절대 피해갈 수 없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아르젠토 공작가에서 프라시더스 공작가와의 충돌을 감수하면서까지, 나를 죽일 이유 따위는 없다.
'세르펜스 또한, 그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나를 순순히 보냈던 거겠지.'
그러나 공포에 마비된 집단 사고의 흐름은 그것이 정답인 양 확신을 내렸다.
'아르젠토 공작가와 프라시더스 공작가를 대놓고 싸움 붙이려는 수작 아냐?'
···따위의 의심도 스쳐 지나갔으나, 그쪽에서 굳이 불리한 위치를 자처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팔숨 경의 표정이 그와는 무관한 일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일단 돌아가자.'
이대로 여기에 머물 생각이 아니고서야.
돌아가려면 다른 이들이 자리를 떠날 때, 함께 행동하는 편이 나았다.
프라시더스 가의 마차가 대기한 곳으로 이동하며, 최근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던 손수건으로 아직도 흥건하게 젖어있는 손을 대충 닦아냈다.
'으, 그래도 끈적거리네.'
하필 들고 있던 것이 꿀물이라 그런지, 물기를 닦아낸 이후에도 오른손에는 끈적임이 남았다.
찐득거리는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마차의 문을 열었다. 올라타려는데, 이미 그 안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누···!"
반응할 새도 없이 그가 손을 뻗어, 손수건을 들고 있던 나의 오른손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휙 하고 잡아당겨 나를 마차에 태운다.
누구냐고 소리치려던 입을 그가 반대 손으로 틀어막는 것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강제로 마차에 태워지는 과정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났다.
"접니다."
바로 귓가에 속삭인 것이 아니었더라면, 듣지 못했을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내는 것은 그닥 어렵지 않았다.
그만큼 특색있고 익숙한 목소리였으니.
'세르펜스, 이 녀석이 왜 여깄어?!'
내가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입을 막았던 손을 떼어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아뇨! 올라타다가 발을 헛디뎌서! 괜찮으니 어서 출발해주세요!"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내가 느닷없이 '누!'를 외친 탓에 마부가 의아함을 느낀 모양이다.
아무래도 세르펜스가 올라탄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누가 볼세라, 빠르게 마차 문을 닫았다.
마차가 출발했다.
내 손을 잡고 있던 세르펜스의 손이 찐득하게 떨어져 나간다. 불쾌할 법도 한데, 그는 그러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묵묵히 제 품에서 이제는 상비품이 되어버린 방음 스크롤을 꺼내 찢었다.
"죄송합니다, 혹시 많이 놀라셨···. 아니, 놀랐겠지. 그래. 미안하다···."
마법이 발동된 것을 확인하자마자, 어째서인지 세르펜스가 안절부절못하며 사과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