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회
30. 공작가 간의 대립 (4)
"그건 그렇고. 용건이 있어서 부르셨다고 하셨죠? 중요한 일입니까?"
나는 자리에 앉으면서 그녀에게 질문했다.
"당연하죠! 제가 괜히 절교니 뭐니 하면서까지 시온 씨를 오라고 한 게 아니랍니다. 제가 별 이유도 없이 바쁜 사람을 오라 가라 할 만큼, 생각 없고 한가한 사람은 아니거든요?"
가게를 감시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니. 혹시라도 편지가 유출되지 않을까 염두에 두고 적은 거겠지.
'악마 숭배 세력과 관련이 있는 일이려나?'
시기상으로는 아르젠토 공작가 쪽과 연관이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단순한 우연일지도 모르니, 일단 들어봐야겠다.
"공작님께서 직접 오셨으면 좋았을 테지만, 시온 씨가 어련히 잘 전달해 주시겠죠."
"지금은 괜찮은 겁니까? 누가 엿듣고 있다거나···."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비밀리에 의뢰를 넣으려는 분들 때문에 준비한 장소인걸요. 방음은 확실하답니다~. 정 걱정되면 스크롤이라도 하나 찢을까요?"
"적어도 내가 감지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잡히는 기척은 없소."
솔레르티아와 윈스톤이 각각 대답했다. 그렇다면야 괜찮겠지.
"아까부터 비밀 의뢰에 관해 얘기하시던데, 스크롤을 몰래 사는 게 일반적인 겁니까?"
"적지는 않죠. 그중에서는 시온 씨처럼 신변 보호를 위해 구매해 가시는 분들이 가장 많아요. 비장의 한 수랄까? 그런 게 알려지면 그 효과가 반감되지 않겠어요?"
"······."
내가 너무 남발하고 다녀서 그렇지, 마법 스크롤은 누군가에게는 숨겨야 하는 비장의 한 수가 될 만큼 효용성이 높은 물건이었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함정 수사를 위해 잠입했을 때와 바스툴 왕국에서 납치범들과 대치했을 때도 그랬다.
'내가 스크롤을 꺼내 들었을 때. 다들 경계했었지?'
무슨 마법이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목숨이 귀하다면 비밀로 숨겨 마땅했다.
"그 외에도 정말 프라이버시가 걸린···, 푸후···읍. 아이, 참. 웃으면 안 되는데. 아무것도 아녜요. 이건 정말 안타까운 얘기니까."
개중에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사연으로 의뢰를 맡기는 사람도 있나 보다.
호기심이 자극되었지만, 웃픈 사연을 가진 고객님을 위해 솔레르티아는 비밀을 지켰다.
"흠, 흠. 아무튼, 그런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분들 때문이려나요? 판매한 스크롤 자체는 판매 개수와 가격. 그리고 용도에 관한 기록을 남겨서 연말 정산 때 제출해야 하는데, 누가 어떤 스크롤을 사 갔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법제가 없어요."
기득권층이 만든 법이고, 구매자 대부분이 기득권층이기 때문에 생겨난 아이러니다.
'그나마 마법 스크롤에 관한 정보라도 남기는 건···.'
아무래도 스크롤이라는 게 누구나 쓸 수 있는 물건이다 보니, 마냥 풀어두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러한 탓에 판매 자체에 몇 가지 제약을 두고, 어떤 물건을 만들어 팔았는 지라도 꼼꼼하게 검사하려는 걸 테다.
"그래서 용건이라는 건 어떤 겁니까?"
"시온 씨, 은근 성격 급하시네요. 저 놀란 거 아직 안 가라앉았거든요?"
바로 직전에 웃픈 사연을 떠올리며 혼자 키득거렸으면서. 그녀가 새초롬한 눈으로 나와 윈스톤을 흘기며 말했다.
"저쪽 분이 누구인지 소개 좀 부탁해도 될까요? 제가 공작저에 머물렀을 땐, 저렇게 눈에 띄는 기사분은 없으셨던 거로 아는데···."
들어오자마자 약간의 소동이 있었고, 솔레르티아가 워낙 의미심장한 얘기를 던져서 잠시 깜박했다.
"아, 이분은 윈스톤 레드포드 경이라 합니다. 원래는 바스툴 왕국 출신의 분이신데···. 어찌어찌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설명하려면 너무 길어서요."
"···흐응, 뭐.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는 법이죠."
설명을 하려니, 그 사정이 너무 길었다.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마다 윈스톤이 이전 주군에게 버려지고 어쩌고 하는 얘기를 구구절절 떠들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적당히 모르는 척해달라는 식으로 얘기하자, 그녀가 이해한다는 듯 넘어가 주었다.
"그리고 여기 솔레르티아 씨에 관해서는 오면서 설명해 드렸었죠?"
"아까는 결례가 많았소."
