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회
31. 공작가 동상이몽 (2)
"···네. 아주 피 말리는 추격전이었습니다."
굳이 오해를 풀어 줄 필요는 없었다.
오늘의 설정은,
'일단 모든 죄를 페라리우스 백작가에 뒤집어씌우고 보자.'
이왕 이렇게 된 거, 두 공작가의 접촉을 경계한 페라리우스 백작가에서 추적을 붙였다고 오해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고양이와 노느라 약속 시각을 어긴 사람보다, 추격자를 떼어놓느라 늦은 사람이 더 나았다.
더불어, 옷에는 고양이 털 비슷한 것도 붙어있지 않았다.
팔숨 경도 내가 고양이와 놀다가 지각했다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고로 들킬 염려는···.
'···가만? 진짜 고양이랑 논 것도 아니었잖아?'
대화에 맞춰주느라 세르펜스를 고양이에 대입해서 설명하다 보니 잠시 헷갈렸다.
"그나저나 리벨론 경께서 먼저 저를 보자고 연락을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직원들도 나갔겠다, 고양이 얘기는 이제 그만두고 본론으로 들어갈 생각인가 보다.
팔숨 경이 나를 탐색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운을 뗐다.
'하긴, 저번 달 보좌관 모임이 그렇게 끝나버렸으니까.'
의아함을 느끼며, 의도를 궁금해할 만도 하지.
"제가 이렇게 팔숨 경께 만남을 청한 것은···. 그게 그러니까, 이거 말문을 대체 어떻게 열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괜히 긴장이 되어, 크게 심호흡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마침 저도 리벨론 경께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말씀하시기 힘드시다면 제가 먼저···."
"아, 아뇨! 괜찮습니다!"
자고로 선빵 필승이랬다.
"저번 달 있었던 보좌관 모임에서 돌아가기 위해 마차에 올랐을 때···. 마차 안에 이런 것이 놓여 있었습니다."
말을 가로 채일까, 나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카드를 꺼냈다.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카드에는 누군가가 일부러 왼손으로 쓴 듯.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 팔숨 경이 당신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으로 당신이 마실 음료에 약을 탔습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돌아가시는 대로 옷에 묻은 음료들의 성분을 조사해보십시오. ]
당연히 조작된 증거다.
하지만 팔숨 경의 생각은 많이 다른 듯했다. 그의 눈가가 분노로 인해 미세하게 떨렸다.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했을 줄은 몰랐다는 생각이 여실히 드러난다.
'진짜 제대로 낚였네.'
이제 팔숨 경은 알게 된 거다.
그때 날아온 단검이 노린 것은 내 목숨이 아니라, 들고 있던 잔이었다는 사실을.
'프라시더스 공작가의 보좌관이 아르젠토 공작가에 침입한 괴한에 의해 살해당한다면?'
그 괴한의 정체는 세르펜스였으므로 애초에 가정 자체가 성립되지 않지만, 팔숨 경이 그런 것을 알 리 없으니 일단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치자.
아르젠토 공작가에 책임을 물을 수 있을지언정, 그 죄를 물을 수는 없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두 공작가의 사이가 불편해지기는 할 거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서로를 완전히 적대시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페라리우스 백작가는 다른 수를 짜냈다. ···아마도.
그것이 바로 저 카드···라는 설정.
아르젠토 공작가의 보좌관이 프라시더스 공작가의 보좌관에게 직접 위해를 가했다는 정황 증거를 만들어 낸 거다.
···페라리우스 백작이 아니라 세르펜스가.
'완벽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죄다 조작되어 있잖아?'
칼을 던진 것은 세르펜스요, 카드에 글씨를 쓴 건 나였다.
세르펜스는 왼손 글씨마저 너무나 반듯한 나머지, 어쩔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의 입에 만년필을 물려 보려다가, 서릿발보다 싸늘한 그의 눈동자와 마주하고 그냥 내가 왼손으로 썼다.
'이래놓고 이간질이 아니라 우기다니···.'