윈스톤이 묵직하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경계하고 있는지, 자리에 앉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다. 그녀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사라진 후가 아니라면, 계속 경계할 생각인가 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공작님이 아니라 시온 씨의 기사인 줄 알겠네요. 저분은 계속 저러고 계실 것 같으니, 그냥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대쪽 같은 윈스톤의 태도에 솔레르티아가 혀를 내둘렀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비밀리에 특정 스크롤 제작을 의뢰하는 경우는 많아요. 그런데 최근. 그런 것을 참작하더라도 의심스러운 고객님이 생겨서 말이죠."
"대체 뭐가 얼마나 의심스럽길래 그럽니까?"
"간혹가다가 스크롤 제작자 중에, 마법 구동에 전혀 관련 없는 자신만의 특색 있는 문장을 그 안에 숨겨 놓는 경우도 있다는 거. 알고 계세요?"
[성검의 주인]에서 주인공 일행 중, 스크롤 제작사는 없었다. 일행 중 뛰어난 마법사인 아니마가 있으니 그것을 구매할 필요도 없었고.
마법 스크롤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나, 어디까지나 아니마의 실력을 띄워주기 위한 장치로써 쓰였다.
『
마법은 발동 시기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즉석에서 마나를 제어하여 사용하는 즉시(卽時) 발동 마법.
사전에 마법 진을 그려놓고, 필요할 때 사용하는 사후(事後) 발동 마법.
즉시 발동 마법의 장점이라 함은, 상황에 따라 그 마법의 범위와 위력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동적인 수치 도입이 필요한 마법이나, 지속적으로 섬세한 제어가 필요한 마법은 결코 사후 발동 마법으로는 구현할 수 없다.
하나, 즉시 발동 마법의 경우 두 가지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모든 계산을 빠르게 암산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
자신의 마나를 끌어내어 대기의 마나와 감응하여 허공에 진을 그려내야 한다는 것.
계산이 어긋난 마법은 손잡이 없는 칼날을 맨손으로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마나 감응력이 부족하면 섬세한 진을 그려낼 수 없고, 그것을 초과한 순간 마법은 무너져 내린다.
때문에.
크고 복잡하며 긴 계산 식이 필요한 마법을 즉석에서 펼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발현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보통 대(大) 마법이라 함은 미리 마법 진을 설치해두고 사용하는 마법을 일컬었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단 한 사람.
아니마 프로이트, 그녀만은 예외였다.
- 고오오오···.
마나가 진동한다.
뻗어 나온 마나의 실타래가 고치처럼 감싸듯이, 그녀를 중심으로 복잡한 마법 진을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바람의 흐름에 따라. 적들의 움직임에 따라.
지워지고 새로이 만들어지며, 점차 그 크기와 범위를 넓혀나갔다.
대기(大氣)와 대지(大地)가 요동친다.
피아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뒤섞인 난전 속에서. 이 드넓은 전쟁터에서.
그녀의 마법은 철저하게 마물과 악마의 하수인들만 골라내어, 갈가리 찢어 놓았다.
』
'그렇다고 사후 발동 마법이 무조건 더 쉽다는 건 아니지만.'
가상의 공간을 미리 설정해서 범위를 지정해야 한다.
방출형 마법은 더 까다롭다. 공간 설정에 더해 경우의 수를 계산하여, 마법이 쏘아지는 방향을···.
'에라, 알게 뭐야. 내가 직접 마법을 쓸 것도 아닌데.'
예전에 솔레르티아에게 들었던 것 같은데, 너무 길어져서 다 날아가 버렸다.
결론은 문장 표현력이 중요하댔나?
'···마법사들은 문과와 이과. 모두에 통달한 괴물들인가. 과연 고급 인력!'
가상의 공간에 관한 대표적인 예시는 방음 스크롤이다.
스크롤을 중심으로 퍼져서 벽에 부딪혀 막을 만든다.
그것이 가능한, 사방이 감싸진 공간. 그것이 발현 조건이고, 그 때문에 문을 열 거나 하면 마법이 바로 깨지는 것이다.
여하튼. 솔레르티아가 말한 얘기는 처음 듣는 얘기인지라, 모른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 문장을 대놓고 쓰는 게 아니라, 구동식 사이에 교묘하게···.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죠? 예를 들면··· 세로 읽기 같은 느낌? 물론 진짜 세로로 읽는다고 보이는 건 아니고요. 단어와 문장을 해체해서 그걸 또 교묘하게···. 일단 이건 넘어가죠."
다른 건 모르겠지만, 세로 읽기만은 알아들었다.
이 세계에도 세로 읽기가 있는 줄은 몰랐으나, 비밀을 주고받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고 따로 익힐 필요도 없는 암호 아닌 암호이니.
여기도 쓰는 사람이 있겠지.
"어쨌거나 그런게 있어요. 일종의 서명 같은 거죠. 마법사 이외의 보통 사람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거니까, 모른다고 해도 어쩔 수 없죠."
이래서 그녀가 세르펜스를 그렇게 찾았나 보다.
내가 세르펜스에게 얘기를 전달하려고 해도, 최소한 기본적인 이해가 밑바탕 되어야 하니까.
"그런데 갑자기 그게 왜요?"
"이게 본인 확인용이란 말이죠? 마법 식의 도용 방지이기도 하고, 어디서 싸구려 스크롤을 들고 와서 불발이라고 진상을 부리는 놈이 나타났을 때를 대비한 반박의 증거로 삼을 수 있는. 그런 거 말이에요."
이 세계에서 저작권과 진상 고객 대응책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이야.
"어떤 건지 알겠네요.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그걸 묻는 사람이 있었단 말이죠. 그런 문장을 넣었느냐고 물어본 정도가 아니라, 어떤 문장을 쓰느냐고 물었다고요! '프라이드 높은 스크롤 제작자들은 스크롤 안에 자신만의 문구를 남긴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레세라투스 님도 당연히 남기시겠죠? 보통 자신에게 의미 있는 문장을 남긴다고들 하던데···. 레세라투스 님은 어떤 문장을 쓰셨을지 참으로 궁금하네요.'라나?"
솔레르티아가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불만스레 투덜거렸다.
그런데 어째···.
"···그거 그냥 작업 멘트 아닙니까?"
"시온 씨가 그 자리에 없어서 그리 생각하실 수 있는 거겠죠. 그건···, 그래요. 물건을 팔아먹기 위해 온갖 미사여구를 총동원한 상인···. 딱 그 느낌이었어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어요!"
솔레르티아가 저리 말하니, 신뢰도가 어마무시하다. 그녀의 말이 분명 맞을 것이다.
"하, 어디다가 어떤 식으로 숨긴 거냐고 묻지 않은 게 기특할 정도죠? 심지어 시온 씨 만큼이나 많이 사 갔던 단골손님이었어요. 다양한 종류로요. 한참 사재껴 놓고 묻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
"갑자기 환불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닐 테고···."
그랬다면 어떤 문장을 서명으로 쓰는지 물어보지 않았을 거다. 게다가 나라면 대놓고 알려줘도 알아보지 못할 거다.
그러니까, 스크롤을 구매해간 사람은 마법에 상당한 조예가 있다는 얘기다.
"저 같은 경우에는 저만 알아볼 수 있는 특정 단어가 있거든요. 거기에 그때그때 생각나는 문장을 더해서 만들어요. 저 혼자만 이해할 수 있고, 남들이 보면 알 수 없는 문자의 나열에 불과해서. 아마 그 때문에 이제껏 사 간 스크롤에서 제 서명을 찾아내지 못한 거겠죠. 하다 하다 안 되니 제게 물어본 거고."
정말 제대로 꼬아서 숨겨 놓았나 보다.
나와 비슷한 정도의 구매량이면 족히 몇십 장은 된다는 건데, 표본이 그렇게나 많은데도 찾아내지 못하다니.
오죽 답답하면 대놓고 물었을까?
"그건 알려드릴 수 없다고 말씀드리긴 했는데···. 그 뒤로 종종 이상한 사람들이 주변을 기웃거리거나, 제가 사용하지 않은 마나의 흔적이 남아 있다거나. 대비책으로 건물 여기저기에 마법을 설치해 놓고, 제가 쓸 스크롤도 잔뜩 만들어 두긴 했는데···. 영 신경 쓰여서요."
"그럴 수밖에요. 위험하실 텐데, 계속 가게에 머무르셔도 괜찮겠습니까?"
그녀의 말대로라면 나를 부른 것 자체만으로도 그 '고객'이 무언가 눈치를 챌 수도 있었다.
그러나 솔레르티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을 하다, 고개를 내저었다.
"마법 자체가 아니라 서명을 필요로 한다는 건, 누군가가 저를 사칭하려는 거잖아요?"
"···역시 그런 거겠죠?"
"그 스크롤이 어떤 식으로 쓰일지도 모르고, 만약 범죄···. 아니죠, 그 정도면 오히려 낫죠. 악마 숭배 세력과 연관되기라도 한다면···. 으으···! 상상도 하기 싫네요. 단순히 피해서 될 문제가 아녜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그리고 그녀의 가게는 세르펜스에게 투자를 받아 세워졌고.'
만일 그녀가 판매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솔레르티아 표 스크롤이 어딘가에서 사용되었고, 그것이 악마 숭배 세력과 연관이 되어 있다면.
상당히 치명적인 일이었다.
'자꾸 [성검의 주인]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 생기기 시작하네···.'
골치가 아파져 온다.
"구매자 정보는요?"
"유감스럽게도 없어요. 해당 고객님은 100% 선지급 후, 지정된 날짜에 직접 오셔서 물건들을 찾아가셨거든요. 그러시지 말라고 했는데 어쩌겠어요. 돈다발을 두고 그냥 나가버리셨는데."
작은 기록이라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인가보다.
"그림 쪽에는 조예가 없어서, 그자의 외형을 최대한 글로 표현해 봤는데 도움이 될까 모르겠네요. 그리고 원래는 기록 파기를 원하시는 고객님의 구매 명세는 바로바로 삭제해야 하지만···. 으흠! 으흐음!"
솔레르티아가 헛기침을 하며 서류들을 내게 건넸다. 몰래 다 적어놨다는 뜻이다.
"제 서명을 찾아내기 위해 사간 거라면 구매 목록은 별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없는 것보다야 낫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