그런 말을 대체 누가 믿는다고. 세상 뻔뻔한 녀석이다.
"이, 이건 대체···."
"이 카드 내용보다 더 놀라운 건 결과입니다. 정말 나오더군요. 가벼운 각성제 성분의 약이 하나. 그리고···, '미혹의 안개'라는 이름의 마약이 하나."
"저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신 룩스메아님께 맹세하건대, 저는 그날 리벨론 경과 그동안의 회포를 풀고 오해를 털어낼 생각뿐이었습니다. 이건 분명 모함입니다!"
모함 좋아하시네.
다른 건 새빨간 거짓이지만, 팔숨이 약을 탄 것만은 진실이었다.
세르펜스의 조사 결과.
허벅지에 칼이 꽂혔던 그 시종은 아르젠토 공작가에서 지급된 치료비 외에, 팔숨 경에게 따로 보상을 받아 챙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저도 무려 아르젠토 공작가의 보좌관씩이나 되는 분께서 그런 치졸한 짓을 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성분 조사를 맡긴 결과가 이러니, 어쩌겠습니까?"
안타깝다는 감정을 꾸며낸다고 꾸며냈는데, 잘 전해졌을는지 모르겠다.
"비아냥은 그만두시고, 진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약물의 이름까지 확인할 정도라면 그 유통로와 구매자 정도는 파악하셨을 텐데요. 함정에 빠진 저를 비웃고 싶으신 건 알겠지만, 거기까지만 합시다."
전혀 전해지지 않았나 보다.
뭐가 문제지? 시온의 얼굴? 내 연기?
"저도 짚이는 구석이 있습니다. 그 마약의 구매자 중, 페라리우스 백작가와 연관된 이가 있지 않았습니까?"
"···앗!"
대사를 뺏겼다.
내 반응을 다른 쪽으로 해석했는지, 팔숨 경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더 잘됐네.'
이쪽에서 먼저 페라리우스 백작가를 콕 짚어 언급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결과다. 이간질을 의심받을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뇨?"
나는 시치미를 뚝 떼며 모르는 척 그에게 되물었다.
"제가 리벨론 경에게 권한 음료에 누군가가 약을 풀었고, 갑자기 날아온 단검으로 인해 그것들이 리벨론 경의 옷에 쏟아졌으며, 마차 안에 이런 글이 쓰여있는 카드를 발견했다?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팔숨 경은 페라리우스 백작가의 악마 숭배자들을 떠올렸는지, 분노로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상하지. 아무렴 이상하고말고.'
날아온 단검은 약이 녹아든 꿀물을 내가 마시지 못하게 하려고 세르펜스가 날린 거고, 카드는 오늘 낮에 썼다.
가정과 순서가 엉망이니, 결과물도 이상할 수밖에.
"듣고 보니 많이 이상하긴 합니다."
"보좌관 모임 때 날아왔던 단검을 던졌던 침입자는 암살을 할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닐 겁니다. 처음부터 리벨론 경이 들고 계시던 잔을 노린 겁니다."
이야, 놀라워라. 정말 깜박 속았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우리는 모두 그자가 암살을 위해 왔다고 착각하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며 이성을 놓친 사이, 누군가가 그렇게 받아들이도록 유도하고 선동한 겁니다."
"팔숨 경께서는 그자가 페라리우스 백작님의 보좌관이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싶은 겁니까?"
"예, 맞습니다."
안 그래도 저 얘기를 어떻게 풀어야 자연스러울까 고민했는데. 알아서 본인 입으로 줄줄 설명해주니 참으로 고맙다.
"그리고 다시 침입자에 관한 이야기로···. 세간에는 침입자가 잡히자마자 죽었다고 발표했으나, 실상은 다릅니다."
당연히 다를 수밖에.
그때의 침입자는 지금도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그자의 배후는 페라리우스 백작가였으며···. 악마 숭배자였습니다."
"네?!"
아까 하고 싶다는 얘기가 있다더니, 이런 얘기였나 보다.
이간질하러 왔는데, 상대방이 더 화끈한 이간질을 선보였다.
'아니지?'
페라리우스 백작이 악마 숭배 세력의 후원자고, 그 보좌관이 악마 숭배자다.
침입자의 배후는 개 헛소리였지만, 악마 숭배자라는 얘기는 거짓 하나 없는 진실.
이간질이라기보다는 고자질이라 해야 맞는 건가?
"놀라시는 것도 이해합니다. 왜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는지도 의아하기도 할 테고."
하나도 의아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알릴 수 없었던 거겠지. 충분히 이해한다.
"거기까지 심문하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방심한 틈을 타 그자가 자결하는 것을 막지 못한 탓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물적 증거도 없고 증인도 죽어버리는 바람에, 불확실한 증거로 그들을 지목했다가는 역으로 공격당할지도 몰라서···."
나와 세르펜스도 증거 문제로 그쪽이랑 페라리우스 백작가를 고발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래도 동질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악마 숭배자 관련 일은 프라시더스 공작님께 말씀드리는 것이 가장 빠른 해결법이라는 건 알지만, 요즘 사이가···. 리벨론 경도 아시잖습니까."
알다마다. 그쪽이 먼저 시비를 걸었지.
"하다못해 아르젠토 공작가의 힘으로 그들의 뒤를 조사하고 싶었지만···."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붙잡는 형태죠."
"이제 와 돌이켜보면 '우리' 공작가문이 서로 대립하게 된 것부터가 페라리우스 백작가 때문이었습니다."
얼씨구?
은근슬쩍 '우리'를 칭한 거로도 모자라, 갑자기 과거 얘기까지 꺼내온다.
"프라시더스 공작님처럼 고고하신 분께서 황위 쟁탈전에 관심을 둘 리 없었는데···. 어째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듣고 믿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작 의심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에게 속아 두 공작님께 큰 손해를 끼치고 말았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자신의 잘못을 페라리우스 백작가 탓으로 죄다 뒤집어씌우고, 손을 씻어낼 작정인가 보다.
'과연 그게 뜻대로 될까···?'
페라리우스 백작가 쪽에서 그를 그냥 놓아줄 것 같지가 않다.
최후의 순간이 오면 자기들만 죽을 수 없다며, 그를 끌어내리려고 하지 않을까?
'잘 빠져나간다 하더라도, 악마 숭배 세력이 그들뿐인 것도 아니고···.'
구태여 세르펜스가 나서서 따로 손을 쓸 필요도 없겠지.
그들의 보복은 결코 가볍지 않다.
"돌아가자마자 가문의 정보원들을 모두 철수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네, 저도 공작님께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걸로 정보 단체의 발이 묶인 것도 해결되었고, 아르젠토 공작가와 페라리우스 백작가도 알아서 잘 싸울 것 같고.
'이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는 건가?'
그전에 눈앞에 놓인 진수성찬부터 먹어야겠다.
"아 참. 리벨론 경은 돌아가실 때 조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네?"
드디어 음식을 좀 먹어보나 했더니, 팔숨 경이 갑자기 또 말을 걸어왔다.
"아까 미행이 붙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필시 오늘 저와 만나는 것을 알고, 리벨론 경을 납치하여 제게 그것을 뒤집어씌우려는 수작일지도 모릅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걱정을 들은 것 같다.
오기 전 함께 놀던 우리 집 고양이가 나를 납치할 이유는 없고, 남의 집 고양이는 우리 집 고양이를 이기지 못한다.
"가게의 직원에게 부탁하여 저택에 호위할 사람을 보내달라 연락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세르펜스 한 명이면 됐지.
더 붙어봐야 인력 낭비밖에 안된다.
"괜찮습니다. 제 한 몸 정도는 건사할 줄 압니다. 팔숨 경이야말로 조심하세요."
조심은 본인이 해야지.
'그쪽 공작님도 따라다니면서 그쪽을 지켜주는 건 아닐 거 아냐?'